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윤리학과 창조 신앙의 윤리학
세속 윤리로서의 진화 윤리학과 창조 신앙의 윤리학
©오스트리아 자연사박물관 전시물
1. 세속 윤리로서의 진화 윤리학
현대 세속 과학의 우주 기원과 생명관은 분명 진화론에 주로 그 뿌리와 근거를 두고 있다. 진화론이야말로 설득력 있는 과학의 사실이라는 데 주로 근거를 두고 세속 과학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진화론의 윤리적 입장이 주목된다.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저자들에 따라 다음의 4가지 개념으로 쓰여 진다.
첫 번째 개념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원리를 논리적 외삽(外揷;extrapolation)을 통해 윤리학의 영역으로 가져온 윤리학의 체계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투쟁, 경쟁, 선택, 생존과 멸종의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화의 과정이란 오직 가장 적합한 것만이 가장 잘 살아남는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 체계 안에서 외삽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화론의 생물학적 함축이 방법론적으로 타당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진화론자들은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들(social insects)에게서 나타나는 자기 희생적 이타적 행동이 과연 적자생존 투쟁의 진화 개념과 어떻게 합치되는가를 해밀톤(Hamilton, 1964)의 주장을 예로 든다. 개체 수준에 있어 엄연한 이타주의(利他主義)적인 행동조차 유전자 수준에서 보면 사실상 이기적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되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윤리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 즉 사회적 자각을 통해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부터 시작된다. 이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의 발달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 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성서적 관점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진화는 목적성도 방향성도 없으므로 당연히 도덕성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결국 진화윤리가 다분히 상황 윤리적임을 설명한다.
셋째 개념은 인류 역사를 통한 인간윤리체계의 발달과 연관된다.
여기에는 윤리가 더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이 개념은 사람이 하등한 윤리 의식을 역사를 통해 고등한 윤리로 발달시켜왔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과 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결과한다는 개념과 상치된다.
이 문제에 대해 도킨스(R. Dawkins, 1986)는 진화에 있어 자연선택이란 단순히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시계의 운명과 같다고 본다. 시계공이 맹인이었다면 그 시계는 온전히 고쳐질 수가 없다. 눈먼 시계공 개념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이탈한 지구 전체 운명의 쇠락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진화론은 윤리 체계의 발달이란 그저 진화의 단계에서 생존에 급급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한 윤리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넷째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채택에 적당한 진화 체계의 본질을 강조한다.
사실 이것은 글로 이해된 일반적인 진화론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윤리체계는 규범적 상태로의 윤리 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이며 알 맞는 가치체계와 관련된다. 오직 채택할만하고 적합한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이 4번째 개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화의 개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단순한 진화론적인 진보적 발달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류가 윤리적 체계에 있어 역동적이며 알 맞는 본질을 채택해 왔다는 것 자체에 더 강조를 두고 있다. 즉 이것도 상황적 윤리이다.
2. 창조 신앙의 윤리학
불변의 토대(constant ground)가 없는 진화론적 윤리에 비해 창조론적 윤리는 전혀 다른 체계를 갖는다.
첫째, 모든 윤리적 체계의 시작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두다.
진화론적 윤리가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우연 윤리임에 대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윤리적 체계의 시작을 창조주 하나님께 둔다. 따라서 창조론적 윤리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윤리 체계의 근원으로 본다.
둘째, 모든 물질 창조는 본래 선하다.
진화론적 윤리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도덕의 가치도 만들어왔다고 보는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선하다는데서 출발한다(창 1장). 창세기의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함으로 창조론적 윤리와 가치의 규범의 틀을 제공한다. 특별히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가장 좋은 것으로 일컬어진다.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진화의 투쟁과 적자생존은 아무래도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이란 다분히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권위를 외면하고 컨텍스트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고통에 대해 깊이 연구한 손봉호 박사는 과잉 쾌락은 불필요한 고통을 요구하고 그 고통이 반드시 그 쾌락을 누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과소비가 환경을 오염 시키게 되면 누군가가 그 때문에 병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절제는 자원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윤리적 행위의 기본이다. 여기서 조그마한 절제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정의롭게 바꿀 수 있음을 내다보았다. 적자 생존, 약육 강식의 진화 윤리학에서는 과잉 쾌락이 가져다주는 불필요한 이웃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자원해서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절제의 미학은 전혀 있을 수 없다.
셋째,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
진화론적 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타난다(시 19:1-6).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하였다.
창조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연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요 구현(具顯)이다. 진화론자들이나 진화 윤리학자들이 진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지평 아래에서 해석을 시도한 경우는 전혀 없다.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인류에게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는가!
넷째, 파괴된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두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인간이 역동적으로 필요한 윤리를 채택해왔다고 보는데 비해 창조론적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다분히 상황적인데 비하여 창조론적 윤리학은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인 윤리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창조론적 윤리는 그 회복된 양심의 기준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찾는다(요 1:14).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과 기술을 지구에서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성서 전통이 모든 창조물들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 관심을 갖는 윤리에 크게 공헌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 박사(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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