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교회(church)는 ‘주님에게 속한다’는 의미의 헬라어 ‘퀴리아코스’에서 유래한다. 구약에서는 ‘카할’이 ‘회중의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종교적 대상(대상 30: 23)이나 세속적(렘 26:17)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사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복음에 나타난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으심에 대해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 고백한 것을 기초로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신데 기반한다(마 16:18).
그리고 이 단어는 “한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 18:17)에도 적용되었다. 예수는 친히 교회에 대해 가견적 교회 공동체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늘 미숙한 존재다. 이 나태하고 안일한 존재인 인간이 성숙한 신앙을 유지하는 데 교회는 효과적인 조직이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사도신경 조항을 만들어 성도의 교제(communiosanctorum)를 첨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회의 완전한 의미와 표징
물론 보다 완전한 의미의 교회란 제도적 실체가 아닌 초자연적 실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교회 사역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시키고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협력하여 천상의 새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로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아간다.
이 같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의 본질 안에서 바른 말씀 선포와 성례와 권징을 세 가지 표징으로 삼아왔다.
교회론 속 기독교 신비주의로서의 퀘이커교
그런데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 같은 교회의 본질과 표징을 외면한다. 퀘이커교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로부터 시작된 초기 퀘이커교는 가견적 교회의 배교(딤후 3:1-5)를 통해 외형적 신앙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우주의 내면의 빛(요 1:9-18)만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았다.
당연히 교회의 성례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순결한 내면의 예배에 부적절한 옛 언약의 잔존물이라 하여 배척해버렸다(요 4:24).
교회와 더불어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전가된 의와 전적 부패와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도 모두 부정되었다. 오직 퀘이커 교도만이 “빛의 자녀들”이요 “진리의 친구들”이었다.
다른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보이듯 이들도 자신들만이 특별한 빛을 받은 선민들이요 자신들은 오직 조용한 기도와 참 빛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직접적 은혜의 설교를 체험한 신자들이었다. 이후 보편적 빛의 교리를 찾아 퀘이커들도 분화되었다. 일부는 복음주의자로 돌아선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근본은 교회론을 이탈하여 신비주의적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교회관을 배격하였다면 조지 폭스의 퀘이커교는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관을 뒤집어버리고 멀리 나가버린, 결국 교회론으로부터 비롯된 신비주의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거듭난 성도라도 하나님 앞에 여전한 죄인의 성품을 지닌다(simul justus et peccator).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인 교회가 여전히 완전한 모습을 지니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고 교회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이 아니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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