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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사의 거인, 뉴턴의 학문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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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사의 거인, 뉴턴의 학문과 신앙

 

 

 

 

 

갈릴레이가 떠나고 뉴턴이 태어나다

 

1642년, 유럽에서는 위대한 과학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개월이 지난 같은 해 성탄절에 또 다른 과학자 한 사람이 태어났다. 세상을 떠난 과학자는 망원경을 발명한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였으며, 성탄절에 태어난 과학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었다.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요 독자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한 수학자이면서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영국 북부 울스도프(Woolsthorpe)라는 곳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의 아버지는 작은 농가에 살던 지극히 평범한 농민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 한나는 뉴턴이 세 살 되던 해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재혼을 하게 되었다. 의붓아버지 바나바스 스미스는 목사였다. 하지만 어린 뉴턴은 할머니에게 남겨졌다. 형제, 자매 없이 할머니의 보호 아래 자란 뉴턴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독서광이 되었다. 또 혼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스스로 고안해 놀거나, 기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장난감을 만드는 비상한 재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뉴턴의 손재주와 천재성

 

12살이 되던 1654년 9월, 뉴턴은 근처 그랜담의 올드킹스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528년 헨리 7세 치하에 건립된 이 학교는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입학시키는 명문이었다. 이곳에서 뉴턴은 화학에 특별한 흥미를 지닌, 학급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우수한 학생이면서 풍차와 물시계 등을 만들 줄 아는 손재주 또한 비상한 학생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4년 후 의붓아버지의 사망으로 잠시 고향에 돌아와서 어머니의 농장 일을 도와주던 뉴턴은 1661년, 드디어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당시 교육 수준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나 천문학자 케플러의 새로운 이론들이 무시되었으며, 갈릴레이의 이론들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였다. 여전히 사람들은 지구가 고정되어 있으며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이런 학문 풍토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뉴턴이 올바른 학문을 깨우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뉴턴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치던 고전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광학의 권위자인 아이작 바로우(Isaac Barrow) 교수였다. 바로우 교수의 영향을 받아, 뉴턴은 잠자고 있던 자신의 지성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는 케플러와 데카르트의 책 등 당시의 첨단 과학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케플러가 쓴 빛에 관한 모든 서적을 뒤지다시피 하면서 빛에 관심을 가졌던 뉴턴은 드디어 빛의 스펙트럼을 발견하였다. 태양 빛은 순수하고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던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프리즘을 통해 나타나는 빛의 다양한 색깔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는 또한 거울을 사용하여 반사 망원경을 만들기도 하였다. 단순히 렌즈로만 망원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학자들에게 이것은 정말 경이적 발명이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대학에 다니던 동안에 이룩한 성과였다.

 

이즈음 또한 뉴턴은 곡선의 면적을 계산하는 방법을 소수점 이하 50자리까지 가능케 하여 근대 수학의 기초가 되는 "미분법"의 근거를 마련한다. 이 방법은 후에 미분학과 적분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각각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을 발견하였다. 어쩌면 이 한 가지만으로도 뉴턴은 수학의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이항정리"(二項定理, binomial theorem)라고 하는 수학의 한 원리도 발견하였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발견

 

무엇보다 뉴턴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우리들이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중력에 관한 법칙을 발견한 일화다. 사람들 사이에 “뉴턴의 사과”라 더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1727년 로버트 그린이라는 사람이 출판한 『힘에 관한 저서』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뉴턴은 울스도프에 있는 어머니 집 뜰에 앉아 있을 때 사과 하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그는 ‘왜 사과는 똑바로 아래로만 떨어질까?’하고 생각에 잠겼다. ‘왜 사과가 수직으로 지면에 떨어지고, 위로 가든가 옆으로 가지는 않는 것일까?’ 그는 사과가 가지에서 떨어질 때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어떤 힘이 그것을 지면으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655년, 영국 런던에서는 쥐가 옮기는 전염병인 페스트가 번져 그 해 여름 런던 인구 전체의 5분의 1이 사망하는 재앙이 발생하였다. 그때 케임브리지 대학도 휴교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고향으로 돌아온 뉴턴은 이때 인력(引力)에 관한 이론들을 정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18세기말, 그의 고향 울스도프의 뜰에 있는 사과나무 중 한 나무에는 “사과가 떨어진 나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다. 1820년경 이 나무는 썩게 되어 베어버렸으나 그 목재의 일부는 의자로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단순한 사물 하나도 무심코 보아 넘기지 않는 뉴턴의 통찰력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통해서도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그때까지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인력에 대해 연구하도록 한 것이다. 이 일화에 관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기는 하나, 뉴턴의 주치의였던 스타클리 박사도 그가 쓴 『뉴턴의 생애』에서 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뉴턴이 사과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인력에 대한 어떤 생각에 잠기게 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세심한 과학자였던 뉴턴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일화라 생각된다. 1667년, 고향에서 인력에 관한 생각들에 잠길 수 있었던 뉴턴은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대학으로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1669년에는 스승인 바로우 교수의 자리를 이어받아 교수가 되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668년, 더욱 발전된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여 주목을 끈 그는 이것을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1678년, 드디어 그는 그의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알리게 되는 『원리』(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 naturalis principia mathemetica)라는 책을 그의 친구 레버의 도움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의 출판에는 부자였던 위대한 크리스천과학자 보일의 도움이 있었다는 견해도 전해지고 있다. 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라틴어로 쓰여졌다. 초판 이후 1712년 증보 개정판, 그리고 1726년 제3판이 출간되었다. 제 1편은 운동에 관한 일반적 명제를 논술하였고, 제 2편은 매질 속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제3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궤도 등의 행성의 운동을 증명하고 있다. 말이 자연철학이지 사실 자연철학(“Phisica")의 수학적 원리이므로 수학적 서술이 많아 수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볼 수 있으나 일반인들은 대단히 난해하게 느껴지는 책이다(베를린 공대에서 수학을 배우는 필자의 장녀는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고 하나 대학원에서 공학을 배우고 목사가 된 필자가 보기에 이해가 그리 간단한 책은 아니다). 아무튼 뉴턴은 그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개발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기하학적인 증명 방법을 사용하고 미적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력을 고려해서라고 한다.

 

이후 뉴턴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으며,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때에는 대학의 대표로 국회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과학에 대한 집념은 여전하여 달의 이론을 연구하고 열전도의 법칙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도한 일들로 인해 잠시 정신적 우울증을 겪기도 했던 뉴턴은 1696년에는 화폐를 만드는 조폐국의 장관을 맡아 화폐의 개량을 주도하기도 했다. 마침내 뉴턴은 1703년, 국왕이 설립한 자연과학자들의 모임인 “왕립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우리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Nullius in Verva). 협회의 모토였다. 이 얼마나 통쾌한 말인가! 대학과 과학 연구까지 국가가 통제하는 노벨과학상 수상자 한명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경직된 국가 체제와 교육 간섭 정책과 비교된다. 과학적 탐구를 자극한 이 왕립 협회는 결국 영국에서 위대한 과학자들이 쏟아지게 만들어 위대한 영국을 만든 원동력을 만들어내었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5)이 뉴턴은 “지금까지 태어난 가장 위대하고 유례없는 천재였다”고 한 것이나 호킹(Stphen Hawking)조차 뉴턴은 “과학사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거인”이라고 한 것은 뉴턴의 과학사적 위치를 알 수 있게 한다. 호킹은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가졌던 직책인 루카스좌 교수(Lucasian professor)를 역임하였다.

 

뉴턴은 연구와 실험 결과 도출을 위해 잠잘 시간이나 여가 시간조차 아까워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독신으로 삶을 마감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나는 그가 승마, 산책, 공굴리기 등 운동이나 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연구에 사용하지 않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뉴턴의 필기 도우미가 했다는 이 말은 뉴턴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뉴턴이 식사를 자기 방으로 가져오게 하고 식사를 했는지 그 자체를 자주 잊어버렸었다는 말은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니다. 이렇게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과학자로서,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명성도 얻은 뉴턴이었지만, 과학의 세계만이 결코 그의 삶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뉴턴의 신앙

 

그는 영국 교회의 회원으로 예배에 참석하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생전에 과학보다도 성경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헌금하는 일, 런던 지역에 50개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일에 봉사하는 등 특별한 교회 사역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또한 성경적인 주제에 관해 약 130만 자에 달하는 자필 유고를 남겼는데, 이것은 그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난 1936년에야 경매장에 나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히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연구 시간 부족을 아까워했던 그가 며칠 혹은 몇 주간 오직 성경만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보내기도 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최근 과학사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은 뉴턴의 과학 업적에 대한 평가를 넘어 뉴턴이 왜 그렇게 성경 연구에 집중하였던 것인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유인력을 설명한 『원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혜성들의 아름다운 체계는 이지적이고 능력 있는 분의 계획과 주관 아래에서만이 가능하다. 이 분은 세계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분은 주 하나님으로 불린다.” “하나님은 영원히 존속하며 어디든지 존재한다.”

 

이 같은 그의 믿음의 고백 때문에 알렉산더 포프라는 학자는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났도다.”

 

 

뉴턴의 신앙적 열정- 이신론자라는 비판에 대해

 

노년이 되어서도 그는 마지막 몇 년 동안을 달의 운동에 대하여 연구하고 『원리』의 개정을 위해 작업을 계속하는 변함없는 학자였으며, 그가 가장 사랑하는 공부인 성경 연구에 열중하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신앙관이나 과학관이 많이 비판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글이 이신론(Deism)적 경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본 글에서 그 부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들은 오늘의 잣대로 그를 바라보면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물리적 공간 안에서 누구든지 역사적 제한성을 가진다. 코페르니쿠스 이전 어떤 사람이 지동설을 확실하게 알았으며, 뉴턴 이전 누가 만유인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겠는가. 갈릴레이 이전 목성에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달(위성)들이 목성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그걸 모르고 성경을 잘못 이해했으니 모두 지옥 심판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늘 어느 부분에서는 미숙하기 마련이다. 천재 뉴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리가 너무 교리의 틀을 가지고 사람들을 재단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초대 교부 오리겐도 이단이요 루터도 칼빈도 요한 웨슬리도 이단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다면 천국 문에 들어간 사람들을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정죄를 위한 정죄가 소원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신학에 익숙지 않은 과학자들을 신학적 비평하기 위한 게 아님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 글은 신학 비평이 아니라 단순히 인류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과학자의 학문과 신앙을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밝혀둔다.

 

 

뉴턴의 신앙적 겸손과 노년의 삶

 

그가 얼마나 성경 연구에 열중하였던지 한번은 뉴턴의 친구가 그를 찾아가 다시 과학계로 돌아와서 과학에 전념하여 인류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남기기를 권유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내가 왕이신 하나님의 사역에 손을 대었다면 나는 이제 그 일들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는 것이라네.”

 

여러분들은 혹시 왕의 사역에 얼마나 정성을 바치고 있는가? 뉴턴처럼 뜨겁고 참 된 열정이 있는가? 뉴턴은 일생 동안 사도 바울처럼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여 년간 놀랍도록 건강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뉴턴에게도 하나님의 섭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이작 뉴턴은 1727년 3월 20일,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그는 웨스트민스터 묘지에 묻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뉴턴은 물리학과 수학 분야의 인류 최고 과학자의 명예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삶을 살다 간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대하여 항상 겸손하였던 것이다.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뉴턴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있어 나 자신은, 진리의 큰 바다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대로 아득히 놓여 있는 바닷가에서 뛰놀면서 좀 더 둥그스름한 조약돌을 찾았거나, 보통 것보다 더 예쁜 조개를 주웠다고 좋아하는 작은 소년에 불과합니다.”

 

진리의 큰 바다, 아득히 놓인 바닷가를 지으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인류 최고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뉴턴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뉴턴은 누구보다 위대한 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얼마나 부족하며 제한적이며 미천하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떠한가?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