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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구약

레위기의 문둥병과 피부병은 무엇이었는가(레위기 13장 1-59절)-성경의 “한센병”은 “문둥병이나 나병”이 아닌 “피부병”으로 번역되어야(유윤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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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문둥병과 피부병은 무엇이었는가(레위기 131-59)-성경의 한센병문둥병과 나병이 아닌 피부병으로 번역되어야(유윤종 교수)

 

척박한 유대 광야 모습

레위기의 문둥병과 피부병은 무엇이었는가(레위기 131-59)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목사, 조직신학, Th.D.)

 

 

 

가. 들면서-성경 시대의 환경과 피부병

 

성경은 모세 시대 가나안 주변이 피부질환이 아주 심하던 환경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같은 고통은 신약 시대까지 연장된다. 팔레스틴 지역만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15년 백제 온조왕 4년 조 삼국사기기록에 보면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생기고, 역병(疫病)이 유행했다고 기록하여 당시 전염병이 들끓었던 시대상을 전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역병이나 역질(疫疾)에 관한 기록이 많다. 13933월 태조가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절인 양주 회암사에 역질이 유행한 것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00여건 이상에 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 중인 조선시대 인물의 진신화상첩(眞身畵像帖) 22건 가운데 5명의 인물의 화첩에서 마마(천연두)의 뚜렷한 흔적이 보일정도다. 우리 인간은 왜 이 같은 질병에 노출된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한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 속에서 고단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내산 아래서 1년여를 체류한 다음 광야의 긴 여행을 떠나야 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참기 힘든 피부병(문둥병과 유출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누구든지 피부에 무엇이 돋아나거나 종기와 부스럼과 색깔이 나타나면 일단 피부병(문둥병)으로 간주하고 그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도록 명하였다. 여기에는 어떤 교훈이 담겨있는 것일까?

 

 

나. 본문

 

1. 피부질환 진단(1-8절)

 

성경은 환처의 털이 희어졌거나 피부보다 우묵하게 보이면 문둥병으로 간주하였다. 다만 피부가 탈색되었더라도 피부보다 우묵하지 않고 그 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7일 동안 그를 격리시켰다가 7일째 되는 날에 다시 진찰하여 그 자리가 다소 엷어지고 더 이상 번지지 않았으면 그것은 단순 피부병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치료 및 사후 조치로 제사장은 그를 깨끗한 자로 선포하고 옷을 세탁하도록 조치하였다.

 

 

2. 난육(爛肉)에 의한 진단(9-17절)

 

사람에게 문둥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하여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난육이 생겼으면 이는 피부의 오랜 문둥병으로 제사장은 부정하다 진단하였다. 다만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금고하지는 않을 것이며 제사장이 보기에 문둥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까지 퍼졌거든 그가 진찰할 것이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아무 때든지 그에게 난육이 발생하면 그는 부정한즉 제사장이 난육을 보고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찌니 그 난육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문둥병이며 그 난육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처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진단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피부병에 걸릴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심각한 피부병의 저주로부터 정결케 될 수 있는 것처럼 영적 법칙도 유사하다. 인간은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어떤 추악한 죄와 저주로부터도 정결함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난육(raw flesh, , “바사르 하이”)소생하는”(하이) “몸의 살”(바사르)이라는 의미로 피부 일부가 터져 피부 표면 밖으로 불거져 나온 상태를 말한다. 당시 난육에 대한 이학적 치료법이나 사후 조치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질병도 치유될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피부 종기에 의한 진단(18-23절)

 

피부에 종기가 생겼다가 나았고 그 종처에 흰 점이 돋거나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생겼으면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는 진찰하여 피부보다 얕고 그 털이 희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지니 이는 종기로 된 문둥병의 환처로 진단하였다. 그러나 제사장의 보기에 거기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제사장은 그를 칠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그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진단하였다. 그러나 그 색점이 여전하고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종기 흔적이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진단하였다. 피부 종기에 대해서 성경은 심할 경우 칠일 동안의 격리법을 제시한다. 그 외 별 다른 치료법은 제공하지 않고 있다.

 

 

4. 화상에 의한 진단(24-28절)

 

피부를 불에 데었는데 그 덴 곳에 불그스름하고 희거나 순전히 흰 색점이 생기면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색점의 털이 희고 그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면 이는 화상에서 발한 문둥병인즉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진단하였다. 그러나 제사장 보기에 그 색점에 흰 털이 없으며 그 자리가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그는 그를 칠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칠일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만일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그는 그를 부정하다 진단하였다. 만일 색점이 여전하여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단순 화상으로 부은 것이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진단하였다. 화상에 대해서도 뚜렷한 치료법은 제공되지 않았다. 다만 환처가 심하지 않을 경우 칠일 동안 격리하여 증세의 경과를 살펴보도록 하고 있다.

 

 

5. 모발과 수염에 의한 진단(29-37절)

 

남자나 여자의 머리에나 수염에 환처가 있으면 제사장은 진찰하여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고 그 자리에 누르고 가는 털이 있으면 이것은 옴으로 머리에나 수염에 발한 문둥병임이라 칭하였다. 만일 제사장의 보기에 그 옴의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검은 털이 없으면 제사장은 그 옴 환자를 칠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칠일 만에 제사장은 그 환처를 진찰하여 그 옴이 퍼지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누른 털이 없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거든 그는 모발을 밀되 환처는 밀지 말 것이요 제사장은 옴 환자를 또 칠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칠일 만에 제사장은 그 옴을 또 진찰하고 그 옴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면 그는 그를 정하다 진단하였다.

 

치료 및 사후 조치로 옷은 세탁하여 정하게 하고 깨끗한 후에라도 옴이 크게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 과연 옴이 피부에 퍼졌으면 누른 털을 찾을 것 없이 그는 부정하였다. 하지만 제사장이 보기에 옴이 여전하고 그 자리에 검은 털이 났으면 그 옴은 나았고 그 사람은 정하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진단하였다.

 

 

6. 정결한 피부 질환 진단(38-39절)

 

남자나 여자의 피부에 색점(반점) 곧 흰 색점이 있어 그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희끄므레)하면 이는 피부에 발한 어루러기라 제사장은 그가 정하다고 진단하였다. 어루러기(, “보하크”)는 자연 치유가 가능한 가벼운 피부 질환으로 특별한 사후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7. 대머리와 관련한 피부 질환 진단(40-44절)

 

누구든지 머리털이 빠지거나 앞머리가 빠지면 대머리였다. 대머리는 질병이 아니었다. 다만 일반 대머리가 아니라 머리나 이마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피부병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머리는 정하나 머리나 이마에 희고 불그스레한 색점이 있으면 피부병으로 취급하여 부정하게 다루었다. 색점(반점)은 종양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8. 환자 격리법(45-46절)

 

문둥(피부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피부병이 위생상 이유로 인해 공동체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환자를 격리할 것을 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 의복 문제(47-59절)

 

만일 의복에 문둥병 색점이 발하여 털옷에나 베옷에나 베나 털의 날에나 씨에나 혹 가죽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있되 그 의복에나 가죽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병색이 푸르거나 붉으면 이는 문둥병의 색점이라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그 색점을 살피고 그것을 칠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칠일 만에 그 색점을 살펴서 그 색점이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에나 가죽으로 만든 것에 퍼졌으면 이는 악성 문둥병이라 그것이 부정한 악성 문둥병이니 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을 소각해야 했다.

 

그러나 제사장의 보기에 그 색점이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은 명하여 그 색점 있는 것을 빨게 하고 또 칠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그 빤 곳을 다시 살펴 그 색점의 빛이 변치 아니하고 그 색점이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거죽에 있든지 속에 있든지 악성 문둥병이므로 소각해야 했다.

 

사후 조치로 세탁 후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이 엷으면 그 의복에서나 가죽에서나 그 날에서나 씨에서나 그 색점을 찢어 버릴 것이요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복발하는 것이니 그 색점 있는 것을 소각해야 했다. 세탁한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그 색점이 벗어졌으면 그것을 다시 빨아야 정하였고 이는 털옷에나 베옷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발한 문둥병 색점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단정하는 규례였다.

 

 

다.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1. 모든 인간은 비참하다!

 

본문에 보면 모든 질병을 판단하고 진단한 것은 의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제사장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이 주시려는 교훈은 단순한 피부병 진단과 치료가 목적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의 죽음과 아픔과 비참한 질병의 뒤에 가려진 진면목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다. 죄의 결과와 심판의 진면목을 보라! 당연히 문둥병의 근원도 결국 인간의 죄(시 38:3-11; 사 1:6)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2. 사랑은 지극한 관심이다!

 

피부병의 진단과 치료에 담긴 창조주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보이는가? 사랑은 지극한 관심이다! 인간의 죽음과 끝없는 비참함 속에서 하나님의 지극한 십자가 사랑을 보라!

 

 

3. 하나님은 영육을 치유하시길 원하신다!

 

1) 레위기의 피부병과 오늘날의 한센병(문둥병, 나병)은 분명 다르다!

 

헬라어 “레프라”로 번역된 당시 문둥병(“차라아트”)은 오늘날의 나병이 아닌 주로 곰팡이와 관련된 피부병이었다. 히포크라테스도 이 “레프라”를 피부병의 총칭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2-42절 내용은 주로 오늘날의 마른 버짐(psoriasis)이나 기계충(favus), 피부 손상(hulse)과 관련되어 있고 47-59절은 공팡이와 관련된 증상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한센병(문둥병, 나병)은 곰팡이나 일반 균류(菌類)가 아닌 특정 쪽팡이(세균=나병균)가 관련 되어 있는 질병이다.

 

따라서 2006년 개정된 한글 개역개정판이 개역 성경의 문둥병을 나병(癩病)으로 동일하게 번역한 것은 조금 아쉬움이 있다. 나병이든 문둥병이든 레위기 13장의 피부병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긴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는 것이다. 번역책임자들이 신학자들과 의학자들의 조언을 좀 더 참고하여 오랫동안 문둥병으로 잘못 번역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던 이 레위기가 전하는 피부병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독자들에게 전해주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이 문둥병(나병) 구절을 "피부병"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유윤종 교수(평택대 구약학)의 주장이 울림을 준다(아래 참고자료 참조). 

 

2) 곰팡이와 쪽팡이(나병같은 세균)는 치료법이 전혀 다르다!

 

유리하는 광야라는 특수한 환경 요인에서 발생한 당시 각종 피부병(주로 곰팡이 관련 피부병)에 대해 의복을 물로 세척하고 격리(隔離)와 소각(燒却)을 통한 일차적 대처는 아주 탁월한 치유법이었다.

 

 

3) 인류의 진정한 치유는

 

첨단 과학시대를 사는 21세기의 의학적 처방과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레위기는 당시 광야 생활 가운데 만연한 이스라엘 백성의 고질적인 피부병에 대해 세심하면서도 당시 가장 적절한 치료법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단순한 피부병만이 아니라 모든 죄와 질병이 함께 치료 받을 수 있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시면서 많은 문둥병자들을 치유하심으로써 육적 치유뿐 아니라 온전한 영적 치유를 제공하셨다(마 8:2-4; 눅 17: 12-19). 그 탁월하고 세심하고 정교한 영적·육적 법칙을 당신은 믿고 이해하고 있는가?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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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이라는 용어를 알리는데 있어 한국 개신교회의 역할(제공: 평택대 유윤종 박사, 구약학 교수)

 

 

1. 서론

 

한국에서 한센병은 세 가지 용어로 말해져 왔습니다. 첫째는 저주와 치료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문둥병이라는 말입니다. 문둥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사회적, 신체적으로 격리되어 비참한 나요양소에서 살면서 종국에는 고독하게 버림받아 죽어갔습니다. 한센(Hansen)의 발견 이후에, 문둥병은 치유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수 많은 전염병 중에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한센병을 지칭하는 두 번째 용어인 나병은 불치나 저주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 중립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나병 환자는 치료될 수 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부정적인 편견 때문에 자신들이 있었던 사회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야 나환자의 조건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의료적 발전과 더불어 일반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로 나병을 가진 환자는 치료 될 수 있고 어떠한 문제 없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한국에 있는 수 많은 나정착촌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합니다. 한센 환자라는 용어의 광범위한 이용은 이 질병이 많은 다른 질병들처럼 간주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미국 선교단체들의 헌신과 함께 몇몇 한국 교회들은 초기 개신교 교회 때부터 한센병 환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에큐메니컬 기구인 CCK (the Christian Council of Korea)는 교회 영역에서 문둥병과 나병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한센병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CCK의 인권 분과는 한센병은 불결하고 저주받은 질병인 문둥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성서에서 한센병은 성서 시대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치료약이 없었기 때문에 비슷한 용어로 불리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센병은 완벽히 치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목사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문둥병 환자라고 부르며 그들을 불결하고 저주 받은 것처럼 묘사하여 한센병에서 회복된 사람들과 그들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더군다나 CCK의 인권 분과에서는 한국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요구했습니다. 1. 성경의 한센병과 나병이라는 용어를 수정할 것. 2. 한센병에 대해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이 병을 불결하거나 종교적으로 저주받은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3. 세미나의 신학 교과서에 관련된 사항들을 기록할 것. 4. 한센병이 불결하고 저주받은 질병이라고 간주되어 있는 주석과 해석들을 수정할 것. 5. 기독교 신문 등에서 설교자들의 부정적인 용어나 생각들이 설교에 반영되어 있는지 주시할 것.

 

CCK가 한센병이라는 좀더 순화된 용어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한센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은 버려져야 한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개별 목사들과 교회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 활발한 광고들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한센병이라는 용어를 확산시키고 낡은 부정적 이미지들을 제거하는데 전략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새로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편견을 바꾸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성경에 있는 한센병과 관련된 사항을 추적하고 성경에서 한센병이 오늘날의 것과는 다른 것임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병(leprosy)”라는 용어가 한센병 보다는 피부병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또한 은유적이긴 하지만 저는 에이스랜드(Nancy L. Eiesland)장애를 지닌 신 (The Disabled God)” 이라는 책의 예수님, 문둥이라는 부분을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통해 권능의 신이 아닌 십자가에서 팔을 뻗어 우리를 감싸 안으신 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성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요구 받을 것입니다.

 

2. 성서 속의 한센병

 

한센병은 이 용어가 모든 상세한 내용을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서에서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구 한국어 번역서인 성경전서개역’ (1956), ‘공동번역성서’ (1977)는 문둥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개역개정판 성서 (1998)과 새번역성경 (2001)에서는 나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의 최근 영어 버전에는 히브리어인 sara’at이 다양한 질병들을 포함한다는 설명이 담긴 주석과 함께 나병감염또는 나병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한센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서 속의 한센병 주제를 접근해야 할까요?

 

2.1 구약 속의 sara’at

 

구약의 sara’at 라는 용어는 레위기 13-14장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레위기 13장은 사람들의 상태의 진단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14장은 이러한 상태에서 회복된 후 사람들의 정화를 위한 처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여러 곳들, 출애굽기 4:6-7, 민수기 12:10-15, 신명기 24:8, 사무엘 3:29, 열왕기 5:1-27, 7:3-10, 15:5,1 그리고 다니엘 26:16-21에서 이 용어가 발견됩니다.

 

레위기 13장은 한 남자를 종교적으로 불결하게 만드는 피부 상태와 그를 다시 깨끗이 만들기 위하여 필요한 세밀한 관찰에 대해 묘사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의례적 조건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지 신체적 조건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묘사들은 고대 이집트의 군의학 조약에서 발견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묘사들은 가스 괴저와 맥각 중독이라 불리는 상태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둘은 정열해서 싸우는 군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명령한 것처럼 전투중인 군대에게 엄격한 종교적, 도덕적 규율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나와 있는 의류의 sara’at에 대한 묘사는 군대의 노의사가 청결한 속옷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병사들에게 수 차례에 걸쳐 이야기 했던 것을 기억하는 부분입니다.

 

출애굽기 4:6, 민수기 12:10, 신명기 24:8-9, 사무엘 3:29, 다니엘 26:16-21에서 주요한 특징은 누군가의 행동이나 태도가 야훼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또는 그녀는 불결하고 야훼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리고 특별한 외부의 자국이 그 불결함의 선포를 표시합니다. 그러나 이들 문서들에 나타난 묘사는 우리가 한센병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는 들어 맞지 않습니다. 웃시야왕에게 갑자기 한센병이 나타난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한센병이라고 알고 있는 질병과는 맞지 않습니다.

 

열왕기 5:1-27에서 우리는 현대 의사들이 쉽게 판단하도록 만든 묘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감염된 사람의 옷을 입음으로써 전파되는 옴은 매우 일반적인 것입니다. 열왕기 7:3-8에서 우리는 4명의 남자의 상태에 대해 찾아 볼 수 있지만, 그들의 불결한 상태가 유대인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아람 사람들은 인식할 수 없다는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불결함이 종교적 특성에 관한 것이지 의료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sara’at는 한센병의 현대적 관점에서 나병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요? 레위기의 sara’at라는 단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sara’at이 지칭하는 질병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 근거하여 한센병과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1) 한센병의 증상들은 여러 해 동안 천천히 진행됩니다. 격리가 요구되는 sara’at의 발병은 고작 7일로(레위기 13:4, 5, 21, 26, 31, 33), 한센병과는 맞지 않습니다.

2) 한센병은 약 치료가 없이는 치료가 안 되지만, 레위기 13-14장은 sara’at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을 묘사합니다.

3) 한센병은 sara’at 처럼 주로 벗겨 떨어지는 질병이 아닙니다.

4) 흑인들에게 한센병이 피부의 착색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sara’at의 몇몇 종류처럼 머리카락이 하얗거나 노란색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3, 10, 20, 25, 30).

5) 한센병은 종기, 부스럼 화상과 관련이 없습니다 (레위기 13:18-23, 24-28).

6) 발전된 한센병의 한 증상은 신경의 파괴에 의한 감각의 상실입니다. 레위기 13장은 그러한 주요 증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습니다.

7) 레위기 13장은 한센병의 악화에 따른 다리, 손 그리고 얼굴뼈 등의 괴저나 변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2.2 신약에서의 lepra

 

신약에서 우리는 나환자 (leper) 그리고 나병 (leprosy)라고 각각 번역된 lepra lepros 두 단어에 대해 다룹니다.

 

마태복음 8:2-4, 11:5, 마가복음 1:40-44, 누가복음 17:11-19에서 우리는 예수가 나환자를 깨끗이 하거나 치료한 여러 사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어디에서도 이 질병의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나환자들을 치료한 방식과 그들을 성직자들에게 보내어 깨끗해 졌다고 선포하도록 한 방식은 레위기 13장과 14장에 나오는 의식적 정화의 묘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가 sara’at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는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누가복음 427절에서 우리는 나아만과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지나가는 언급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관심을 끌지는 못합니다.

 

마태복음 266절과 마가복음 143절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인 시몬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그의 상태에 대한 아무런 묘사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 사건이 일어 났을 당시 sara’at에 의해 고통 받을 수 없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고 회복된 한 나환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15-17). 그는 예수가 그에게 베푼 것을 상기시키는 자라는 의미의 별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lepra가 구약의 sara’at을 지칭하는 것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병은 lepra라는 용어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한센병의 전파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이 질병이 BC 300여 년경 근동에서 발견되어 두 세기 후에는 이탈리아까지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질병이 예수의 시기 직전에 팔레스타인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몇몇 그리스 작가들 역시 한센병의 초기 단계와 lepra라고 불리우는 다른 피부 질병들과 혼동합니다. 이것은 신약 시기 사람들이 lepra라는 용어에 한센병을 포함시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오시기로 하신 분” (마태복음 11:5)의 전조로써, 세례자 요한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마태복음 11:5, 누가복음 7:22)라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신약에서는 이러한 정화에 대해 설명하는 단지 두 가지의 예만 있습니다. 마가복음 141절부터 42절에서 나환자는 예수에게 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약 당신이 선택되신 분이라면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예수는 그의 손을 펼쳐 그를 만지고 그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선택된 자이다. 깨끗해져라.” 즉시 그 나환자는 치유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히브리어인 sara’at과 동일한 것을 찾을 때 불쾌하고 원치 않는 무엇인가를 뜻하는 모호한 단어인 그리스 어인 lepra를 선택하였다는 설명은 합당합니다.

 

결국 히브리어에서 sara’at이라 이름 붙은 상태와 그리스 어인 lepra는 한센병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릅니다. 성서에서의 한센병이라는 용어는 한센병의 현대적 정의와 맞는 다양한 피부 상태를 포함합니다. 고대에 나병에 걸린다는 의미는 엄중합니다. 불결한 나병환자는 사회의 무결함과 완전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자신의 신체적인 질병과 함께 추방으로 고통받습니다. 미리암과 웃시야에게 한센병이라는 벌을 주는 신과 모든 한센병을 치유해 주는 신은 무결함과 완전성의 신인 것입니다.

 

3. 성경에서의 sara’atlepra의 해석들

 

두 성경 용어들은 한센병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피부병들을 암시합니다. 두 성경 용어들은 다양한 피부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sara’atlepra는 불결하며 격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까요?

 

스킨스니스 (Skinsnes)에 의하면 중국과 인도에서의 피부병에 대한 사회의 반응들은 성경의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공포로 이어지는 피부병에 대한 보편적인 혐오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글라스 (Duglas)는 불결함의 이론 (theory of impurity)으로 이러한 자연적인 공포를 설명합니다. 그녀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불규칙하고 제자리에 놓여져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고 주장합니다. 전체의 규범과 반대되는 피부병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때문에 피해지는 것입니다. 밀그롬(Milgrom)sara’at은 이것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순하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이것의 심리학적인 혐오를 설명합니다. 성서에서 sara’at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민수기 12:12, 욥기 18:13) 이후 유대전통은 이것을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간주합니다.

 

이러한 설명들은 피부병에 대한 혐오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성서의 세계에 침투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특정한 사회나 사회의 일부분이 그들의 시각이 어떻게 또는 왜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사회인류학적 그리고 구조주의적 접근들은 순수함의 역할의 체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더글라스는 몸에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순수함의 역할은 사회적 경계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사회의 관심사를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몸에 대한 규제는 전체 사회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sara’at에 대한 규칙들은 사회적 경계들의 완전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반영합니다. 왜냐하면 sara’at은 몸, 주거지, 그리고 의복의 표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면의 불순함에 대한 통제는 사회의 경계들을 통제하기 위한 사회적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4. 장애를 지닌 하느님과 나환자인 예수

 

성서 시기 근본주의자인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종교적 의식은 그들이 다음의 4개의 범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이방인, 노예, 나환자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들은 하느님 야훼가 이들 4개 범주의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관점에서 사회에 많은 “lepers”가 있다는 것은 비극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장애를 지닌 신이라는 말은 에이스랜드의 책에 나옵니다. 에이스랜드는 단순히 장애의 특징이나 이것이 개인이나 공동체에 주는 영향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인생을 인간적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한 중요한 실천적인 신학적 관점에 대하여 제시했습니다. 이 책은 건설적인 문맥적 신학의 한 움직임입니다. 에이스랜드는 현재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부활하셨음을 선포하는 강력한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킵니다. 그녀는 신체적 무결성을 요구하는 개인적 특성과 규범성의 개념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적 믿음의 중심에는 스스로 장애를 지닌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장애를 지닌 하느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장애를 가진 하느님의 이미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부활한 예수로부터 나옵니다. 그의 손상된 손과 발을 자신의 놀란 친구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부활한 예수는 자신과 신과의 연결성,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대한 장애의 표식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애를 지닌 하느님은 또한 새로운 인간성의 발현자입니다. 장애를 가진 하느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뿐만이 아니라 장애의 경험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의 특성의 현실을 강조하는 진정한 인간성의 현시체입니다.

 

이사야서 53:4에는 고통 받는 종은 하느님께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의 그리스 70인역 번역에 의하면 “leprosum”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lepra”의 그리스식 형용사 형태입니다. 고통 받는 종은 필립보 (사도행전 8:26-40)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나병환자였을까요?

 

임상적으로 예수는 나병환자가 아닙니다만, 만약 우리가 성서에서의 나병을 단순한 질병이상의 것인 어떤 조건이라고 이해한다면, 예수가 나환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진실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나환자는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이었고 무시당하고 치료받지 못한 한센병은 가장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치료시설도 없고 건강 교육도 없는 곳에서 거부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가 나환자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거부할 때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를 나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적 믿음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사람들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34-40).

 

5. 결론

 

BC 3세기경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학자들은 아마도 복음사가들과 같은 사고의 선을 따라갔었을 것입니다. 헬레니즘 시기 교육받은 학자들이 종교적 상태인 sara’at과 매우 잘 묘사되고 있는 질병인 elephantiasis (leprosy 나병)를 혼동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입니다. 그들이 lepra라고 썼을 때 그들 마음 속에 elephantiasis를 떠올렸다는 것 역시 더욱 믿기 힘든 일입니다.

 

아마도 헬레니즘 의학 속의 lepra는 절대 하나의 특정한 피부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습진성 상처나 발진으로 생긴 불쾌한 피부상태 전체를 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왜 몸의 청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헬레니즘의 번역가들이 야훼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과 신체적 불쾌한 것을 관련시켰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sara’atlepra를 오늘날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우리는 피부병을 한센병이라 정의하는 번역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제가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sara’atlepra라는 용어들은 사람들을 성스러움과 맞지 않도록 만드는 특정한 의학적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눈에서 특정한 질병과 죄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결국 한국 개신교 교회의 상황에서 sra’atlepra라는 용어들은 종교적 의미를 갖는 피부병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매우 강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제안한 번역이 한국 성경의 새로운 버전에 반영된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sara’atlepra를 한센병과 관련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한센병이 장애를 지닌 신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장애를 지닌 하느님은 우리자신을 보는 다른 방식을 제공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삶의 평범성 속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도록 합니다. 또한 삶의 어려움과 비참함 속에서도 성스러움을 발견하도록 합니다. 장애를 가진 신은 모든 제한과 속박을 지닌 신체에 존재합니다. 장애를 지닌 하느님을 통하여 우리를 권능으로 감싸는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팔을 뻗어 우리를 감싸 안는 하느님으로 변화합니다. 그리스도적 믿음의 역동성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나환자들이 스티그마를 지닌체 격리되어 있는 장소를 뜻하는 캠프의 바깥 (히브리 13:13)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나가야만 합니다. 예수가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서 고통 받은 것처럼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을 포함하는 장애인이 된 것처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유윤종 교수 (평택대학교 신학과)

자료제공: ()한빛복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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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투데이, “문둥병 아닌 한센병...성경용어 개칭하라,” 108일 기사

 

 

<평택대 신학과 유윤종 교수 2010 세계 한센 포럼 발제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