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교수, 김해(금관) 가야의 기독교 국가설에 대한 소고
<바른믿음 기고문>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수로왕은 지금의 김해 지역에 나라(금관 가야, 金官伽耶)를 세워 가야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은 먼 아유타국(阿踰陀國) 출신인 것으로 유명하다.
가야 연맹 기독교 전래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주로 김해 가야를 기독교국가로 이해한 조국현 목사의 <가락국기해설>(대구말씀교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명 구지가(龜旨歌)로 알려진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라는 하늘의 음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 설화와 여섯 가야의 건국 설화를 조국현 목사는 ‘구하소서, 구하소서 머리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옵소서 만일에 나타나시지 않으시면 구이거나(불로 심판받음) 먹히옵니다(외세의 침략으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가락국기의 모든 내용들을 기독교와 관련 지어 해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단히 정교하다. 가락국기 전체 구조를 가야는 정말 기독교 국가였다고 만들어버린다. 가야국명은 “간나라”가 되어 “큰나라”-“신의 나라”로 해석 된다. 수로왕과 아유타국 공주의 결혼은 신의 뜻이었고 아유타국은 도마가 선교한 인도의 국가로 해석된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맞기 전부터 기독교와 관계된 사람으로 모태 신앙인이었고 김수로왕릉 정문에 있는 신어문(神魚紋) 즉 쌍어문(雙魚紋)도 기독교 문양이요 “가락”이라는 이름조차 허 황후 모국인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의미로 읽힌다. “파사 석탑”이나 금관가야 제 8대왕 질지왕이 주후 452년 건립했다는 “왕후사”도 불교적 유물이 아니라 기독교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는 본래 고려 제 11대 임금인 문종조(文宗朝) 1075-1084년에 편찬된 가야의 역사책으로 저자는 금관주(金官州:김해지방)의 지사(知事, 지금의 지방장관)였던 문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일부 내용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다.
그리 길지 않은 “가락국기” 안에는 개벽한 이래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고 군신의 호칭도 없고 그저 간(干)으로 불린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력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오천간(五天干)ㆍ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 아래 백성들이 모두 10,000호에 75,000명이었다는 진술로부터 시작되어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주후 42년) 있었던 일명 구지가로 알려진 위에서도 소개한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 설화와 여섯 가야의 건국, 가락국 수도와 궁궐 건립, 수로왕과 신라 탈해왕(脫解尼師今)과의 다툼 이야기, 아유타국 공주 출신 허황옥(許黃玉)과의 혼인과 아유타국에서 함께 온 사람들과 혼수품, 계림(雞林, 신라) 등의 직제를 모방하여 촌스러운 관제의 정비, 수로왕릉과 사당(祠堂)에 얽힌 설화,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 김해지방의 연혁, 수로왕묘(廟)에 할당된 토지 결수, 왕후사(王后寺) 창건 관련 내용, 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마지막 구형왕(仇衡王)까지의 왕력(王歷), 신라에 투항한 연대에 대한 고증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락국과 관련된 이 같은 내용을 과연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어떤 문제가 있을까?
가야 기독교설의 난제
첫째, 가야 기독교설의 난제는 <가락국기> 내용이 대부분 설화적이고 후대에 조작된 흔적이 많아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기에 문제점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삼국과 달리 가락국은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 왕위계승이 부자상속이었다. 이것은 당시 다른 삼국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그대로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가라비문>에 보면 전기 5왕 당시 국구(國舅) 즉 왕비의 혈족들은 김해가라 특유의 관명(천부경, 종정감, 아궁아간, 사농경 등)인 반면, 후기 5왕 시절 국구의 관명은 신라 관명(대아간, 각간, 사간, 분질수 등)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가야가 신라 박씨 족의 갈문왕제가 아닌 거란족의 국구장제를 따르는 스키타이 계열(즉 흉노 계열)이 지도층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고(금관, 동복, 철복의 발굴 등도 흉노적 성격이 강하다) 또 한 가지는 김해가라의 권력구조가 전·후기 사이 무슨 이유인 지 분명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김해가야의 전·후기 역사 단절 기간은 상당히 길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어떤 식으로든 연장 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때 수로왕의 재위 기간도 157년으로 대폭 늘어났다. 후기 김해가야는 자신들의 전기 역사 멸망의 단절기를 숨기고자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늘이는 동시에 시조 신화를 후기 가야 시대에 맞추어 당연히 각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해가야 전·후기 공백기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영토 확장 시기, 가야 권력층에 큰 변고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것은 후기 가야의 친 백제적 성격을 설명해줄 수 있다. 즉 근초고왕의 영토 확장 이후 가야 지역은 친 백제의 담로 지역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종교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최소한 국가적 변고 속 가야가 500년 동안 기독교 국가였다는 비약은 있을 수 없다.
둘째, 만일 허황후가 정말 인도 출신이라면 신하들의 이름도 당연히 인도식이어야 옳다. 그런데 가락국기에 보이는 허황후가 데리고 온 신하들인 신보(申輔)·조광(趙匡) 등은 고려시대 이후에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성씨들이다. 이 같은 문헌사적 기록들은 허황후의 본가가 과연 인도인지 아니면 중국 땅인지 아니면 일본 등 제 3의 장소인지 학자들 간에 최근까지도 여전히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도마 기독교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더구나 『가락김씨선원세보』에는 허황후의 남동생 보옥선인(寶玉仙人)이 허 황후를 따라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유화상(長遊和尙) 또는 보옥선사라고도 불리는 이 허황후의 동생에 대해 위 세보는 그가 우리나라 최초 불교 포교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장유화상기적비(長遊和尙紀蹟碑)에도 “화상의 성은 허씨요 이름은 보옥이니 아유타국 임금의 아들이라, 만년에 가락의 왕자 7명과 방장산(方丈山)으로 들어가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 하동군 칠불암이 그 터”라 하여 허황후 남매가 불교적 인물들이었음을 시사한다. 보옥선인이라는 이름에서 장유화상이 도가적 성향의 인물에서 중국에 전파된 불교를 접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그가 보옥선사라고도 불렸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기독교적 인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셋째, 김해가라는 주후 42년에 개국한 나라이다. 공식적 세계 최초 기독교 국가는 아라랏산 근처에 있던 아르메니아였다.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 다대오가 선교한 나라였던 아르메니아가 로마보다도 먼저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주후 301년경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아르메니아보다도 260년 먼저인 주후 42년 이미 김수로왕이 기독교인이 되어 사도 도마의 선교에 의해 복음화 된 인도 아유타 왕국의 공주를 배필로 맞았다는 주장은 전혀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적 비약이다.
넷째, 가야 유적의 문제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보면 과거 수로왕릉 묘역 안에 사당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 시대 초기에는 그런 사당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세종실록》 20년 10월 기묘조에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선(李宣)은 보고하기를 자신이 “김해에 이르러 읍성 서쪽 길옆을 살펴보았는데, 가락 시조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서,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기르기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세종대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즉 쌍어문을 기독교 유물로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한 해석법이 아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적 색채가 강한 가락국기
가락국기가 기록된 삼국유사는 승려인 일연이 저술한 것처럼 기독교적 근거보다는 오히려 불교적 각색의 증거가 나타난다. 또한 가야 연맹체가 신라의 영향보다 오히려 가야 연맹 중기에 백제의 담로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백제의 영향을 받은 후기 가야의 불교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허 황후의 영향과 백제 담로의 영향을 받은 후기 가야는 기독교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색채가 있었다면 불교적 성격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 멸망의 미스터리
최근 대통령이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약간 뜬금없는 얘기일 수 있는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도 넣어달라고 청원했다. 문 대통령은 “고대사가 삼국사 이후부터 다뤄지다 보니 연구가 제대로 안된 측면이 있고 특히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 그런 면이 있다”며 “보통은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북부 함창)까지 미치는 역사들로 생각을 많이 하지만 광양만, 순천만,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은 아주 넓었던 역사”라면서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연구와 발굴 성과에 의하면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전성기 가야의 영역은 오늘날 전남의 순천만과 전북의 남원과 장수 지역에까지 이르렀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의 특별한 당부 덕분(?) 때문인지 가야사 복원에 대한 지원이 늘면서 가야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발굴 성과도 급격하게 눈에 띠고 있다.
그런데 문헌 근거가 빈약한 가야사 가운데서도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이미 밝힌 바 있듯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달리 가락국은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 왕위를 부자가 상속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다른 삼국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그대로 수긍하기가 쉽지 않은 기록이다. 특히 가야가 멸망한 다음부터 김 씨(金氏)를 왕실의 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기록은 주로 수로 왕 후손이라 자처하는 김해 김 씨의 족보를 참조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 왕들의 평균 재위 연수가 신라 약 18년, 고구려 약 25년, 백제 약 22년 인 데 비해 김해가라는 수로 왕 즉위년인 주후 42년부터 제10대 왕 구형 왕 562년까지 평균 52.1년이나 된다. 그런데 전기(前期) 5왕의 재위 기간이 총 365년, 평균 73년인 데 비해 후기 5왕은 총 155년, 평균 31년이다.
<가라비문>에 보면 전기 5왕 당시 국구(國舅, 왕비의 아버지), 즉 왕비의 혈족들은 김해가라 특유의 관명인 반면, 후기 5왕 시절 국구의 관명은 신라의 것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초기 가야가 신라 박 씨 족의 갈문왕제가 아닌, 거란족의 국구장제를 따르는 스키타이 계열(즉 흉노 계열)이 지도층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야 영역에서 금관, 동복, 철복 등이 발굴된 것도 가야가 북방계(흉노)의 흔적이 강하게 박혀 있는 정권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한 가지는 김해가라의 권력구조에 전·후기 사이 무슨 이유인지 분명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김해가야의 전·후기 역사 단절 기간은 상당히 길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어떤 식으로든 연장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때 수로왕의 재위 기간도 157년으로 대폭 늘어났다. 후기 김해가야는 자신들의 전기 역사 멸망의 단절기를 숨기고자 전기(前期) 5왕들의 재위 기간을 늘이는 동시에 시조 신화를 후기 가야 시대에 맞추어 당연히 각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해가야 전·후기 공백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영토 확장 시기, 가야 권력층에 큰 변고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것은 후기 가야가 친 백제 성향의 정권이었던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즉 근초고왕의 영토 확장 이후 가야 지역은 백제 특유의 담로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하게 친 백제 영향권 아래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가야의 1차 붕괴는 백제 근초고왕 시기요 2차 붕괴는 신라로 인한 멸망이었을 것이다.
가야 멸망 후 가야인들이 내륙 중원 땅에 나타난 이유는?
삼국 시대부터 중원(충주)땅은 늘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통일신라 중앙탑의 존재가 그것을 증거 한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제 2의 도시(국원성)였고, 통일 신라 시대에도 신라 제 2의 도시(중원경)로서 중심적 역할을 했고, 고려시대에도 충주 유씨(劉氏) 유긍달의 딸은 고려 태조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가 되어 고려 초기 중흥을 이끈 광종(光宗)뿐 아니라 태자 왕태(王泰), 훗날의 정종(定宗)과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증통국사(證通國師) 등의 다섯 왕자와 낙랑(樂浪)과 흥방(興芳) 두 공주를 낳는다.
충주는 호족 유긍달 가문의 세거지요 8목의 하나로서 교통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수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민관군과 노비와 민중들이 합세하여 세계 무적 몽골기병들을 강하게 물리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유일한 고장도 충주였다. 조선시대에도 충주 고을은 팔도 전국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았던 고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뿐 아니라 을미의병의 격전지로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한 고장이기도 했다.
일제와 충주 사이의 이 같은 역사적 구원(舊怨) 때문이었을까? 일제는 충주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을 핑계로 충주 읍성을 전략적으로 해체해버리고 도청 소재지도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청주로 전격 이전해버리면서 충주 고을을 고사시키기 시작한다. 충주 100년 침체의 시작이었다. 주변 20개 군현을 다스렸던 곳으로 경기도 이천, 여주와 강원도 영월, 정선 등 그 영향력이 상당하였던 내륙의 이 중심도시는 그렇게 이제는 조용한 도시로 바뀌어버렸다.
이렇게 늘 한반도의 중심 도시였던 통일신라 중원경에 가야 사람들이 등장한 적이 있다. 무슨 이유였을까? 충주 사람들이 자랑하는 역사 속 명현 5인 가운데 3인이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가운데 2인이 놀랍게도 가야와 관련성이 있다. 왜 가야인들이 오늘날 가파른 소백산맥의 계립령(오늘날의 조령)을 넘어 충주까지 이동해 온 것일까? 더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충주는 본래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다가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두었다는 임나일본부의 그 임나가 지금의 가야 땅이 아니라 내륙 충주에 있었다니,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해석하는 데 고민이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우륵은 본래 가야국 궁중 악사였는데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화하고, 진흥왕은 그를 국원(충주)에서 편안히 살게 해주었고 551년 진흥왕이 낭성에 갔을 때 우륵과 제자 니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흥왕은 다음 해 대나마 법지, 계고와 대사 만덕을 보내 업을 전수하게 하니 우륵이 그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금(琴)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의 한 사람이다.
신라 3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던 강수(强首)는 중원경의 사량 사람인데 부친은 석체 나마였다. 태종무열왕 때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물었고 강수는 한번 보고 해석하여 설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강수가 중원땅 부곡(釜谷)의 풀무장이 딸과 야합하였고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답설인귀서」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강수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강수의 원적이 어쩌면 가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가야와 임나와 중원(충주)은 도대체 어떤 커넥션이 있었던 것일까? 그 미스터리를 푸는 작업은 그리 쉽지 않다. 앞으로 관련 학자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실마리는 알 수 있다.
첫째 신라는 멸망한 국가인 가야 유민들의 분산 작업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해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주 세력들을 충주 중원경으로 이주 시켰음을 암시한다. 당시 중원에는 급격한 변혁의 분위기가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신라에서 온 귀족들 자제들과 가야 유민들 그리고 토착민들이 어우러지면서 급격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을 것이다.
지금도 그 흔적을 보여주는 집단 묘지들이 루암리 등에 남아있다. 충주를 배경으로 한 우륵과 강수와 충주의 관할권인 진천 출신의 가야 왕족 김유신 가문, 그리고 천하 명필 김생 등이 중원 땅을 중심으로 활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때 정말로 가야가 멸망한 기독교 국가였다면 중원 땅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좋은 피난처로서의 산악지역과 중국과 이어지는 수로를 가진 천혜의 땅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둘째 가야인은 해양을 기반으로 발전한 연맹체였다. 가야인들은 낙동강과 황강과 남해 바다를 통해 일본 열도, 호남의 뱃길을 오갔고 멀리 중국과도 끝없이 교류하였다. 중원은 한반도 내륙에서 중국 당나라로 가는 남한강 뱃길의 시작점이었다. 가야 연맹체의 멸망으로 바닷길이 끊겼던 가야인들은 중원 땅에 들어와서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들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가야가 정말 기독교 국가였다면 중원의 뱃길은 당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의 커넥션을 가능케 하는 요소였다. 기독교국가가 아니었더라도 뱃길로 복음을 수용한 가야의 뱃사람들이 있었다면 신라의 왕경 경주와 가까운 멸망한 가야땅보다는 사민정책을 따라 기꺼이 서해바다로 나가는 뱃길을 가진 충주(중원경) 지역으로 옮겨왔을 가능성이 있다. 강변과 천변은 고대 취락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중원에는 충주천, 요도천 등 다양한 하천들이 남한강으로 유입되며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탄금대 합수머리가 있다. 중원의 선사시대 유적이 목행, 동량의 하천과 용교, 가금, 금가, 단월, 앙성, 산척, 소태, 주덕, 이류, 신니, 칠금, 호암, 용탄, 중앙탑 등 하천과 강 주변 구릉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발굴, 수습되고 있는 것은 고대 중원지역의 취락이 어떤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원 고을에 노을이 지면 강과 하천을 따라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는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지형적 조건은 만일 가야 기독교인들이 정말 존재했다면 수원(水原)이 풍부한 중원은 고대 기독교인들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그 어느 도시보다 적합한 요소들을 품은 도시였다.
셋째 놀랍게도 중원과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일찌감치 철 산업이 발달한 두 곳이었다. 고대 중원과 가야 지역은 마치 오늘날로 말하면 종합제철소와 실리콘 밸리를 가진 지역이었다. 3한 시대부터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가야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철산지와 제철 관련 장인들을 확보하는 일은 그 어느 일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철은 화폐 대용으로도 쓰였고 무기와 농기구와 장수의 갑옷과 투구에 쓰였다. 가야는 신라와 달리 왜(倭)에 철을 수출하던 당대 첨단국가였고 중원에는 이류면 일대, 가금면 창동 일대, 노은면 일대, 소태면 야동 일대 등에 무수히 많은 제철지가 있었다.
고려 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에 보면 중원과 해주의 철은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철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고려 시대까지도 중원 일대에는 대규모 철산지가 널려 있었다는 증거다. 중원에는 철기 제작을 위한 산림도 풍부하였다. 중원의 이들 고려 다인철소(多仁鐵所)의 장인들은 민관군, 노비, 민초들과 힘을 합쳐 세계를 휩쓴 몽골 기병들과 맞서 몽골 기병들에게 뼈아픈 세계 최초 패배를 안긴 장본인들이 되었다. 충주박물관 팀에 의하면 이류면 지역에서만 무려 41 군데의 야철지(冶鐵址)가 확인되고 있다. 대문장가 강수가 부곡(釜谷)의 대장간 집 딸과 혼인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부곡이라는 지명 자체가 가마솥(釜)으로 넘쳐나던 제철단지를 연상케 한다.
이 가마(釜)라는 말은 우리말 그대로 일본 열도에 남아있다. 백제왕이 열도에 칠지도를 선물한 것도 예사롭지가 않다. 일본이 아끼는 보물 칠지도는 분명 중원땅(진천 포함) 어느 야철 장인의 작품이었음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탄금대 주변에서 야철 가마 흔적이 속속 발굴되고 있어 그 성과가 주목된다. 신라는 분명 가야의 철기 장인들을 철이 풍부한 중원 지역으로 사민하였다. 예수님이 복음을 주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와 납달리 평민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전했던 것을 보면 복음은 가야 왕가보다 가야의 민초들에게 더 깊이 뿌리박혀 끈질기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이 중원 땅은 만일 정말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소통의 뱃길과 핍박을 피해 언제든지 피신할 수 있는 산악 지형과 생명 유지의 젖줄인 강과 하천을 따라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다양한 지류들의 존재와 생계를 위해 철과 관련된 다양한 첨단 직업들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던 하늘이 베푼 천혜의 땅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중원 땅에 정말 가야 기독교 흔적이 있는가?
가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었다는 주장과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기독교계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주장을 말한다.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김해가라(금관가야)는 주후 42년에 개국했다. 공식적 세계 최초 기독교 국가는 아라랏 산 근처에 있던 아르메니아였다.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 다대오가 선교한 나라였던 아르메니아가 로마보다도 먼저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주후 301년경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아르메니아보다도 260년 먼저인 주후 42년 이미 김수로 왕이 기독교인이 되어, 사도 도마의 선교에 의해 복음화 된 인도 아유타 왕국의 공주를 배필로 맞았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야연맹체가 집단적 친기독교 종교국가였다면 그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가야 연맹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기독교는 창조와 구속 중심의 경전과 예배의 종교다. 문헌과 유적과 유물과 구전 형태로 무수한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과 예배와 기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전승의 편린이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다. 중원 땅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필자는 고향 충주 주변을 샅샅이 수소문해 보았으나 고대 기독교의 흔적은 전혀 찾지를 못하였다. 오히려 중원 지방에는 다른 한반도 지역처럼 다양한 불교문화와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남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비인 충주 중원고구려비에 대해 역사교사였던 유우식 장로가 광개토왕을 기독교인으로 설정하여 1984년 6월 2일 한국미술사학회가 주관한 제 27회 전국역사학대회 한국사부(韓國史部)에서 “중원고구려비와 관련사의 고찰”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유우식 장로는 이 요약 논문에서 환인을 아브라함으로, 환웅을 야곱으로, 호태(好太, 광개토대왕)를 개구리에 비유된 부활신앙으로, 현묘지도(玄妙之道)를 기독교로, 충주 중원의 북쪽(엄정)의 국망산(國望山)을 호태왕(광개토대왕)이 바라본 산으로, 고모루(古牟婁)성을 중원고구려비가 있던 입석 마을 뒷산에 있는 장미산성으로, 신라 매금(寐錦)을 실성(實聖)으로, 실성의 “실”을 성신숭배(기독교신자)의 뜻으로 비정하여 중원 땅이 기독교로 충만했던 땅으로 묘사하였다. 유우식 장로는 “이 논문 발표 도중과 뒤에 참가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유우식 장로는 호태왕은 노객주가 되어 천노(天奴)로 인지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자로서 그의 이름이 담덕(談德)인 것도 그와 같은 이유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유 장로는 고구려와 가야 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기독교가 일찌감치 들어와 정착했다고 보았다.
이 같은 해석은 동의하기 어려운 논리적, 해석적 비약이기도 할 뿐 만아니라 중원 땅에 나타난 가야인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설정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멸망한 가야의 유민들이 쏟아져 들어왔던 중원땅에 가야 기독교의 결정적 흔적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임을 밝힌다. 다만 백제가 660년 멸망 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富山昌德의 기록(『日本史中중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은 의미심장하다.
삼국에 도마 기독교가 아닌 네스토리우스의 경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는 외래문화에 상대적으로 문호가 개방된 오늘날로 치면 삼국 중 가장 글로벌화 된 해양 국가요 다문화 국가였다(참조: 한성백제박물관 근초고왕 편) . 중국사서 <수서> 백제전에 보면 백제에는 신라인, 고구려인, 중국인을 비롯하여 왜국인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글로벌화 된 국가일수록 종교에 대해 관대하다. <후기 가야>(후기 5왕 시대)는 백제와 아주 친근한 국가였다. 백제 멸망 당시 일본으로 들어간 백제 기독교인들이 사실이라면 그 속에 가야인 또는 가야 기독교인들이 섞여있었을 개연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이 사실이라면
만일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이 사실이라면 불교적 각색이 훗날 이루어진 것이라 평가하더라도 불교적 각색 이전에 존재하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핍박과 그 시련에 대한 편린(片鱗)이라도 나와야 정상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석가처럼 서방의 어떤 ‘나무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한 한 인물’을 신봉하는 종교가 한 때 가야의 국교였던 적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가야 지방에 있었다는 등의 전형적인 강력한 기독교적 특징을 보여주는 기록이나 구전(口傳)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 구체적인 증거 문헌이나 전승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최근 들어 나타난 고대 가야 기독교 국가설에 대한 일련의 주장들은 그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안쓰러운 해석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한반도 (경북 영주) 사도 도마상’ 진위 논쟁처럼 가락국기에 나타난 기독교적 증거 논쟁도 설령 이들 증거들이 일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유물만 가지고서 검증되는 종교가 아니라 계시의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종교다. 이런 구체적 흔적이 없다. 따라서 가야 기독교설에 나타난 증거라는 것이 설령 어느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양보 하더라도 그것은 정통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앙 집단이라기보다는 이미 변질될 대로 변질된 일그러진 기독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되겠다. 제도권 사학계는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 신중한 연구가 필요하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D.)
조덕영 박사는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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