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섬김과 사랑(목사가 된 머슴과 머슴을 주의 종으로 섬긴 장로님- 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대전신학대학교에 가면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인 고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이 목사는 가난한 고아요 머슴이었다. 밑바닥 인생을 극복하고 분열 이전의 장로교단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한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이 목사는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행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떠돌이 소년이었다. 이 목사가 인생 역전의 동반자인 전북 김제시 대지주 조덕삼(조세형 전 주일대사의 조부)씨를 만난 것은 17세 되던 해였다.
조씨는 자신의 집에서 마부馬夫로 일하며 틈틈이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는 이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봤다. 이들 사이의 인연이 더욱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다. 최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이들은 미륵불교의 본산이자 증산교의 발생지인 모악산 기슭 김제 금산(팟정이) 마을에서 1905년 10월 11일 집주인 조덕삼과 머슴(마부) 이자익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곳에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이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날한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1907년, 두 사람은 함께 교회의 영수(집사급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 집사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보다 이 장로를 집사의 직분으로 잘 섬겼던 것이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에 충성하였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 물론 이자익 목사가 신학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물질적으로 도운 것은 조덕삼 장로였다.이 조덕삼 장로가 바로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이다.
조덕삼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 교육을 위해 이듬해 유광학교를 설립한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금산교회 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만세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으며,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을 때 이자익 목사를 비롯한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 등은 신사참배를 거부해 고난을 받았으며 급기야 교회가 폐쇄당하기도한 민족의 시련과도 함께한 교회였다.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역임(13·33·34대)했을 뿐 아니라, 장로교(통합) 노회장을 수차례 지냈으며, 2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장관보다는 목회자로 종신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다. 이자익 목사는 인생을 정리해야 할 70세의 고령에도 대전노회와 장로회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교)를 설립한 열정의 목사였다.
대전신학대 총장이었던 문성모 박사는 이자익 목사에 대해 “한국 교회 120년 역사를 통틀어 명예나 권력,일신상의 유익을 위한 신앙의 변질이 전혀 없었던 제일의 거목”이라고 칭송하였다.
도대체 이 두분의 놀라운 섬김과 사랑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분명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을 믿는 확고한 창조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수년전 과학자요 교수가 된 이 이자익 목사 후손(이규완 대전제일교회 장로)과 조덕삼 장로의 후손인 전 국회의원 조세형 장로가 서로 만났다. 그리고 두 후손은 서로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제 고인이 된 조세형 장로는 아마 하늘나라에서 이자익, 조덕삼 두분과 함께 웃고 있지 않을까?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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