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논쟁
진화론 논쟁(강의 자료 6, 조덕영 교수)
1. 찰스 다윈과 다윈주의(Darwinism)
1) 다윈과 다윈주의의 등장
(1) 19세기는 현대신학이 등장한 시기요 다윈이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다.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을 통해 현재 지구상의 모든 종류들은 자연 도태의 과정을 거쳐 단순한 생명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체를 만들어왔다고 보았다.
(2)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고 부르는 이 자연도태 과정은 생물 중 어느 종이 조건에 더 잘 적응하는 가에 따라 자연적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내용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다윈의 추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헉슬리(J. Huxley)는 그 대표적인 학자였다. 허버트 스펜서는 ⌜조직 철학⌟(Systematic Philosophy)에서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신앙관은 원시적 신념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진화론 옹호에 앞장선 학자가 되었다.
2) 다윈주의에 담긴 종교적 함의
(1) 다윈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이다.
(2) 그런데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1859년에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썼을 때, 대부분의 서양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살아있는 생물들(특히 인간을)을 설계에 의해서 창조하셨다고 믿는 기독교 유신론자들이었다.
(3) 그러나 다윈에 따르면 살아있는 생물들에서 나타나는 설계된 것과 같은 겉모습은 무작위적인 변위들과 자연선택의 산물과 같은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윈은 모든 종들의 개체들이 작은 변이를 드러낸다는 것에 착안했다. 육종사(育種士)들도 그러한 변이들을 다음의 세대들을 변화시키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들에 주목했다. 또한 다윈은 야생에서의 생물들은 제한된 자원(식량과 같은)을 두고 경쟁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들의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생존해서 자손을 남기기가 더 쉽다는 사실들에 주목했다. 다윈은 육종사가 가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자연선택"도 야생에서의 종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수 백 만년 동안 계속된 "변화를 가진 후손들(descent with modification)"은 하나 또는 소수의 원시 형태에서부터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4) 다윈은 이 과정에서 초자연적인 설계를 위한 어떠한 여지도 보지 못했다. 그의 친구이자 지지자인 아사 그레이(Asa Gray)가 하나님께서 자연선택이 작동하는 변이들을 설계하셨다고 제안했을 때, 다윈은 이 생각을 거부했고, 1868년에 그레이의 입장에 대한 논박을 담은 ⌜육종(育種)에 따른 동물과 식물들의 변이⌟(Variation of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에서 논박을 마무리 지었다.
(5) 다윈에 따르면, 무작위적인 변위와 자연선택의 산물들은 설계된 것으로 고려될 수 없다; 설계되지 않은 일련의 생물 종들의 최신형으로서의 인간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의 다윈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설계에 대한 거부에 동의한다. 1967년에 고생물학자인 조지 게이로드 심슨은 "인간은 인간을 마음에 두지 않는 목적 없고 자연적인 과정의 산물이다."고 썼다. 1970년에 분자 생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자크 모노(Jacques Monod)는 "다윈주의(Darwinism) 메커니즘은 결국 확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 "인간은 단지 우연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6) 다윈의 설계에 대한 거부는 기독인과 다른 유신론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설계되지 않은 목적 없는 과정의 부산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인 교리는 틀린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설계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바로 기독교(그리고 이슬람이나 유대교와 같은 다른 유신론적인 종교)의 중심 교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의 연대기가 기독교와 다윈주의 사이의 충돌의 근원이라는 인상을 받아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적인 연대기는 다윈의 이론에 대한 초창기의 반대에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19세기의 기독인들은 지구의 연대에 대한 지질학적인 증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25년, 미국의 스콥스 재판(Scops Trial)에서도 창조론자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도 오래된 지구 관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연대기는 쟁점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말해서, 기독교와 다윈주의 사이의 기본적인 충돌은 연대기가 아니라 설계이다.
(7) 어떤 유신론자들은 다윈주의자들의 설계에 대한 거부만을 제외하고서 다윈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을 다 수용하는 것으로서 문제를 피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다윈주의는,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자연주의는 객관적인 실재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다윈주의를 받아들이는 유신론자들은 순전하게 종교를 주관적인 입장에서만 갖고 있는 것이 되고, 설계는 우리의 상상이 꾸며낸 것이 된다. 다윈주의적인 진화와 유신론적인 종교를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대립이 둘 사이에 남아있다. 그들 자신들을 다윈주의적인 진화에 적응시키려는 유신론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보호되고(patronized) 사회적으로 처지게 된(marginalized) 것을 발견한다.
2. 다윈은 옳았는가
1) 그렇다면 다윈의 이론은 정말 옳았는가? 우리는 중력이나 지구의 모양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진화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학문적인 기반에서는, 다윈을 대중화시킨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 Dawkins)에 따르면 무식하고, 어리석고, 제정신이 아니고, 사악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다.
2) 미국에서, 진화에 질문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은 종종 1925년의 스콥스 재판의 헐리우드 버젼인 1960년대 영화 “바람의 상속자"(Inherit the Wind)들에 의해서 촉진된 창조론자들의 희화화와 연관되어 진다.
3. 진화가 가진 의미
1) 그러나 "진화"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변한다는 것이다. 즉 진화는 자연적이고 비목적적 모델이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보는 식물과 동물들은 언제나 존재한 것은 아니고, 예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생물들은(공룡과 같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생명체들은 자연적으로 태어나고 멸절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적 변화는 분명히 사실이다(유신론자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주지 않는다).
2) "진화"의 두 번째 의미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하나 또는 소수의 공통 조상(common ancestors)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계승되어진 것이라는 개념이다.
공동 후손(common descent)에 대한 증거는 일반적인 변화에 대한 증거보다는 훨씬 더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생물학자들은 종종 특정한 식물과 동물군들이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서 논쟁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동 후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유신론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다윈의 이론을 거부하는 90%의 미국인들 중에서 대략 절반 정도는 이러한 진화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3) "진화"의 세 번째 의미는 군집(populations)이 무작위적인 변위와 자연선택을 통해서 진화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데에, 다윈은 가정의 육종을 언급했다. 가정의 농작물 또는 가축들에서의 극적인 변화들은 작은 변이들의 적절한 선택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 1859년 이래로 유사한 과정들이 야생에서 관찰되어 왔다. 모기들이 살충제에 노출되었을 때, 다음 세대들은 보다 영향 받기 쉬운 개체들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살충제에 더 저항력이 생기게 되었다. 나방들이 포식 새들에게 노출되었을 때, 다음 세대들은 보다 잘 보이는 개체들이 먹혀버렸기 때문에 보다 잘 위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무작위적인 변이들의 자연선택을 통해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에 대한 주목할만한 증거가 있다.
4) 그러나 얼마나 변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보기들에서는 새로운 종은 나타나지 않았고 새로운 특징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정의 육종은 양을 염소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고, 새나 고래로는 더욱 바꾸지 않을 것이다. 새의 포식은 나방을 나비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개미나 딱정벌레로는 더욱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그들이 "소진화(micro-evolution)"라고 부르는 종들 내에서의 상대적으로 작은 변화들과,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이 필요로 하는 그들이 "대진화 (macro-evolution)"라고 부르는 훨씬 더 큰 변화들 사이의 차이를 오랫동안 인지하고 있었다. 다윈의 대진화에 대한 소진화의 외삽(外揷, extrapolation)은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5) 복음주의는 종 내의 변이를 말하는 소진화는 적극 인정한다. 그것은 세상을 다채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진화의 결정적 증거가 없으며 성경적으로도 종류대로의 창조가 강조된 것으로 보아 다윈이 말한 종(種) 간(間)의 변이는 복음주의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다. 우연이 거듭된다고 스마트폰 하치장에 바람과 태풍과 홍수와 소각을 한다고 조금이라도 진전된 스마트폰 부속이라도 한개 나오던가? 불가능하다! 엔트로피 법칙을 차치하더라도 그것은 보통사람들도 믿지 않는 주장이루 뿐이다. 그렇다면 분명 종간 변이 문제는 우연을 거듭하는 오랜 연대를 가정하더라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3. 복음주의와 진화론
1) 복음주의와 다윈의 진화론 사이의 문제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자와 적절히 훈련받은 평신도는 가장 중요한 현대 과학의 결과를 성경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조화시켜야 한다고 여겨왔다. 또한 복음주의 지도자들 일부는 과학적 결론을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변증이 될 수 있는지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복음주의자들은 보통 과학이란 “베이컨주의” 혹은 입증된 개별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좀더 보편적인 법칙을 엄밀하게 추론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모든 학문 분야의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제공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2) 과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의 출판에 대한 복음주의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진화에 대한 현대 논쟁과 비교해 볼 때,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의 초기 반응은 오늘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복음주의적 결론과 비교적 차분한 논쟁 분위기를 유지하였다. 미국의 과학 공동체가 유기체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신학적 교리 면에서 매우 다양했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다윈의 변이 가설을 단순히 해로운 과학쯤으로 생각하여 한마음으로 거부할 수 있었다. 1860년대 까지만 해도 다윈주의와 합리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화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3) 그러나 매우 흥미롭게도, 상당히 보수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조합 교회의 아사 그레이(Asa Gray)는 북아메리카의 지도적 다윈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다윈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과학자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버드 대학 시절, 그레이는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던 자연주의자였다.
4) 1880년에 그는 자신을 가리켜 “과학적인 면과 자신의 스타일에 있어서는 다윈주의자이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확고한 이신론자이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보통 니케아 신경이라고 불리는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기독교 신앙의 지지자” 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그레이는 자연 도태 이론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보존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윈과 논쟁하였다. 다윈은 그 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 결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5) 그러나 1870년대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유기체 진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수용하자 상황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실천을 따를 것인지-이전에 지구의 연대와 성운 가설에 대해 반응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결론을 진화론에 맞추어 조정함으로써-아니면 이 새로운 도전에 대항하여 선을 그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6) 지난 25년 동안 세 가지 입장이 대두되었다. 보수적인 반대자들은 일차적으로 진화론이 성경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관할권 밖으로 내몰았다. 장로교회의 존 더필드의 말에 의하면 다윈이 설명한 진화론은 “인간의 기원과 현재의 영적 상태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7) 그리고 진화론이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을 저버린 것은 그 이론이 “성경의 중심적인 종교 사상”을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또한 이전에 미국인들이 베이컨적인 과학에 보였던 헌신과 하나님의 설계에서 출발하는 18세기의 논증 공식의 각 특성들이 어떻게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의해 형성되었다.
8) 개신교 신앙과 진화론을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두 개의 또 다른 집단으로 나뉜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진화론자들과 오버린 대학의 조지 라이트(George Frederick Wright, 1838-1921)와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B. B. Warfield)는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의 범주 안에서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회중교회 목사이자 국제적 명성을 얻은 아마추어 지질학자였던 조지 라이트는 「진화론의 소멸」이라는 책에서 유신론적 진화론과 특별 창조론자들의 전통적인 견해 사이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려는 시도를 한 사람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는 근본주의의 좌익을 택하였다. 1930년대까지 근본주의자들은 맥코쉬(James McCosh)나 라이트(George Frederick Wright) 그리고 워필드(B. B. Warfield)가 제시한 대안을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학에 적응하기 위한 일부로서 진화론을 수용했다. 진화론에 대한 그들의 재해석은 성경의 고등 비평과 종교 의식에 대한 새로운 신뢰, 그리고 인류의 점진적 발전에 대해 점점 더 확신하는 그런 견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여 현대주의적인 개신교 진화론자들은 내재적인 하나님의 관념을 옹호하였고, 성경을 발전하는 종교 의식의 표현이라고 재정의 하였으며,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유기체 진화론에서 빌려 온 표현으로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9)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이어졌던 진화론 논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후기 개혁주의적, 민주주의적인 미국 사회의 복음주의자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진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은 유럽의 복음주의자들보다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권위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계속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10) 따라서 영국과 유럽의 보수적인 개신교는 미국인들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진화론 때문에 나뉘어 지지는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화론에 관한 지성적 논쟁은 또한 전통을 벗어던진 문화 속에서 개신교가 해야 할 역할에 관한 논쟁이기도 했다. 지지자들이나 반대자들은 모두 다 계몽주의 과학 사상과 전통적인 기독교사상 사이의 유대 관계에 역사적으로 개신교가 얽매어 있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사적으로 과학적 체계에 깊이 얽매어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베이컨적인 과학의 가정에 얽매어 있었음을 드러낸다.
11)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과학과 신학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상당히 세련된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복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성경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틀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의견까지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남북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869년 12월 17일 뉴욕의 쿠퍼 유니온 대학에서 당시 코넬 대학의 총장이 된 37살의 화이트헤드(A. D. Whitehead)는 신앙과 과학에 대한 폭탄을 하나 던진다. 당시까지 학생과 교직원의 선발과정에서 부여되었던 신앙적 검증 절차를 파기하고 코넬 대학을 과학을 위한 도피처(asylum)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화이트헤드는 앞으로의 역사는 현세대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종교와 과학 간의 적대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이며 기독교는 과학의 발달을 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겼다고 본다. 화이트헤드의 눈으로 보면 창조와 진화 논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과학은 논쟁과 관계없이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적 이슈에 대해 복음주의의 혼란이 예견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12) 이것은 곧 프린스턴 신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19세기 전체를 거쳐서 주도적 신학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과학과 신앙의 대면에도 활발히 관여한다. 왜냐하면 프린스턴에 있던 지리학, 지질학, 생물학 등등의 대변자들이 그들의 동료 신학자들과 같은 종교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2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제 1 교수 취임 연설에서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는 과학적 결론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연의 역사와 화학, 그리고 지질학은 성경 안에 있는 난제들을 해결하도록 성경 연구자들을 돕는 면에서, 혹은 이러한 과학의 비호 아래 만들어진 적대자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13) 알렉산더의 후임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한걸음 더 나아가, 거룩한 창조의 기본 틀 안에서의 과학의 제한적인 자율성을 지지한다. 성경의 완전한 신뢰성을 바탕으로 성경에서 발견될 것으로 생각되는 결론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적절한 귀납적 연구를 추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의 연역적 결론이 과학과 갈등을 일으킬 때는 어찌할 것인가? 과학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계시를 제쳐둘 경우 위험천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있는가? 핫지는 성경에서 파악된 것이든 자연에서 파악된 것이든 사실은 자명하다고 믿는 지나치게 단순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핫지에게 있어 자연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된 계시였다. 그러므로 핫지가 볼 때 우리가 성경을 과학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다.
14) 찰스 핫지는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출판된 이후 진화론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핫지는 1874년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를 통해 진화론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핫지는 진화론의 특징으로 진화 또는 모든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가 하나 또는 아주 적은 수의 원시 균류(primordial living germs)로부터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가정과, 이 진화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에 의해 일어났으며 결국 다윈의 이론은 자연선택이 초자연적 지성의 설계(design)없이 비지성적인 물리적 원인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았다. 핫지는 우주의 창조와 섭리 과정에서 지성적 설계를 배제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른 창조의 가능성을 부정하므로 목적론적 설명이 배제된 다윈의 진화론은 수용할 수 없었다. 진화론의 자연선택 개념이 초자연적 설계나 목적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배제하게 되면 결국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학과 결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핫지가 볼 때 다윈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주장한 적은 없으나 다윈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었다. 핫지는 성경과 과학이 원칙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핫지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를 무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이론의 방법으로 삼는 과학의 이론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15) 하지만 반대로 진화론을 인정하는 신학자들도 나타났다. 앞에서 서술한대로 핫지의 뒤를 이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B. B. Warfield)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워필드는 진화론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워필드는 칼빈도 자신처럼 진화론자로 보았다. 마크 놀(M. A. Noll)이 칼빈을 진화론자라고 주장한 것도 결국 워필드의 견해로부터 기인한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앞질러 간 것으로 여겨진다. 칼빈의 시대는 진화의 시대도 아니었고 칼빈의 어떤 주석에도 진화론은 등장하지 않으며 칼빈은 두드러진 과학의 이론도 아니었던 진화론에 적응할 리가 결코 없었다. 워필드는 다윈이 기독교를 거부한 이유는 사변과 가설에 너무 편견이 동원되어 생각의 위축을 가져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진화론은 맞되 다윈이 세련되게 그 이론을 정리하여 기독교와 충돌하지 않도록 내놓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들이 복음주의 진영 안의 일치 되지 않는 논란을 가져왔다. 진화론과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서로 일치 되지 않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16) 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당시 대중적이었던 과학의 내용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수용은 지성적인 이유보다는 공리적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지만, 복음주의를 과학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사실이다.
17) 그러나 그 후 과학에 대한 근본주의의 대안은 세속주의를 완전히 거부하려 했던 근본주의적 성향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었고 매우 전투적이었다. 근본주의 입장에서 진화론은 과학적 자연주의를 토대로 한 이론으로 보였고 당연히 근본주의의 공격 대상이 된다. 과학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 견해를 반대하는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은 문제를 보는 방식에 있어서 복음주의 대중을 성공적으로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이 계속해서 과학자들을 훈련시켜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저마다의 과학 분야에서 비교적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18) 그러나 대학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복음주의자, 산업체나 정부를 위해 일하는 과학 전문가로 고용된 복음주의자, 혹은 기독교 대학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복음주의자들은 보통 과학적 주제를 신학이나 다른 사상 영역과 연관지어 연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학과목에 접근했다기보다는 서로 분리된 지식의 분야로써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복음주의적인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지성적인 지위보다는 직업적인 지위를 갖는 것을 의미했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과학자들은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과학적 논쟁을 지배했던 경쟁적이고도 고도의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복음주의자들의 과학적 사고는 파국을 맞았다. 이러한 20세기의 대격변에 의해 초래된 재난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적인 지성적 급소에 영향을 주었다. 즉 세상에 대한 지식과의 관련 속에서 성경의 지혜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려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복음주의 안에 완전한 일치를 찾지 못하였음에도 복음주의가 우연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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