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과 부작용 걸러낼 필요 있어
성경·과학·윤리, 삼두마차로 봐야
AI, 모든 치료 운명론적 여길지도
치유 좋지만, 아픔에도 유익 있어
치료법, 경제적 유익 우선 가능성
과잉 진료 및 첨단 기계 오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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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 화면. ⓒ뉴스1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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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과학 영역이 원리와 법칙과 실용을 쫓다 보면 가치 문제가 불거지고, 반드시 윤리적 문제와도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고 위험한 연구를 무조건 통제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으면 막을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현대 과학도 연구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엄청난 모멘텀(momentom)을 가지기 전에, 초기 단계에서 가능한 미래 위험이나 부작용을 걸러내기 위해 사전 경고를 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로런스(William. W. Lowrance)는 ‘현대 과학과 인류 가치(Modern Science and Human Values)’ 논의에서 ①사회적 가치는 과학에서만 유도될 수 없으며 ②지식은 선과 악에 다 쓰일 수 있으나 가치중립적(value free)이지 못하며 ③새로운 지식이 나타날 때 그것의 쓰임새에 주목해야 하며 ④기술 활동이 기술자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의존적이며 ⑤기술 전문가들은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며 ⑥과학이 문화적 전망을 바꾸거나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우주, 인간 사회의 관념을 바꾸어버리거나 서로 다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의 세계관적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이들 여섯 가지 명제를 정리하였다.
로런스는 현대 과학이 필연적으로 가치 문제와 부딪히게 마련임을 잘 간파하고 있다. 여기서 윤리적 논쟁이 반드시 싹트게 된다. 특별히 종교와의 긴장이 당연히 대두되는데, 종교든 윤리든 기조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레스닉(David Resnik)은 자신의 12가지 과학 윤리 강령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 연구의 사회적 결과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그 결과를 알리며, 이 결과가 해롭다고 판단될 때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세속 윤리학자나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도 과학의 윤리 문제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음을 분명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독교의 경우 그 정의가 기독교 종교 행위로 나타나고, 그것은 성경의 윤리 사상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성서와 과학과 윤리는 삼두마차처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신앙적 관점을 살펴보려 한다.
첫째, 기계론적·환원론적 관점에서 인체관의 한계
창조 신앙으로 보면, 건강하든 병약하든 모두 하나님의 섭리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며 모든 생사화복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인간과 인체를 우연한 기계적 시스템으로 보며 환원론적으로 봄으로써 각론적 이해에는 접근했지만 근원적·종합적 접근에 한계를 가져왔다. 이런 세속 의학은 일반적 진단법과 수술 테크닉, 투약법 등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성경적 건강학은 하나님이 인간 생명과 건강의 궁극적 주인이심을 고백함으로써 전인적이다. 필자는 군 생활 중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불치에 가까운 난치병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했다. 좋은 의사를 만나지 못한 덕분(?)이었는지, 의학적 치료는 갈수록 몸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약을 먹을수록 몸은 쇠약해졌고 가슴 통증으로 과속 운전하는 시내버스에서조차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놀랍게도 이 불치에 가까운 난치병은 의사가 경고하던 금식과 기도로 완전 치유가 됐다. 안수 등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은 하나님의 신유였다. 신유를 체험한 후, 지난 수십여 년 간 필자는 류마티스 약을 한 번도 복용한 적이 없다.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극심한 통증은 류마티스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알기 쉽지 않다. 오직 류마티스 환자들만이 그 고통의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증세와 통증은 모두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치유 의학은 분명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 그렇게 모든 환경이 좋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환자 숫자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뿐이다. 기계론적·환원론적 치료도 분명 필요하나, 인체와 건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성경적 건강론이 인류의 창조-타락-구속 관점에서 모든 것을 논의하는 반면, 무신론적 유물론에 기초한 치유법은 모든 치료를 결국 운명론적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다. 이제 기계적·환원적 건강론이 아닌, 통합적 차원의 성경적 전인 치유로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즉 단순한 건강론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의 틀 안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성찰은 지속되어야 한다.
둘째, 약함의 유익에 대한 간과
인간이 영생하지 않는 이상 육체적 치유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건강이 분명 하나님의 선한 뜻이기는 하나, 그것은 결국 작은 유익에 불과하다. 평소 아무리 건강해도 인간은 결국 언젠가 늙어 병들거나 사고로 죽기 마련이요(히 9:27), 약함에도 일정한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고통과 약함 가운데서도 배우는 것이 있다. 사람은 건강할 때는 잘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약함을 통해 성숙해지고 겸손해지며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 앞에 시선을 돌리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건강한 것이 선하나, 타락된 세상 가운데 그것은 작은 유익일 뿐이다. 그러나 세속 의학은 본질상 인체의 신학적·신앙적·철학적 의미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양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 하이브리드 뇌 임플란트 시술 방법은 날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해줄 것이 분명하다.
셋째, 경제적 유익을 위한 방향으로 세속적 치료법의 발전
무슨 거창한 인류 번영을 위해 기약 없는 연구에 뛰어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하이브리드 시술 의학은 일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피드백을 거치며, 결국 머스크 등 연구의 선두 주자들에게 막대한 부를 선물할 수도 있다.
세속 의학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그 치료법이 점점 더 고도화돼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현대 의학은 경제적 유익을 위한 쪽으로 발달해 왔다. 좀 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치유 방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물과 음식으로 질병을 치유한다면, 제약회사들이 관심을 갖겠는가. 그러므로 건강 진단법과 치유 방법은 고도화돼 왔으나,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게 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의학이 너무 전문 영역이라 대중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피동적으로 현대 의학에 의지할 뿐이다. 단지 값이 싸다는 이유로 제약회사들에게 외면받은 탁월하고 값싼 의약품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뇌의 새로운 하이브리드 시술 의학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넷째, 현대 의학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 의사들도 서로 의견이 충돌한다!
한때 건국대 흉부외과 송모 교수의 독창적 심장 수술법(일명 ‘카바’로 불리는 심장판막성형술)에 대해 노벨상에 이를 만한 명의의 시술법이라는 여론의 극찬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 교수와 한국보건의료연구원(원장 서울대 의대 종양 내과 허모 교수) 중심으로 “수술법이 안정성에 문제가 있기에 중단시켜야 한다”는 정반대 의견과 충돌하게 됐다,
척추 디스크(추간판 탈출증) 수술 문제에 있어 수술을 권유하는 척추전문 우리들병원 측(노무현 전 대통령도 여기서 수술)과 “우리들병원은 의학적으로 볼 때 과도할 정도로 불필요한 수술이 많다”고 반박한 서울대 출신 신경외과 의사들 사이의 논쟁은 현대 의학 안에서도 여전히 경제 문제와 의학적 치료법을 둘러싼 해결되지 않은 많은 과제들이 만만찮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허리 디스크로 한 발짝 걷기도 힘들었던 필자도 자연 치유 후 입대해 힘든 훈병 생활을 모두 마쳤다. 수술하지 않아도 자연 치유되는 척추질환을 혹시 과잉 수술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다섯째, 과잉 진료의 폐단
치료에 급급한 환자들은 친절한 진료와 과잉 진료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변호사들이 소송을 남발할 수 있듯, 의사도 고의적으로 환자의 치료 기간을 과도하게 연장하거나 환자를 창출할 수 있다. 여기에도 경제적 유익을 위해 도덕성이 결여된 의사의 과잉 진료나 철저하게 환원론적·기계론적 사고에 사로잡힌 의사의 과잉 의욕이 폐단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저선량(低線量) 컴퓨터 단층 촬영(LDCT)’ 검사를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 양성률(암이 아닌 데도 암처럼 보이는 비율)에 대한 한 보고의 경우, LDCT 검사를 거쳐 폐암이 의심돼 흉강경 또는 개흉 수술까지 실시한 사람의 18-28%가 폐암이 아니었다는 통계가 있다.
첨단 기계도 이렇게 오류가 많다는 것을 전문가가 아닌 일반 환자들은 잘 모른다. 문제는 이런 ‘과잉 진단’이 불필요한 CT 촬영 등으로 인한 방사선 노출, 쓸데 없는 내시경 검사, 항암제 투약과 수술, 방사선 치료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피해는 경제적 부담과 함께 고스란히 환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생명체의 두뇌에 인공 칩을 이식하는 시술은 분명 경제적 부담뿐 아니라 다양한 부작용까지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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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스 섬 피타고리오 항구의, 사모스 출신 수학 철학자 피타고라스 기념 조형물.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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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신드롬 패러독스
과거 핀란드 정부는 40대 초반 관리직 공무원 1,200명을 정기검진과 함께 영양 상태, 운동, 금연, 금주 등 건강생활을 철저히 지키게 한 그룹(A)과 그렇지 않은 그룹(B)으로 나눠 15년간 비교, 관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주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심장혈관 질환, 고혈압, 암, 각종 사망률 등의 모든 항목에서 방치해 놓은 B그룹이 의학적 관리를 받은 A그룹보다 좋게 나왔던 것이다. 심지어 와병 비관 자살률까지도 A그룹이 높았다.
이것이 바로 ‘핀란드 신드롬(증후군)’이란 의학 용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건강 이상 진단에 따른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떨어뜨린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각종 투약이나 시술에서 오는 부작용이 치료 효과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기계론적 의학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대 의학의 공과를 잘 분별하고 창조 신앙의 눈으로 참 웰빙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때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수년 전부터 양식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전인 치유 운동이 시작된 것은 바람직한 시도라 여겨진다.
뇌에 임플란트를 심으려는 시도는 분명 일정한 의학적 효과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생화학적 DNA와 달리 뇌는 정보를 새로 습득하여 담고 어떤 것들은 스쳐 지나가듯 버리거나 폐기 처분하고, 또 어떤 것들은 생각과 연상 가운데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도 하고 단순한 기억만 아니라 거기에는 희로애락의 감정까지 동반되는 등 그 신비로움이 여전히 복잡 미묘하다.
빛이 신경 신호로 바뀌어 다채로운 색상을 볼 수 있게 하고, 음파가 전기화학적 신호로 바뀌어 음성의 미세함까지 듣고 판단하게 하며, 말하는 사람의 감정의 뉘앙스까지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뇌가 파괴된 신앙인들이 신앙고백을 잃어버리거나 신앙을 부정하는 경우가 있다. ‘알츠하이머의 신학’이 등장해야 할 판이다. 단순한 생화학이나 신경과 전기전자적 설명으로 뇌를 통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알파고 바둑’으로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세포도 갖추지 못한 수많은 바이러스 중 한 종류에 불과한 코로나19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인류의 무능에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인류는 다시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깨닫게 됐다. 기독교 신학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창조신학과 구속신학의 절묘한 융합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다.
의학은 분명 철학·신학과 더불어 오래된 역사와 경륜이 있는 학문이다. 해군 입대를 앞두고 온몸이 처참할 정도로 아토피에 시달리던 아들을 이끌고 찾아간 어느 종합병원 피부과 선생님께서, 간단한 검사 후 부신피질호르몬을 투약하지 않고도 단시간에 거뜬히 치유하는 것을 보고 정말 감탄한 적이 있다. 입대 후 아들의 재발을 걱정하자 오히려 바닷바람이 치유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원스런 격려에 감동한 적이 있다.
일론 머스크는 의학자가 아니다. 화성에 인류 정착지를 건설하겠다는, 무모할 정도로 레토릭에 능한 사업가다. 그리고 그것을 사업적 아이디어로 능숙하게 활용하고 변환할 줄 아는 사업가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 우왕좌왕하던 의사들과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을 보며, 다가오고 있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리워지기는 한다.
조덕영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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