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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초대 주요 교부(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들의 교회론(교회론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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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부(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들의 교회론

 

Ⅰ. 터툴리안(주후 150 or 160년경-215?220?, 라틴 신학의 아버지)

1. 생애

 

1) 2세기 중엽 카르타고에서 로마군의 이교도 백부장 아들로 태어남

2) 기독교를 접한 시기:

정확치 않음. 193년, 법학을 배우고 변호인으로 활약. 신앙으로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접하다. 아마 이 시기 신앙인이 되었을 가능성.

3) 라틴 신학(북아프리카학파)의 아버지로 불림:

터툴리안은 철학에 비판적인 대단히 신앙적으로 열정적 사람이었음.

4) “예루살렘(헤브라이즘)과 아테네(헬레니즘)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Quid Athenae Hierosolymis?, 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라는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헬라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철학에 대항하여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다.

5) 203년 경(213?) 교회를 떠나 몬타누스파에 가입

6) 터툴리안의 저서들은 둘로 나뉘어짐. 즉 초기의 정통 서술과 후기 몬타니즘적 경향의 저술들이다.

7) 따라서 터툴리안의 교회론도 몬타누스주의자가 되기 전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임.

 

철학자 플라톤(그리스 국립고고학 박물관), 터툴리안은 철학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2. 몬타니즘과 터툴리안

 

​1) 몬타니즘은 2세기 후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프리기아(Phrygia)에서 열광주의와 계시문학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밀교 사제 출신의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3세기 초 터툴리안이 사는 북아프리카에도 상륙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 운동에 즉시 가담하였다.

2) 터툴리안은 왜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였을까?

 

​(1) 내재(內在)의 철학에 반감을 가진 터툴리안의 열정적 초월 신앙은 그가 황홀경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로 이적과 예언 은사를 강조하고 오늘날의 오순절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은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2) ​그리고 같은 아프리카로 알렉산드리아의 헬라파 신학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접근한 반면, 라틴파 터툴리안은 법률이나 정치 등의 실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실천적으로 접근했다.

 

(3) ​이런 성품이 잘못 발휘되면 도덕률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양극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점에 수렴되기도 한다. 즉 율법주의가 초월주의자들과 만나면 극단은 서로 통하기도 함(ft. wcc와 오순절교단의 만남).

 

(4) 따라서 당시 몬타니즘주의자들의 금욕주의(결혼 포기, 재혼 금지, 동정성 강조 등)와 금식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 깊은 참회 등의 엄격함에 매력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입니다.

 

3. 열광적 근본주의자 터툴리안

 

​(1) 독신 생활을 찬양한 몬타니즘의 경향을 따라 터툴리안도 독신을 지킨다. 터툴리안은 일종의 열광적 근본주의자였던 셈이다. 이렇게 근본주의자들이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초월주의자들과 통하는 면도 있다.

 

 

(2) 엄격함에 매력을 느끼는 근본주의자였기에 터툴리안에게 있어 처벌은 용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4. 터툴리안의 교회관

 

1) 초창기 터툴리안은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레네우스의 교회론 계승

​2) 즉 성경적 교회의 일치성, 신앙의 기준으로서의 교회의 교리들의 공적 권위, 사도들로부터 계승된 감독의 권위 인정.

 

3) 몬타누스주의자가 된 이후

(1)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에 호감을 느낀 한 가지 실마리(?):

터툴리안은 도덕적 강경론자, 엄격주의자, 도덕적 근본주의자로서 정통 교회의 처신에 분노하여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몬타니즘으로 돌아섰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터툴리안에 대해 그는 신학적으로 거의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다. 혹시 이것이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의 매력에 빠진 한 가지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까?

(2) 엄격주의 속 몬타누스파 교회는 세례 이후 지은 죄에 대해 용서 불가 고수

(3) 시한부 종말론(Pepuza 근처에 예루살렘 하강 예언, 오순절 교단들은 요즘도 전천년적 세대주의 경향이 강함)

(4) 소아시아 교회들이 몬타누스로 인해 교회들이 텅텅 비어간다고 불평(감독들의 불평, 과거 신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간 순복음 교회와 오산리 기도원-서민적 신비주의,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고 있다던 온누리 교회-귀족적 신비주의)

(5) 황홀경의 방언과 예언 현상

(6) "진정한 교회는 성령 그 자체다".

(7) 하지만 교회 사역의 임명 받은 직무와 질서를 부정하지는 않음.

(8) 터툴리안은 "간음과 우상숭배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를 수용하고 사면령"을 내린 카르타고 교회 감독의 결정에 대단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터툴리안이 어떤 성품과 교회관의 소유자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교회와 신학에 대한 터툴리안의 공헌

 

1)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김석환 교수>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그가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였다(“Hand me the master!”, 키프리안).

 

2) 성경 라틴어 역본 사용

 

3) 교회의 사도적 전승 사상

 

4) 교회의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공헌

 

5) 터툴리안의 구원론은 키프리안을 통해 서방 교회 규범이 됨(Seeberg)

 

6)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관점(철학 영향)에서 본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적으로 봄(법률가 출신).

 

7) 회개는 참회로 말미암아 만족이 이루어진다(중세교회 고해제도의 4부분= 통회, 고백, 만족, 사죄).

 

8) 서방 교회 신앙의 신학적 기초(사도 바울의 속죄의 교리가 터툴리안을 거쳐 안셀름의 속죄론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만족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음)

 

9) 서방 교회(즉 가톨릭주의교회) 발전에 기여(고대 및 중세 교회의 구속적 금욕주의):

즉 이레네우스로부터 시작된 라틴 특유의 파라도시스(전승) 사상은 아프리카 교회 감독이었던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 등을 통해 "가톨릭의 교권주의"로 귀결됨(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매개를 두지 않는 개신교 복음주의와 대립되는 개념).

 

10) ​터툴리안이 지속적 바른 신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음.

터툴리안은 <로고스>(말씀)이 본래 하나님의 비인격적인 이성이었으나 창조 시에 인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종속적 견해이며 반 철학자 터툴리안이 철학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보기이다.

 

11)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도 터툴리안은 "혼합이 아니라 결합(conjunction)"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다. 정통신학은 "혼합", "결합"이라는 두 용어를 경계한다.

 

12) 기독론

(1) 삼위일체론만큼 기독론도 어려운 부분. 인간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니니 인간이 이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후 키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기독론 논쟁은 레오 황제의 주선으로 칼케돈 신조의 골자를 이루는 <통합신조>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양성은 연합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를 고백한다(생략)”가 되었다.

(2) ​이것이 칼케돈 신조에서 “혼합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닌 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두 본성의 구분은 결합의 이유로 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고,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존재 안으로 동시에 발휘된다”로 정리됨.

(3) ​이것이 유티케스 정죄와 훗날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성례론 논쟁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닌 우리 인간이 부족한 바벨탑 이후의 분열된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음.

(4) ​아무튼 터툴리안 같은 초대 기독 신학자가 몬타니즘으로 돌아선 것은 신학 정립의 여명기에 발생한 인류가 가진 안타까운 한계였음.

 

 

​6. 바른 신앙과 신학의 중요성

 

​1) 오늘날도 여전히 바른 신학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터툴리안의 경우는 초대 교회(교부시대)에 당연히 일어난 아쉬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2) ​그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왜 완벽한 교리를 성경에 직설적으로 기록하거나 초대교회 완벽한 인물을 보내 일치 교리를 만들게 하지 않아 미로 찾듯 난제를 풀어가야 하게 된 것인지 인류는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겠지만.

 

 

 

Ⅱ. 초대교회, 오리겐(185-255)의 교회관

 

 

"오리겐"의 저서

 

<제 1원리>(원리에 관하여, De Principiis)

 

-체계화된 최초의 헬라어 조직신학자!(라틴역으로 보존)-

 

"6천권의 책을 저술한 신학자 오리겐"(에피파니우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정통 신학에서 이탈 했을까?

 

1.. 초대교회, 오리겐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1) 오리겐(본명 Origenes Admantius, 185년 경-254년 경)은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2) 어린 시절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보편적 기독교 지식인 가정의 경우처럼 아버지에게서 헬레니즘 교육과 성경을 배움.

3) 당시 헬레니즘 교육은 오늘날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철학 공부의 준비 단계로 백과사전식으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하여 배우는 전반적인 교육 과정이었음. 알렉산드리아는 분명 철학의 도시였고 훗날 오리겐은 그 영향을 받은 신학자가 되었다.

 

4)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5경-339경)에 의하면 이오니아(Ionia)어로 레오니데스(Leonides)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는 세베루스의 치하 박해(Severan Persecution, 202년)시 순교.

5) 17세의 젊은 나이에 오리겐이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에서 신도들을 가르치는 교리문답학교(catechitical school)의 교장이 된 것은 이 같은 아버지의 조기 교육과 더불어 가족의 생계 부양을 위한 이유도 있음.

6) 오리겐의 어머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녀는 맏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려고 결심하자 놀란 나머지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오리겐의 옷을 숨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소년 시절 오리겐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순교에의 권면』(Exhortation to Martyrdom)에서 오리겐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하나님 우편(히 12:2; 8:1)에 앉으셨음을 강조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거나 그와 그의 종들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며 신앙의 지조를 강조하고 있다.

 

​7) 오리겐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서관이 있었고 학문의 자유를 바탕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동한 신플라톤학파뿐 아니라 철학의 거의 모든 학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오리겐이 기독교 신학의 여명기에 기독교와 헬라 철학을 종합한 인물이 된 것은 이와 같은 환경적 배경이 있었다. 그는 다작의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텍스트, 주석, 설교, 경건생활, 변증에 관한 다양한 책을 썼다.

8) 이 가운데 중요한 저작은 교의적 주제를 주로 다룬 『원리론』(De Principiis, 원리에 관하여)과 철학자 켈수스의 『The true doctrine』을 반박한 변증서인 『켈수스 반박』(Contra Celsum), 성경 해석의 근간을 제공한 『6개 국어 대역 성경』(Hexapla) 이 있고 강해서는 279편이 남아있다.

9) 오리겐이 방대한 저서들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유한 그의 제자 암브로시우스의 개종과 관련이 있다. 영지주의 발렌티누스파 이단을 추종하던 암브로시우스는 오리겐의 제자가 되면서 정통 신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오리겐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215년에서 220년 사이 오리겐은 방대한 저서들을 쓰기 시작했다.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많은 저술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가 사후 300년이 지난 후 교회회의에서 정죄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저서를 몰수하고 발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주후 543년). 이후 우리는 유세비우스의 책을 통해 그가 방대한 저작물의 저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저작은 헬라어 원본이 아니라 대부분 라틴어 역본으로 남아있다.

 

​11) 그가 당대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대체로 팔레스틴에 선교 여행(215년경)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오리겐은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주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주교는 이에 대해 강한 시기심을 가지게 된다. 표면적 이유는 어린 시절 오리겐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마 19:12)를 위해 자신을 거세한 결과, 사제로 정식 위임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2) 230년 경 팔레스틴 방문 시에 오리겐은 드디어 장로가 되어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데메트리우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데키우스의 박해 동안 많은 박해에 시달리던 오리겐은 황제가 죽으면서 석방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가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고 견디었다고 전하며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69세 때 두로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13) 사실 오리겐 이전 본격적인 기독신학자는 없었다. 변증가요 순교자였던 저스틴 마터나 논쟁적인 이레네우스가 있었고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이레네우스의 제자였던 로마의 히폴투스(Hippolitos)가 있을 뿐이다.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적으로 양육 받은 최초의 문필가였다.

14) 그러기 때문에 오리겐이 어떻게 신학을 전개하였는가는 기독교가 초대 교회 당시 어떻게 신학을 형성해 갔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오리겐은 고대 교회 최초로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포괄적이며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초기 신학형성기에 나타난 오리겐의 교의학적 시도는 많은 공과(功過)를 남기고 있다.

 

​15) 오리겐은 본문 주해와 주석을 쓴 최초 기독교 성경학자요 교의학의 최초 작품을 쓴 학자요 『켈수스 반박』을 통해 초기 기독교 변증을 이끌었고 창조 신앙에 있어서도 성경적 교리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학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54년 경 순교한 이후 약 300년 후인 제 5차 종교회의(553)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몰수되어 버렸다. 이 때 오리겐의 모든 저작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6)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의 작품들이 몰수되었기에 오늘날 그가 썼다고 알려진 책들이 정말 그가 쓴 원본과 다름이 없는 지도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오리겐의 작품이 분명한지 아니면 후세 인물들이 얼마나 가감했는지 검증 없이 그를 정죄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다루고 있다.

17) 그가 만일 순교 당하지 않고 신학적 연구에 매진하였다면 어떤 학문적 발전과 수정을 이루었을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아쉽다.

18) 하지만 그가 초기 기독교 학자로서 기독교를 강력히 위협하던 영지주의 사상을 부인하는데 앞장서고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stripassianism), 양태론(樣態論),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적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신학적 통로를 제공한 것은 분명한 공헌이었다.

 

 

2. 오리겐의 교회론

1) 진정한 교회와 역사적 기구로서의 교회 구분

2)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와 그 가르침은 보존되어야 한다(De Principiis 서문)

3) 조직 공동체로서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 사역 강조

4) 그러나 교회의 각 구성원들은 (찬양, 기도, 경건, 순결, 의와 거룩함의 예배 속) 하나의 성직을 가지고 있다.​

5) 교회 안에도 그물 속 고기들처럼 좋은 고기가 있고 쓸모없는 고기가 있듯(낟알이 왕겨에 싸여 있듯) 주의 보물인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자들이 섞여 있다(가라지와 밀의 비유).

6) 진정한 교회는 영적 교회요 천상 교회이며 경험적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다(성도와 신자 구분-조두만 목사).

7) 천지창조 이전 교회 존재(엡 1:4 주석, 교회선재론) 주장: 헤르마스, 클레멘트 2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계승(플라톤의 이데아 론)

​8) 교회는 사도들 뿐 아니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짐(엡 3:20).

 

​​

3.. 초대교회는 영지주의를 어떻게 보았는가(오리겐이 본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토양 알렉산드리아

 

 

(1)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이후 교회를 위협해온 이단적 신학이다. 비록 성경에 노골적인 영지주의나 영지주의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으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바울은 영지주의를 분명 잘 알고 있었다.

(2) 하지만 한동안 영지주의의 주장에 대한 초대교회의 원사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교회가 원 자료 없이 이레니우스(약 125-약 202), 터툴리안 등이 비판한 영지주의에 대한 내용을 주로 참고해 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3)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알려지고 있는 이레니우스가 약 180-189년 사이에 썼다고 알려져 있는 <이단 논박>의 본래 이름도 <거짓 영지주의에 대한 폭로와 논박>이었다.

 

(4) 영지주의 문서 나그 함마디를 통해 초대교회의 중심도시들(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가운데 알렉산드리아가 영지주의의 핵심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의 고향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저명한 영지주의 이단자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고향이기도 했다.

 

2) 영지주의에 대한 오리겐의 비판

 

(1) 성경에 대해 필로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택한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여러 분파를 만들어내면서 기독교에 다양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지성적 위협을 가하던 시기에 오리겐은 영지주의에 대해 철저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 당시 필로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에 우호적이었던 오리겐이 같은 우화적 해석을 택한 영지주의를 배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영지주의와 성경적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신학적 충돌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창조론, 교회론, 기독론, 구원론이었다. 먼저 영지주의는 성경적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오리겐은 이단자들(영지주의자들을 말함)이 믿는 창조주 데미우르게(demiurge, 조물주)는 불완전하고 선한 존재가 아니라 말한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더 완전한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했다. 발렌티누스에 의하면 다양한 조물주가 있다. 플레로마(Pleroma)의 세계에는 30개의 아이온(aeon)이 있으며 소피아는 가장 낮은 아이온이다. 그렇다면 악이 만연하는 세상은 수준 낮은 아이온이 만든 세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세상을 만든 조물주가 바로 데미우르게인 것이다. 유대교 카발라에서 말하는 아인 호프는 아마 최고 수준의 창조주가 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단숨에 악의 문제를 극복한다. 즉 이 같은 신비로운 지식을 바로 아는 것이 곧 영지요 구원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의 “칭의론”과 전혀 다른 영지주의의 구원론을 볼 수 있다.

 

(3) 영지주의는 성경적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거부하는 반면 그리스도는 표면적 수용. 하지만 창조와 악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한다. 신령한 지식으로 구원 받는 영지주의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교리가 바로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회의 머리리신 그리스도는 영지주의에서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교리다.

 

3) 초대 교회 천사 창조론

 

(1) 21세기 기독교 신학에서 방치내지 간과되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천사론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먼저 현실적 요인으로는 신학이 다원주의 시대에 다양하고 풍성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조직신학의 관심 영역이 분산되면서 정해진 강의 범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천사론의 순위가 뒤로 밀려난 감이 있다. 즉 솔직하게 말하면 제한된 시간에 천사론을 강의할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신학도들도 천사론을 접할 기회가 멀어지고 관심을 접는 경우가 생겼다고 본다.

(2) 하지만 교부 시대는 달랐다. 교회와 기독교 신학에서 천사의 문제는 중요한 주제였다. 오늘날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의 이콘에서 천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천사가 교회 안에 깊숙하고 친숙한 존재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3) 문제는 성경뿐 아니라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속에 자주 등장하는 천사에 관한 서술을 어떻게 정리해야 되는 가하는 문제가 함께 상존하였다. 이 같은 딜레마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까지 세계 교회는 아직 한 번도 공교회의 총회를 연 적이 없었다. 최초의 공의회(니케아)는 주후 325년에 있었다. 성경 범위에 대해 아직 초대교회가 명확한 토대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공의회 이전 신학자들이 지닌 태생적 한계가 여기에 있다.

 

(4) 오리겐의 시대적 한계:

오리겐에게서도 그런 과도기적 시대의 천사론을 볼 수 있다. 오리겐이 “각각의 천사들은 교회 안에서 아주 낮은 신분의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권능에 따라 자신의 기도를 우리 기도와 합치시키며 우리가 청하는 것을 위해 협력한다”(De Oratione Ⅺ, 1-5)고 기술한 내용은 수호천사에 대한 진술이다. 수호천사에 대한 이런 진술이 개신교에서 낯선 이유는 이들 내용이 주로 정경 66권밖 위경이나 외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5) 영지주의자들과 유사한 듯 다른 오리겐의 천사창조론:

그러면서도 오리겐은 본래 육체는 선한 것(창 1:10, 12, 18, 21, 25, 31)이라 말한다. 오리겐이 영지주의를 반대한 학자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즉 모든 영적 실재들은 자유로운 행동자로서 창조되었는데 그 자유의 결과로 죄를 짓게 되었다. 이후 모든 영적 실재는 그들의 타락 정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었고, 그들이 거할 곳도 정해 졌다. 이때 높은 영성에 도달한 존재들은 신적 존재, 천사, 인격화된 성신 등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천국을 만들었다. 가장 타락한 사탄과 악마들은 어둡고 저급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두 계급 중간에 육체를 입고 나타난 존재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들을 훈련시키신다. 인간의 영 혹은 영혼은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정화되어 천사의 위치까지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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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선재한 영혼(anima)들의 타락을 설명하기 위해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생각을 빌려온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렇게 창조된 영들이 신적인 것에 관한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관상을 게을리 하여 타락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둘째 창조 사역에 임하셨다. 둘째 창조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타락한 영들을 위한 임시 처소를 마련키 위한 것이다. 가장 바닥에 떨어진 영들은 악마들(demon)이 되었고 나머지는 인간 영들이 되었다. 이 타락한 인간 영들(선재하던 영들)을 위해 하나님은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몸들을 만들었다. 즉 흙으로 일부는 남자로, 일부는 여자였다. 이 같은 주장은 성경적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낯설다. 정경이 확정되지 않고 플라톤 철학에 익숙한 오리겐이 범할 수 있는 초기 신학 형성기에 발생할 수 있는 오류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이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 여겼던 것은 그의 신학이 성경 밖으로 나가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교회 전승 속에서 로마 카톨릭은 수호천사 교리를 가지게 되는 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리겐이 교회 안에 아주 신분이 낮은 천사라 할지라도 각자의 권능에 따라 자신의 기도를 우리와 합치시키며 우리가 청하는 것을 위해 협력한다고 전한다고 전한 것은 그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6) 천사는 경배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초대교회와 교부들은 천사 경배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체로 유보적이었다. 교부들은 천사 경배나 천사 경시에 대해 모두 잘못된 견해로 보았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와 경배가 합당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천사들이 존경과 사랑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합당한 영예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제2차 니케아공의회(개신교는 이 공의회를 공교회의 총회로 인정하지 않음, 787)는 천사들을 성화(聖畵)로 재현하는 것과 성화를 합당하게 경배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이렇게 우리가 부모와 노인, 통치자들을 공경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특사인 천사들도 그런 관점에서 공경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이 되었다. 이것은 개신교의 천사론과는 분명 다른 견해이다.

 

 

오리겐은 『창세기 강해』(8.8)에서 아브라함 앞에 천사의 형상으로 나타난 이는 천사가 아니라 말씀(Logos)이라고 설명한다. 천사 모두가 경배 받을 존재는 아니나 천사 해석에 있어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통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천사 해석의 풍성함의 길을 열어놓은 것은 분명 오리겐의 공헌이었다 할 수 있겠다.

 

 

 

Ⅲ. 라틴교부 키프리안Cyprian(248-258, Carthage 감독)의 교회론

 

1) 감독 교회 교리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On the Unity of the Church』).

(1) 교회는 외적 조직을 가진 단일체이다. 즉 교회는 감독위에 세워진 것(마 16:18).

(2) 이 가견적 교회는 하나의 기원으로 시작되므로 특별한 일체성을 가진다.

(3) 이 일체성은 특히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4) 연장자인 오리겐의 교회론보다 서구 신학 교회론의 성격 규정한 인물

(5) 카프리안 교회론은 실천적이고 규범적이고 논리적이다.

(6) 교회는 하나이므로, 분파적 노바티안파(로마 교회의 장로 노바티안과 카르타고 교회의 장로 노바투스를 따르던 엄격한 분파)와 도나투스(북아프리카 감독을 따르던 엄격 개혁파)파 배척!

(7) 감독 없이 교회 없고 교회 없이 구원 없다!

(8) 터툴리안을 향한 존경(Hand me the master!)

 

2) 교회가 하나이니 세례도 하나다

(1) 가톨릭 밖 교회의 세례 무효 주장(카르타고 공의회, 256년, 교마 교회에 의해 배척)

(2) 유아세례 필요성을 원죄와 결부(당시 교회에 유아 세례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줌)

 

3) 감독은 교회원을 박탈, 회복시키는 권세가 있다.

 

4) 감독의 실제적 제사직과 제사 행위를 결부

 

5)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를 감독의 통일성에 둠.

 

6) 정당한 감독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구원 얻지 못한다.

 

7) Extra ecclesiam nulla salus(교회를 떠나서는 구원 받을 수 없다).

 

8) 유형적, 외형적인 통일체로 이루어진 공동 교회(보편 교회)의 관념을 명백하게 확립시킨 사람.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