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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에너지 보존 법칙을 발견한 ‘제임스 줄’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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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보존 법칙을 증거한 ‘제임스 줄’의 신앙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어린 학생들은 과학 시간에 한 낯선 과학자의 생소한 법칙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제임스 줄이 발견한 ‘줄의 법칙’이라는, 조금은 어렵고 딱딱한(?) 법칙이다. 과학열의 열당량 값의 표현에 사용되는 기호 J와 일·에너지·열량의 국제 단위계(SJ)에서 사용되는 단위 <줄>과 그 기호 J는 모두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제임스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은 한때 영국 프리미어 리거였던 우리의 박지성 선수가 소속되어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랭커셔 주 맨체스터 근처에 있는 솔퍼드에서, 1818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양조장 주인의 다섯 아이 중 둘째였다. 어릴 적 제임스는 약하고 수줍음을 잘 탔으며 척추병을 앓던 아이였다.

 

건강과 당시 풍습에 따라 제임스는 15살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로 그는 가정의 양조장에서 일하면서 형과 함께 맨체스터에서 개인 교사에게 시간제로 교육을 계속 받게 되었다.

 

1834년에서 1837년까지 그들은 유명한 영국의 화학자 존 달톤(John Dalton)에게서 화학, 물리, 과학적 방법 및 수학을 배웠다. 달톤은 경건한 퀘이커 교도였다. 이 때 달톤은 이미 70세 전후의 노인이었다. 제임스는 그가 과학자가 되는 데 있어서 달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매우 감사했다.

 

“내가 창의적 연구를 통해 내 지식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은 달톤의 교육 덕분이었다!”

 

그들의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제임스와 그의 형은 양조장 경영을 떠맡게 되었다. 비록 줄이 대학에 다닐 기회를 갖지는 못했으나, 그 당시 양조장은 발효라는 화학적 과정과 대량의 액체나 기체를 다루는 엔진이라든가 펌프 등을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장소였다.

 

이런 풍부한 시설과 자금을 바탕으로 줄은 전기 연구에 매달린다. 전기 연구의 대학자 데이비나 패러데이가 열동력에 관심을 가진 것과 달리, 전류의 열 효과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1839년 기계적인 일과 전기 및 열을 포함하는 일련의 실험을 시작한 줄은, 1840년에 가장 명성이 있는 과학자들의 모임인 런던의 왕립학회(Royal Society)에 ‘볼타 전기에 의한 열의 생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보낸다. 일정한 전류로 얼마만큼의 열이 발생하는가 하는 중요한 연구였다. 이것이 바로 전류에 의한 열 발생에 관한 유명한 법칙, 줄의 법칙이다. 논문에서 그는 전류를 전달하는 철선에서 매 초당 생성되는 열의 양은 회로의 저항과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 이 논문의 중요성을 왕립학회의 학자들은 잘 알지 못하였다. 왕립협회는 줄의 논문 2편 에 대해 출판도 거절할 정도였다. 그래도 줄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왕립협회의 제도권 과학자들과 맨체스터 공업지대의 실험 과학자들은 관심과 가치관이 전혀 다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843년, 줄은 물을 넣은 통 속에 발전기를 넣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실험을 한다. 기계적인 일과 물 온도의 상승에 대한 연구를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줄은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믿고 있었던 ‘열의 열소(熱素) 이론(caloric theory)’을 부정하게 된다. 열소 이론은 열이 일종의 유동성 물질이라고 믿는 이론이었는데, 줄 자신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험 결과로 이런 생각을 버리게 된다.

 

오늘날 일상 생활의 전열기나 물을 이용한 족(足) 마사지 기구, 스폿 용접기(spot welder; 큰 전류를 흘려서 도체를 용접하는 기계) 등은 줄 열을 이용한 대표적인 기구들이라 할 수 있겠다.

 

거듭된 위대한 실험에도 불구하고 10여년간 줄을 주목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다.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과학자가 알아보는 것일까? 결국 줄 실험의 위대한 결과를 알아차린 과학자가 나타났다. 바로 본 책에서 다룬 캘빈 경(당시 본 이름은 윌리엄 톰슨)이었다(1824-1907). 1847년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의석상에서 캘빈은 줄의 실험 결과가 대단한 연구였음을 주목하였다. 당시 겨우 23세의 캘빈은 이미 글래스고우(Glasgow)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어 있었다.

 

“줄의 연구는 기계적 에너지가 양적으로 열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프랑스 기술자들의 열 기관 이론과 다른, 주목할 만한 연구이다!”

 

신실한 기독교 과학자였던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와 조지 스톡스(George Stockes)도 줄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왕립학회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849년 줄은, 패러데이이 도움으로 ‘열의 기계적 등가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왕립학회에서 발표한다.

 

줄은 기체 분자의 속도를 계산한 최초의 과학자였으며, 전기의 표준단위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공로로 줄은 1872년과 1887년에 영국협회의 대표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열과 기계적 운동에 대한 줄의 실험적 공헌을 높이 평가하여, 훗날 물리학에서 에너지(또는 일)의 단위를 ‘줄’이라 명명하였다.
 
1852년 줄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일찍이 주목한 톰슨과 공동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줄은 실험 과학자였고 톰슨은 수학을 비롯한 다방면에 탁월한 천재였다. 두 과학자는 서로 완벽하게 조화가 되었다. ‘줄-톰슨 효과’라는 유명한 실험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8년 동안 줄은 톰슨과 함께, 새로운 열역학 원리에서 나오는 몇 개의 예측을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의 중요한 실험을 행하였다. 그 중 한 가지가 “어떤 내부는 외부에서 일을 가하지 않으면 기체의 팽창에 따라 온도가 내려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체가 팽창할 때 냉각하는 이러한 현상을 바로 ‘줄-톰슨 효과’라 한다. 이 원리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냉장 산업 발전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무엇보다 줄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열역학 제1법칙을 발견한 과학자로 기억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신혼여행지에 폭포가 있다는 것을 알고 황당한 실험까지 구상했다고 한다. 폭포의 물이 떨어짐으로써 위치 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전환될 것이고, 그에 따라 폭포 아래의 물 온도는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다. 폭포 주변에 이는 물보라가 너무 심해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생각은 본래 의사였던 독일인 로버트 마이어(Robert Meyer, 1814-1878)에게서 시작되었다. 음식물이 몸 안으로 들어가서 열로 변하고 이것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학적 에너지로 변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해서, 모든 종류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 가능하며 전체 에너지의 양은 보존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즉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역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며, 자연에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독일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의 영구 기관 불가능의 원리로 발전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마이어가 힘의 보존 원리를 세웠으며, 제임스 줄이 실험적 증명으로 열과 일이 동일하다는 이론을 완성하였다고 본다. 두 사람은 모두 열은 역학적 일로 변환될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둘은 현대의 열 개념을 완성했고,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는 현대 과학의 원리를 생각해낸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이들이 창안한 이 원리는 클라우시우스(Rudolf Emmanuel Clausius, 1822-1888)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탁월한 과학자 줄의 가정은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부인은 결혼한 지 6년 만에 어린아이들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 후 줄의 가족은 양조장을 팔았다. 그리고 줄은 오직 과학적 실험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줄은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달톤, 패러데이, 윌리암 톰슨, 맥스웰과 같은, 당대 영국 최고의 탁월한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신앙적 겸손을 갖춘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과학자로서 연구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확신이 놀라운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당시는 진화론이 영국을 휩쓸던 시대이다. 1864년 717명의 과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항하여 런던에서 ‘자연과학 및 물리학도의 선언’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는 여기에 서명한 과학자였다.

 

1872년부터 줄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연구는 중단되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간에게 닥치는 마지막 징계이다. 징계 다음에는 저 너머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실험 정신으로 충만한 이 최고의 실험 과학자도 이 문턱을 넘어야 했다. 죽음 너머에 대해 과연 그는 어떤 실험 정신을 가지고 있었을까? 결국 줄은 1889년 10월 11일 영국 체셔(Cheshire)의 세일(Sale)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줄은 과학을 연구하려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자신의 신앙의 결과로 여겼다.

 

“자연 법칙과 가깝다는 것은 그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친숙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의지를 깨닫고 그것에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은 그분의 창조물이 증명해주는 지혜, 능력 및 선하심을 통해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줄의 고백을 분명 기억하실 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