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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과학

창조과학 운동은 과학인가? 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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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운동은 무엇인가

1)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곧,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의 이론은 주로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설립을 주도한 헨리 모리스(H. Morris, 공학자, 1918-2006)와 듀안 기쉬(D. Gish, 부회장 역임, 생화학자)로부터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창조과학운동은 대체로 그 신학적 신념의 목록 속에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시킨다. 이 내용은 미 대법원이 참고했던 맥리안 대 아칸소 교육 위원회 소송 사건(Mclean v. arkansas Board of Education)의 지방법원에서 창조론 측의 공식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1)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되었다.

(2)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3) 현존하는 종들은 고정(fixity of kinds)되어 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대진화, Macroevolution)은 불가능하다.

(4) 원숭이와 인간의 조상은 다르다.

(5) 지질학적 형성은 (동일과정설이 아닌) 대격변(catastrophy, 즉 Genesis Flood)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산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대홍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6) 마지막으로 지구의 창조는 젊다. 즉 6000년 내지 1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 이렇게 창조과학의 핵심은 지구와 우주의 오래된 나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부정한다. 지구와 생명체들이 6천년에서 1만년 사이에 24시간이 하루일 때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주로 고수한다.

창조과학운동은 과학적인가?-과학의 반증 가능성(反證可能性, Falsifiability)과 관련하여

1) 반증 가능성이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 방식 가운데 하나다. 즉 어느 가설이 반증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 가설이 어떠한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서 반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적 진술의 자격이 있으려면 반드시 반증될 여지를 구획의 기준으로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시험 가능성 또는 반박 가능성이라고도 한다.

종전에는 과학적 진술이란 단지 경험에 의해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보았는데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고자 했던 칼 포퍼(Karl R. Popper, 1902. 7.28- 1994. 9.17)는 반증 가능성이 있는 진술이 과학적 진술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순수 존재론적 성격의 형이상학적 이론들, 프로이트, 아들러, 칼 융의 정신분석이론, 점성술 지식 같은 이론들은 반증 가능하거나 시험 가능하지가 않다. 이런 영역들은 과학적 영역이 아닌 유사과학(pseudoscience)에 속한다.

칼 포퍼에 따른다면 창조과학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관측이 불가능하고 시험이 불가능하며 재현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반증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 된다.

2) 따라서 창조과학이라는 말과 달리 창조, 창조신앙, 창조론, 창조신학, 기원에 대한 과학철학 등은 종교 언어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별 문제없이 쓸 수 있는 말이지만 "창조과학"이라는 말 자체는 스스로 언어적 모순과 충돌(반증가능하지 않은 초월의 '창조'와 반증가능한 내재적 '과학'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두 단어의 결합) 딜레마에 늘 부딪히게 된다.

3) 창조과학은 언어적 충돌 뿐 아니라 <제1원인인 초월의 창조(causa prima)를 제2원인인 내재의 과학(causa secundae, instrumentales> 속(아래)에 묶어둠으로 창조에 대한 신학과 철학과 학문의 영역을 차단하고 폐쇄하여 스스로 <과학 서적이 아닌 성경>과 <과학이 전부가 아닌 신앙과 삶>에 대해 해석의 풍성함을 버리거나 잃게 될 가능성에 빠지게 된다.

베이컨이 말하는 자체 '동굴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창조과학의 영역이, 신앙 학문보다는 신앙 운동의 영역에 늘 머물고 신앙의 풍성한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조과학운동은 신학적인가?

1) 탁월한 조직신학자였던 고(故) 스탠리 그랜츠는 모든 사람은 신학도(자)라고 했다. 다만 신학이라고 다 같은 신학은 아니라고 말한다. 바른 교회와 사이비 이단교회가 전혀 다른 것처럼 좋은 신학과 나쁜 신학, 바른 신학과 그릇된 신학 등이 있다. 따라서 그 신학의 도구와 출발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2) 창조과학은 초월을 내재의 도구(피조세상의 도구, causa instrumentales)를 가지고 다루려는 신앙 학문이다. 초월과 관련한 창조와 창조론 이슈들을 다룬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sola scriptura)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3) 반면에 창조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에 의존한 신앙 운동이다. <반증 불가능한 창조>와 <반증 가능한 과학>이라는 단어를 엮어놓은 <창조 과학>이라는 용어는 분명 충돌하는 두 단어가 결합한 것처럼 수많은 딜레마를 양산할 수 있다. 이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선동적인 나쁜 과학과 나쁜 신학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4) 칼 포퍼는 거짓임이 드러나도 선동가들은 임시 방편(ad hoc)의 보조 가설을 도입하여 논박을 피한다고 했다. 반박 당하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과학인 반면 점성술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불리한 증거들이 나오면 반증을 피해버리는 "점쟁이 책략"을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논증은 휘튼대 출신의 역사학자 마크 놀이 잘 전하고 있다. 즉 (진리 계시가 아닌) "원리(과학)로부터 연역(deduction)하고자 하는 창조과학은 성경(초월 계시)과 관련해서는 베이컨주의를 잘못 적용했고, 자연(내재의 일반 은총)과 관련해서는 건전한 베이컨주의를 포기했다는 점이 비극"이라 했다. 이 뼈아픈 평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5) 신앙의 <과학>도 결국 신학이다.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 논리가 아닌 (반증 가능한) 정통학자가 되어 제도권의 학문을 바꾸든지 성경적 창조 신앙을 다루는 신학자가 될 필요가 있다.

6) 기독교의 창조신학은 초월 계시로서의 창조주(causa prima)와 그 피조세계에 대해 계시를 기반으로 하는 신앙 학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초월을 한계를 지닌 내재의 도구를 가지고 함부로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그랜츠의 말에 따른다면 창조과학도 일종의 신학인 셈이다. 다만 그 신학이 좋은 신학인가 나쁜 신학인가 미숙한 신학인가는 검증받아야 한다. 신앙 운동을 표방하는 창조과학이 신학을 외면하는 태도는 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나가면서

1) 이렇게 성경 신앙의 다양한 역사 가운데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창조과학 운동은 그 과학적 특성상 연륜이 대단히 미천한 신앙 운동의 한 분파라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서 등장하여 한국적 신앙 풍토 속에서 빠르게 승승장구하던 창조과학 운동은 21세기 들어오면서 불안한 모습을 노정(露呈)하고 있다. 켄햄이 주도한 AIG같은 근본주의적 창조과학 운동이 있는 가 하면 지적설계(ID) 운동이라는 좀 더 스펙트럼이 넓은 운동 등으로 분화하고 있다.

2) 먼저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수많은 정보를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된 대중들은 더 이상 과학자들의 명성 자체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만큼 아주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게 되었다. 슬라이드 몇 장 가지고 해당 비전문분야 과학자가 교회에서 강연하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대중들은 너무 많은 반론들을 인터넷 세상에서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조과학의 핵심 주장인 창조 연대와 우주 기원과 지질학과 다윈주의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신학과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 것도 프로파겐다적인 교회 사역에 치중한 창조과학 운동의 위기를 자초한 면이 있다.

3) 특별히 그렇게도 창조과학 회원 확보에 열심을 다했음에도 국내에서도 대부분의 크리스천 지질학자들과 천문학자들(예를 들면 지질학의 원로 양승영, 장기홍, 이문원, 천문학의 최승언, 이영욱, 우종학, 권영준 등)이 창조과학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창조과학의 치명적 딜레마가 되고 있다. 지질학과 천문학 분야가 특별히 그 어느 분야보다도 창조과학과 학문적으로 정면충돌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4) 신학도 그리 우호적이지가 않다. 헨리 모리스에 반대한 성경과 과학에 모두 능한 침례교 조직신학자 버나드 램이나 20대 중반 옥스퍼드대에서 분자생물물리화학 학위를 취득한 천재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 성공회 신부인 물리학자 존 폴킹혼, 템플턴 상을 수상한 핵 물리학자 이안 바버, 카톨릭 신앙의 존 호트, 칼빈대의 데이비스 영, 역사학자 마크 놀, 안식교 배경의 로널드 L. 넘버즈, 게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프랜시스 콜린스 등이 모두 창조과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5) 20세기 신학을 이끌며 자연신학에 유난히 비판적이었던 칼 바르트에 따른다면 창조과학 류의 자연신학은 반성경적일 뿐 아니라 쓰레기 신학일 뿐이다.

6) 신앙과 신학의 학문적 내공 축적은 등한시하면서 선교와 교회 대상의 세미나와 창조과학전시와 교육관 건립 등 프로파겐다적인 홍보 전략에 집중하던 창조과학 운동이 아날로그적 감성의 시대에는 일부 효과적이었으나 디지털 시대에는 심리적, 체력적으로 힘겨운 도전의 언덕을 올라야 할지 모른다.

결국은 치열한 학문적 내공을 쌓지 못한 결과다. 한국창조과학회 회장을 역임한 송모 박사의 예루살렘 회복 운동이나 임원을 역임한 손모 교수의 예언적 사역이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나 정통 교단으로부터 이단적 운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받거나 교단 차원(예장 합동)의 정죄를 받은 것도 창조과학 사역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모두 신학에 대한 무지와 냉소적 접근이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다.

7) 이론(理論)이나 설(說)이나 직관(view)적 세계관과 달리 학(學)문은 정교하다. 그리고 끝없이 정교해지고 있다. 따라서 창조과학도 무조건 현대 과학을 불신의 학문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검증 가능한 논문을 통해 스스로를 논증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시도는 원동연 박사가 학회 부회장으로 있던 1990년대 중반 일시 시도가 있었으나 금새 좌절되었다.

8) 정말로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것이 과학적 진리라 여긴다면 예수 믿는 비전문가인 대중들을 상대로 로고스가 결여된 파토스와 에토스를 앞세워 호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토스와 파토스가 앞서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마치 문제가 많고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공격하는 누를 범 할 수 있다.

9) 과학도는 파토스가 아닌 진정한 전문가로서 권위 있는 관련 저널에 자신의 입장을 치열하게 피력해야 한다. 이것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면 오히려 성경으로 자연 과학을 희화화한다는 조롱거리가 되고 겟토화 되어 버릴 수 있다. 따라서 에세이 수준의 칼럼으로 과학에 무지한 기독교인들만 현혹한다는 비판과 조롱에서 벗어나서 창조과학도 이제는 진지한 연구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비전문가로서 전문 영역을 함부로 폄훼하거나 간섭하지 말고 관심이 있는 영역에 직접 전문가가 되어 논증에 나서야 한다. 창조과학자 가운데는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 받은 과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평범한 딜레탕트일 뿐이다. 학문은 (세계)관이나 이론과 달리 정교해지고 있다. 생물학자가 빅뱅을 부정한다거나 재료공학자가 현대지질학을 부정하는 그런 태도는 자제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천문물리학, 지질학 등)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전문가로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

10) "모든 사람은 신학자"라는 스탠리 그랜츠의 입장을 따른다면 창조과학도 결국은 이름 속 "창조와 과학"이 있는만큼 "과학"인 동시에 "신학"이다. 신학은 신학자 숫자만큼이나 자신의 학자적 논리와 논증을 전개한다. 그렇다고 신학자들이 견해가 다른 신학자를 노골적으로 반성경적, 타협론자라 하지는 않는다.

창조과학 운동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전문가들을 편협한 사고로 무조건 반성경적, 타협론자, 무신론자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지양하고, 정말로 전문과학회를 표방하고 지향한다면 공공성 확보 차원에서도 앞으로는 관련 전문학자들(신학자, 천문학자, 지질학자, 생화학자 등)과 직접 대면하여 진지한 대화와 토론과 학문적 논증에 친히 나서야 할 때가 이제는 되었다고 본다. ​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