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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구약

창세기 1장 해석, 과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해석적 문제를 가져왔을까?(창세기 1장,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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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해석, 과학은 어떤 해석적 문제를 가져왔을까?(창세기 1장,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5>)

 

 

창세기 1장 해석, 과학은 어떤 해석적 문제를 가져왔을까?

(창세기 1장,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5>)

 

5. 과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석적 문제를 가져왔다는 것일까?

 

근대 과학이 신앙과 본격적으로 대면한 경우는 아마 우주에 대한 용감한 사색(?)으로 화형 당한 브루너(Giordano Bruno, 1548-1600)의 순교와 교황청과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갈등 그리고 1860년 있었던 과학의 진보를 위한 영국 연합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옥스퍼드 회의에서 일어난 윌버포스(S. Wilberforce, 1805-1873)와 헉슬리(T. Huxley)의 대립을 꼽을 수 있다.

수도사 브루노의 경우

 

먼저 16C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브루노는 나폴리 부근 놀라에서 태어나 1563년 도미니크회에 가입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공부한다. 하지만 B. 텔레지오의 자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고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1576년 수도원을 나와 이탈리아와 스위스, 프랑스, 독일을 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가 영국 런던에서 『무한, 우주와 모든 세계에 대하여』(1584)를 출간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라 우주는 고정된 중심이 없는 끝없는 공간이며 무한한 천체가 운동하는 영역이라고 했다. 또한 철학자로서 그는 사물의 내적 구성으로서의 원리와 외적 힘으로서의 원인을 구별하였다. 우주령(靈)은 무한한 우주의 제 1원인으로서 만물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는 형상으로, 질료(matter)에 형태를 준다고 했다. 브루노가 볼 때 무한한 우주는 바로 이 우주령에 의해 전개되는 신의 발자취였다. 그리고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주사물을 이해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그림자)이라 했다.

 

지금 보면 16C 당시의 앞서간 한 철학자가 충분히 구상해 볼 수 있는 “우주상(想)”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사색은 시대를 앞서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간 그 점이 바로 문제였다. 수도사였던 그는 16세기 후반 태양중심설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한 인물이었으며 우주가 수많은 태양과 행성이 있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여겼다. 그는 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무한히 넓고 그 무한하게 넓은 세상 속에는 지구처럼 생명체가 사는 무수한 별들이 있을 것이라고 16세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을 품은 인물이었다.

로마 중심가 시장 Market at Piazza Campo de'Fiori에 있는 브루노의 동상(by E.S. Cho)

1591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1592년 베네치아에서 제소되었고, 1593년 로마로 송치되어 8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 결국 화형 당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아웃 복싱하듯 “우회”하였으나 브루노는 “파이터”처럼 자기의 주장을 “우회”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순교하였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경우

 

17C의 갈릴레이(1564-1642)는 본래 당시(1623) 교황 우르반(Urbanus) 8세로 선출된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과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다. 갈릴레이는 우르반 8세 아래 좀 더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라는 책을 통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책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갈릴레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갈릴레이와 새 교황을 함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제수잇 교단이 갈릴레이의 라이벌이었던 자기 교단의 천문학자 오자리오 그라시를 내세워 갈릴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과거부터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기는 하였으나 교황이 된 후에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의 하나인 토스카나 공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하던 교황이 그를 정죄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결국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끝났으며 갈릴레이의 예상보다 더 가혹한 선고가 내려졌다. ‘이단 혐의가 농후한’ 중한 이단에 속하는 죄를 범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후 9년 동안 그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당시 우리 나이로 70세 노인이었던 갈릴레이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도 “갈릴레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1987년)에는 갈릴레이가 원자론도 주장하였으며, 교황은 그가 원자론보다는 오히려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지동설 주장 혐의로 재판을 받게 선처를 해주었다는 프랑스의 과학 역사가 레도니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든 것들은 갈릴레이가 얼마나 앞서간 뛰어난 과학자였나 하는 것을 보여주며 성경 해석이 아닌 교회 권위가 어떻게 개인을 압박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무엘 윌버포스와 진화론의 경우

 

19세기의 사무엘 윌버포스는 노예 폐지 운동으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아들로 1829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 받아 교구 사제로 일한 인물이다. 그는 정통교리 옹호자로서 자유주의 주교들과 비국교도들과 성서비판론자들을 공격한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생물학의 이름으로 당시 처음 등장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그를 옹호한 토마스 헉슬리와의 충돌한다. 그만큼 당시 정통교리 수호자(바른 혹은 그른 성경 해석이었다는 의미가 아님)가 볼 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성경과 조화할 수 없는 이론이었으며 충돌은 예견된 결과였다.

 

이 세 경우 모두 교회 기득권 세력과 과학이 특정 해석 부분에 있어 충돌하는 경우였다는 점에서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서도 그 불똥이 반드시 옮겨 붙을 수 있음을 예견한 사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작된 교회와 근대과학의 대면

 

이들 충돌에서 교회는 좀 더 교회와 교리의 정통적 해석을 고수한 반면 근대 과학의 편에서 선 세 측은 과학의 시선으로 교회와 충돌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정치적 힘으로 단기적인 물리적 승리를 거둔 반면, 과학의 편은 후에 사실과 진리의 측면에서 우세승을 거둔 것으로 역사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과학과 교회가 큰 충돌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는 않았다. 근대 과학이 발흥한 영국에서 주요한 과학자들이 대부분 신앙인들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에는 영국의 정통 성직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이 자연 과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 과학의 발달은 왜 문제를 가져왔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위 세 가지 교회와 과학이 대면한 결과에서 보듯,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서도 교회 역사를 통해 내려져 온 전통적 (창세기) 해석 방법이 과연 오늘날 과학 기술의 시대에서도 바른 해석 방법으로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성직자들과 신학자들과 신자들이 대체적으로 수용하는 창세기 해석 방법이 과연 16-17 세기 베이컨과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대변되는 과학 발흥기를 거치며 시작된 과학의 해석과 방법론과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당연히 생겨나게 된 것이다.<계속>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