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앙,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창조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
최근 <한국갤럽>의 통계 조사(2014년 4. 17-5. 2)에 따르면, 창조에 확신이 없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41%나 되며 불교식 해탈을 믿는 개신교인의 비율(43%)도 오히려 불교인들(42%)보다 높게 나와 많은 기독교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심지어 불교의 핵심교리인 윤회설을 믿는 개신교인들의 비율(34%)도 불교인들의 비율(38%)과 별 차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 동안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설교해 왔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필자도 참담한 심정 가운데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사형통 신앙도 좋으나, 이제 한국교회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성경적 바른 신앙과 교리를 전하는 데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 중에서도 바른 창조신앙이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심각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창조에 대해 무엇을 설교해야 할까?
창조신앙의 중요성
창조교리는 성경에서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창조 세상 속에서 인류 구속 사역을 성취·완성하였다. 따라서 창조와 구속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속주 하나님이시므로 이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교회는 중요한 공동선언인 니케아신경과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창조교리는 발전하지 않고 구속교리만 발전해 온 감이 있다. 20세기 들어 구약신학과 교의신학 양편에서 영향력 있는 두 신학자인 구약신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 1901-1971)와 교의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주도한 구속신학의 번영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볼 때 창조 세상(자연)은 늘 구속 은총 앞에 무기력하거나 구속에 종속될 뿐이었다. 이들은 창조신학이 구속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창조와 생명이 전제되지 않고 중심이 되지 않는 구속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없는 하나님나라는 무슨 존재 의미가 있는가. 창조교리를 구속교리에 종속시키려 한 폰 라드에 반대한 구약학자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가 말하듯, “창조교리는 주변적인 것이 아니고 명백하게 근본적인 문제이며, 모든 신학은 특별히 창조를 말하지 않아도 창조신학”이다.
사실 창조를 무시하고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의 시작이 창조요, 인간의 시작도 창조요, 천국도 새 하늘과 새 땅, 곧 재창조의 장소이다. 창조를 떠나서는 구속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신학적 전제를 <복음을 위한 창조신학>이라고 표현하려 한다. 설교자들은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의 이 같은 관계를 바르게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려고 한다.
창조신앙,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첫째, 성경적·복음적 창조신앙을 설교해야 한다.
창조를 믿는 종교는 많다. 설교자는 이신론(理神論), 만유내재신론(萬有內在神論), 유출설(流出說), 범신론(汎神論), 영지주의 창조론 등이 왜 바르지 못한 기원론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바른 복음적·성경적 창조신앙(기독교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성경 창세기 전반부(1-12장)에 계시되어 있는 최소한 다음의 21가지 기원에 대해 명료하게 설교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은 먼저 우주와 생명의 근본(기독교 세계관의 창조)과 관련하여 (1) 우주의 근본(물질과 공간과 시간의 기원), (2) 빛의 기원, (3) 물의 기원, (4) 천체(해, 달, 별)의 기원, (5) 식물의 기원, (6) 동물(새, 물고기, 육상동물)의 기원을 설명한다. 둘째, 인류(기독교 세계관의 타락)와 관련하여 (7) 안식의 기원, (8) 인류의 기원, (9) 죄의 기원, (10) 노동의 기원, (11) 죽음의 기원, (12) 남녀의 기원, (13) 결혼의 기원, (14) 가정의 기원, (15) 살인의 기원, (16) 문명의 기원, (17) 각 종족의 기원, (18) 국가 제도의 기원, (19)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구원(기독교 세계관의 구속)과 관련하여 (20) 히브리 민족의 기원과 (21) 예수를 통한 구속에 대한 약속의 시작을 보여 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차별되는 초월 종교요 진리로서의 21가지 기원 계시(창조신앙)에 대해 설교자는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더불어 성경은 이를 통해 다음의 사실들을 우리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설교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며 인간과 달리 어느 것에도 의존하는 분이 아니다. (2) 창조주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셨고 인간과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1:26-2:25). (3)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창조를 기뻐하셨고 인간 창조를 무척 기뻐하셨다. (4) 창조주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범죄한 인간을 반드시 심판하신다(3:8-24), 6:5-8=대홍수 심판 경고, 11:1-9=바벨탑 사건, 18: 16-19:29=소돔과 고모라 심판). (5) 창조주 하나님은 자비하시다(3:21=가죽 옷 입히신 사건, 4:15=살인자 가인 보호, 6:8=노아에게 베푸신 은혜, 18:32=10인의 의인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심판치 않으시겠다는, 아브라함과의 약속 대화). (6) 창조주 하나님은 권능이 무한하시다(18:14=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 이삭 약속, 26:12-16=이삭에게 백 배의 농사 소출의 은혜를 베푸심, 50:20=요셉을 구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권능의 하나님 등).
둘째, 창조신앙을 설명함에 있어 설교자는 창조·구속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잘 구분해서 설교해야 한다.
창조신앙에 담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비본질적인 것을 구원의 본질처럼 설명하려 들거나,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을 외삽(外揷)하여 단정짓는 성급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은 기독교의 근본(본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외계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창조의 연대는 언제였는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인가 사람인가 등등의 경우에는, 아직 성경과 신학과 과학이 모두 동원이 되어도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종말의 때와 시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일부 증거들에 대해 여전히 여백을 남겨놓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호기심이 참 많은 존재이다. 궁금하기는 하나 이런 것들을 신앙의 궁극적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에도 없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섣부른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성경이 범상치 않은 계시의 문서임을 인지하고 회중들이 더욱 기도와 성경과 신앙의 신비에 대해 도전하고 분발하는 계기로 유도하는 것이 옳다.
셋째,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자연주의의 문제점을 설교해야 한다.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반드시 그 종착역이 무신론적 유물론과 우연주의, 자연주의 진화론 등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설교자로 알려진 고(故)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복음주의는 과학에 있어 자연주의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끔 성경의 진술이 몇 가지 과학적 발견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과학보다 성경의 진술이 참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달리 과학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과학은 늘 가변적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 1902-1994)가 말한 대로 과학은 반증(反證) 가능해야 과학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창조”와 관련하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 가운데 겸손하게 설교해야 한다(벧전 3:15-16).
부족한 인간, 하나님의 위엄!
피조물인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상에 대해 아주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기계공학자도 식품영양화학은 잘 모른다. 식품학자들은 천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 철학자는 생화학을 잘 모르고 생화학자는 문학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창조신앙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공격적으로나 논쟁하듯 설교하지 말아야 하고, 성도들도 진리를 아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우리 인간은 특별 은총(구속)과 자연 은총(창조 은총) 앞에서 여전히 허물투성이의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도 언젠가 거울을 마주 보듯 깨달을 수 있는 그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엄’(Magnalia Dei)을 담대히 선포하라!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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