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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한성 백제기(주전 1세기~주후 475) 왕가 고분군(송파 석촌동 소재)의 놀라운 특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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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시대 송파 석촌동 고분군의 재해석 필요성

한성 백제 시대(주전 1세기-주후 475) 왕가 무덤의 놀라운 특징들이 새롭게 드러나다!

"교과서를 다시 써야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한성 백제의 왕가 무덤군은 연접식 돌무지무덤으로 스키타이식 적석목관분 형태인 신라와 전혀 다른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최근 재 발굴 과정에 있는 백제의 왕들과 그 가족들이 잠들어있는 송파 석촌동 고분군에서

오랜 기간의 파괴와 도굴에도 불구하고

5천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 가운데는 귀걸이 등의 금 장신구들과 유리구슬류 그리고 토기들과 기와들이 발굴되었다.

이밖에도 수천 점의 유물과 함께 불에 태우고 잘게 부순 화장 인골이 국내 최초로 대량 출토되었다.

왕실 무덤의 광범위한 화장 문화는 새롭게 확인된 아주 특이한 부분이다.

 또한 석촌동 고분군은 고구려와 닮은 돌무지무덤(적석총) 뿐 아니라 돌을 덮은 흙무지 무덤(즙석봉토분), 움무덤(토광묘) 등과 더불어

연접식 적석총(작은 무덤이 서로 연결된 돌무지무덤)인 것이 확인되어

한성 백제 왕실 무덤의 또 다른 특이성이 새롭게 드러났다.

오랜 기간의 무분별한  

도굴과 파괴 속에서도 여전히 많은

서방과 서역에서 유래한 유리구슬들이 발굴된 것은

해양 국가였던 백제가 외국과 교역이 대단히 활발한 개방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송파에는 1970년대만해도 300여기의 무덤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단히 번영한 고대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어땠을까?

한성 백제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등장한 것은 384년이었다.  

그런데 이 불교가 최초로 전해진 것은 한성 백제 지역이 아니었다. 

인도 간다라 출신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한반도로 들어온 곳은

지금의 전남 법성포(당시 아무포)구로

그때는 침류왕 1년(주후 384년) 9월이었다.

그 때까지 공식적으로 불교가 백제 속으로 전파된 적은 없다.   

백제는 22곳에 담로(일종의 자제 종친들을 지배계급으로 파송한 군현제도)를 둔

해양 국가요 대륙보다 주로 바닷길을 연 국제무역국가요 열린 국가였다.

 

해양 무역을 발판으로 한

열린 국가의 특성상

한성 백제는 세계 종교에 대해서도 특별한 통제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 교역 대상들 가운데는 아마도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주후 1세기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가

지금의 인도 지역까지 이미 선교지를 확장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무역을 핑계로 이 먼 동방의 낯선 곳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의 중국 지역보다는 인도 등 해상로를 따라 한강으로 접근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마라난타처럼 중국의 동진 등을 거쳐

무역상들을 따라 한성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의 서울은 주변에 숫한 산들이 솟아있고

왕숙천, 성내천, 탄천, 양재천, 청개천, 도림천, 안양천, 홍제천 등 지천이 널려있으며

한강 상류 지역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종교인들이 은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터전을 잡기에는 절묘한 지역이었다.

 

한성 백제 시대 부흥을 주도한 근초고왕릉이 유력하다고 알려진 주후 4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촌고분군 제 3호분 풍경. 동서 한면의 길이만 50미터가 넘는 웅장한 모습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고분 주변은 특별한 돌들이 없는 한강변 평지였으므로 산에서 돌을 채집하여 다듬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이 같은 대형 고분을 만들 수 있었던 왕권이 얼마나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