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셈족(유대인)이 버린 예수, 함족(붓) 라틴신학자들이 바로 세우다(1)

728x90

셈족(유대인)이 버린 예수, 함족(붓) 라틴신학자들이 바로 세우다(1)

 

 

성경과학창조세계관신학

라틴 신학이 시작 된 곳, 함의 후손 “붓”의 땅

기독교 신학, 북아프리카에 빚을 지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 함의 후손 "붓"의 땅, 라틴신학의 원조가 되다!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함족 "붓"의 땅, 리비아 Ptolemais왕조의 유적©Wikipedia

 

붓의 후손들의 정착지

 

붓은 함의 셋째 아들이었다(창 10:6; 대상 1:8). 이 붓(Phut)은 셈족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인 기럇여아림 족속을 말하는 붓 족속(Puthites)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애굽 비문에 등장하는 동아프리카(소말리아)의 푼트(Punt)와도 구분된다. 푼트와 동일시하려는 주장이 있기는 하나 성경적 근거가 불확실하다.

 

히브리어 ‘붓(Phut)’은 오늘날 리비아(Libya, 이집트의 서부) 지역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겔 30:5; 38:5; 렘 46:9). 그래서 영역(英譯) 성경인 흠정역(KJV)은 붓을 리비아(Libya)로 번역하고 있다. 리비아에는 지금도 ‘붓’이라는 이름의 강이 남아 있다. 하지만 다니엘 시대에 이르러 붓의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미 리비아로 불려지고 있었다(단 11:43). 요세푸스도 “붓은 리비아를 창건한 사람이며, 그들은 부타이티스(Phutites)라 불려졌다.”고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대홍수 이후 붓은 아버지 함과 더불어 노아 공동체를 떠났음이 분명하다. 즉 아버지 함이 미스라임과 더불어 애굽 지역에 정착할 때 붓도 함께 하였으며, 붓은 아버지 함과 형 미스라임이 정착한 애굽을 지나 서쪽으로 더 나아갔다. 이렇게 일찌감치 노아 공동체에서 멀리 이탈해버린 붓은 그 후손들의 이름조차 성경에 남기지를 않았다. 하지만 붓의 후손들은 결코 소멸 되지 않았다. 지금의 북 아프리카에 정착한 그 후손들은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으로 확장 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고대 토착민이 되었다.

 

"붓"의 땅 북아프리카 리비아지도

 

성경에 나타난 붓의 후손들

 

함의 다른 형제들이 후손들의 이름을 성경 속에 남긴데 비해 무슨 이유인지 노아 공동체와 아버지 함과도 멀어진 붓은 그 후손들의 이름을 성경에 남기지 않았다(창 10:6; 대상 1:8). 하지만 그 후손들이 아프리카 북부에서 활약했음을 성경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붓은 늘 구스, 애굽과 함께 함족을 대표하는 족속이 되었다(나훔 3:9).

 

예레미야 선지자는 붓의 병사들이 전쟁에서 아주 용감한 자들이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그 나라의 병거를 이용해 애굽을 침공한 구스(에디오피아)와 룻(루딤) 사이에 있었다(렘 46:9). 그들은 용맹하고 활의 명사수들이어서 애굽 용병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 그들은 한때 바사와 룻과 함께 부요한 두로의 용병이 되기도 했다(겔 27:10). 검(칼)을 가진 자 다 검으로 망한다(마 26:52). 붓을 비롯해 애굽, 구스, 아라비아 및 굽은 모두 칼로 멸망당할 나라였다(겔 30:5). 즉 붓은 검을 자랑하던 곡, 바사, 구스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국가였다(겔 38: 5).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 4:4).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을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인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어졌다. 붓의 땅 북 아프리카에도 헬라인과 로마인들이 찾아왔다. 주전 300년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이곳을 찾아왔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교회 유적, 정식 명칭은 Basilica of Damous El Karita, 1911 년 발굴 당시의 오래된 엽서들, Damous El Karita의 대성당은 카르타고에 위치한 튀니지 대성당으로 후기 고대와 비잔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르타고 고고학 유적지 내 언덕 근처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아프리카 지방의 수도 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알려진 기독교 건축 단지다. 이 단지의 중요성은 이곳이 장례식장 일뿐 아니라 이곳에 묻힌 성도들의 숭배와 중요한 종교 축제와 연결된 주요 순례지 였음을 시사한다. ©Wikipedia

 

 

이렇게 붓의 땅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중심 도시로 다민족 다문화의 용광로 같은 도시였다. 이곳에 복음은 자연히 스며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프톨레미 왕조(주전 322-96) 당시 붓의 땅 구레네는 의학학교와 도덕 철학 학교가 들어서고 학문이 융성한 지역이 된다. 이후 예루살렘처럼 구레네도 로마의 관할(주전 96년)로 들어갔다. 이곳도 복음을 위한 때가 찬 것이다.

 

오순절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순례자들 가운데는 구레네 지역 출신들도 있었다(행 2:10). 그들은 예루살렘에 회당도 가지고 있었다(행 6:9). 예수께서 갈보리길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도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마 27:32).

북아프리카의 구레네가 얼마나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리아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구레네 사람들이 있었다(행 11:20). 구레네 사람 루기오(Lucius)는 안디옥 교회 선지자와 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행 13:1). 빛 되신 주님의 광명은 이렇게 일찌감치 “붓”의 땅 아프리카를 비추고 있었다.<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