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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신학

유대 카발라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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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카발라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

조덕영 박사

 

 

침쭘과 하나님의 케노시스(Kenosis)

 

침쭘(신의 일종의 자기 축소)은 기독교에도 전혀 생소한 개념은 아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과 우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창조가 신적 수축 작용일 가능성을 언급한다. 즉 '비신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가기 전에 비신적(非神的) 세계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것을 위한 공간을 양보하기 위해 자기를 자기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이 침쭘 개념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현존을 위해 영역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전제를 거두어들인다. 이리하여 창조는 하나님의 케노시스 공간 속에서 생성된다. 게르솜 숄렘(Gershom Scholem)은 루리아(Issac Luria)의 침쭘 사상을 사용하여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에 대한 유대-기독교적 표상을 새롭게 근거시키려고 시도한다. 물론 케노시스주의자들에 있어 로고스가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자기제한(self-limitation)도 역시 케노시스이다.

 

 

침쭘과 적응(accommodation)의 원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비우셨다는 것은 신학의 적응의 이론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당시 천문학 체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천문학적 내용을 기술하는 데 있어 통속적으로 글을 썼고 상식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한 반면 천문학자들은 전문가들로, 인간의 두뇌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언어로 기술하였다고 보았다. 칼빈의 해석 방법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가 누구에게든지 이해할 수 있게 묘사되었다는 종교 개혁 이론에 기초한다. 성령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된 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주제를 선정하였을 것이다. 즉 모세는 교육받은 자만의 교사가 아니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사였다. 따라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평범한 언어를 채택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책이므로 천문학 및 다른 어려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성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시편 주석에서도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과학적 사건에 대해 감관이 느끼는 대로 묘사했지 과학적 용어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성령께서는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내리기 위해 성령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아무도 그 말씀이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소통의 문제인 것이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주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맥그라스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3 가지 칼빈의 공헌이 있다고 하였는데 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연구에 대해 긍정적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요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한 인물이요 성경을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적응(Accommodation)의 원리는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도 사용한 방법이다.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 상태 등에 적응 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법이었다. 이 적응의 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인간의 수사학(Rhetoric)이 결국은 하나님의 수사학에서 왔다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의 한계에 맞추어 적응하셨다는 적응 이론은 자신의 수축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침쭘 개념은 분명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침쭘과 자유의지

 

때로 신실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주에 카오스와 불확실성으로 여겨지는 경우를 방치하여 놓으신 것인가 고민을 할 때가 있다. MIT 출신 유대계 물리학자 슈뢰더는 이 침쭘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적절한 수준의 불확실성을 도입하여 세상이 주어진 범위 내에서 자유로이 운용되도록 허용하였고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를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고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것들이 코스에서 이탈할 때에만 하나님이 개입하여 흐름을 교정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보인다.

 

 

아인 소프(무한자)와 세피로스(신적 방출로 인한 10가지 상징 체계)의 문제

 

신을 만드신 신, 하나님의 하나님, 창조주의 창조주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린 아이와 천재들이 동일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려는 것을 차단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뒷모습은 커녕 정면의 진면목도 여전히 보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루터가 말한 대로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옷을 입은 가면의 하나님(Larva Dei)으로 나타날 뿐이다. 하물며 '창조주의 창조주'를 보려는 시도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카발라는 아인 소프(無限者,무한자)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하나님'을 보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잘 알다시피 영지주의에서도 나타나는 사상이다.

 

카발라는 영지주의와 달리 세피로스가 바로 아인 소프의 방출의 결과라는 주장으로 실마리를 풀려고 다가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인 소프는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불가시(不可視)의 존재이다. 인간은 피조 세계에 내재한 의미 아래에서 아인 소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미조차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고 카발라는 말한다. 어린 아이에게 미적분과 양자 역학이 아무리 진리라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물며 아인 소프에 대해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아인 소프 개념을 도입한 카발라조차 아인 소프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금기시하고 때로는 신성모독적이기조차 한 것처럼 여기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분명 카발라의 아인 소프는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카발라에 의하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를 축자적으로 읽으려 하면 안 되고 코드로 읽어야 한다. 이것이 세피로스로 나타난다. 이 같은 상징은 기독교적 질서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호크마wisdom, 네짜흐triumph, 호드splender 등)과 창조 질서(티페레스beauty, 예쏘드foundation 등)와 성령의 9 가지 열매(하나님의 헤세드kindness와 관련)가 혼합되어 있는 듯 한 이 10 가지 세리로스의 상징은 기독교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발리스트들은 하나님의 신비는 감추어져 있고 그 하나님의 지식은 다아트(Da'at)라 하는 데 이것은 호크마(신적 지혜)와 비나(understanding) 사이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하나님 지식을 얻기 위해 경전을 배워야 한다고 카발라는 말한다. 코드화된 지혜와 지식과 이해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신비가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영지주의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증거처럼 보인다. 기독교도 물론 사도 요한이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기는 하나 요한의 강조는 영지주의나 카발라의 지식과 전혀 다르다.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되어 있는 지식과 이해이다. 카발라와 영지주의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는 분명 많이 낯선 것이다.

 

 

나가면서

 

카발라가 성경의 하나님과 창조 교리에 대한 풍성한 상상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 기독교는 지금까지 성경의 신비성을 너무 방치해온 감이 있다. 성경적으로 대단히 중요함에도 천사론이 신학 교리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외면되어 서자(庶子) 취급 받는 현실도 여기에 기인 한다. 물리학자 슈뢰더는 카발라 접근 방식이 본질적으로 논리적이며 질서가 있으며 수학적이라 말한다. 카발라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아니라 '보시기에 질서가 있었더라'라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 카발리스트였던 미란돌라(Pico di Mirandola)는 모든 기독교 교리가 유대 카발라 안에 잠재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크리스천 카발리즘은 삼위일체나 기독론 등의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카발리즘을 접근한다.

 

그러나 본 논고는 크리스천 카발리즘을 시도하는 글이 아니다. 그들의 창조론을 기독교적으로 분석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침쭘의 이론과 세피라의 이론들이 기독교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 교훈과 창조 해석에 있어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당연히 성경적 창조론을 수용하나 복음의 틀까지 거부하는 창조론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카발라는 여전히 기독교의 교리 기준을 이탈한다. 창조론을 벗어나면 카발라에는 기독교적으로 낯설고 수용하기 어려운 이론들이 무수하다. 하지만 그것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카발라가 신비의 통로로 창조주 하나님의 지평을 넓혀보려고 시도한 것 또한 사실이다.

 

21 세기 지금 카발라는 다시 부흥하고 있다. 더군다나 카발라가 영지주의나 포용적 창조론을 가진 지적 설계 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 등과 만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21 세기 포스트모던 상황 가운데서 다른 이론들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대처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기 위해 기독교는 더욱 지혜로운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카발라 창조론 연구도 그런 자극을 위한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