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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성경 관련 변증(질의 응답)

신학은 왜 필요한가(신학의 이해 1., 신학의 중요성과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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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신학 강의 첫 수업을 위한 신학 기초 자료입니다.
 
신학의 중요성과 필요성 이해(기독교 신학 서론)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Ⅰ. 神學은 왜 重要하고 必要한가?(Who needs theology? S. Grenz)

1. 신학이란 무엇인가
1) theology=> "theos"(神)+ "logos"(理性, 知慧, 思考)
2) 文字的으로 神學은=> 모든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
3) 모든 사람은 신학자다(Everyone is a theologian)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전제(前提) 가운데 살아간다(“무신론자는 무신론을 전제한 신학자”).
2. 신학은 왜 중요한가
1) 신학과 신학자들에 대한 편견

"Happy is the Christian who has never met a theologian!"
2) 기독교역사는 반성경적 사상과 바른 신학과의 싸움(다른 신학과 바른 신학의 싸움)
3) 신학 부재(不在)의 결과
“기준이 사라지고 대혼란에 빠진 한국교회”
“바른 신학(조직신학)의 부재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목회자와 신자들”
“겉으로는 부흥하였으나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한 근본적 이유는 바른 신학의 부재!”
4) 신학은 위대한 기독 사상가들(사도 바울, 베드로,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칼빈, 칼 바르트 등)과의 성경공부(알리스터 맥그라스)
5) 신학은 하나님과 바르게 이야기하기(신학보다 보람 있고 귀한 학문은 없다!)

3. 신학은 다 같은 신학이 아니다(Not all theologies are equal!)
1) 모든 신학이 다 같은 신학은 아니다.
2) 정맥과 속맥(바둑):
“어떤 길은 사람들 보기에 옳으나 필경은 패망의 길!"
3) 그럼 어떤 신학을 해야 하나?
“참된(좋은) 세계관(진, 선, 미, 지속성)과 나쁜 세계관”이 있는 것처럼,
신학도 “좋은 신학과 나쁜 신학, 바른 신학과 거짓 신학, 미숙한 신학, 악한 신학” 등이 있다! ​
3) 신학의 스펙트럼(스탠리 그랜츠)
-> 民俗神學folk theology : 성경(Norma Normans규범시켜 주는 규범, Norma absoluta, Norma causativa, 계시) 밖 신학
-> 平信徒神學lay theology : 기본적 교리(Norma normata, 규범되어진 규범)
-> 牧會神學ministerial // : 신학도들의 학문과 신학(성도 교육 가능 수준)
-> 專門神學professional // : 신학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의 신학
-> 學術神學academic // : 사유화하고 철학화 된 수준의 신학
4) 바르게 믿어야 하는 이유(하나님을 기쁘시게- 평생 젖만 먹을 것인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과 지나치게 유아적이고 유치한 신앙을 구별할 것"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줄 아는 장성한 자가 되어야"(히 5:12-14)
"바르게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4. 신학과 신학자들의 도구
1) 啓示(revelatio)
“두 가지 책(冊)”(一般啓示와 特別啓示인 성경)
(1) 계시는 하나님이 창조, 역사, 인간의 양심과 성경 등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뜻을 현현(顯現)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작정을 바르게 인간에게 전달하고 알리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히브리어 “깔라” 관찰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함(창 35:7)
(3) 헬라어:*아포카룹시스=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이다, 베일을 벗다.
*파네로시스=뚜껑을 열다
(4) 누구에게?(시 103:7)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
(5)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
하나님 자신의 영광, 능력, 속성, 성품, 의지, 뜻, 목적 등
(6)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욥 11:7-8절, 전능자를 어찌 능히 알까?, 롬 11:33-34, 부요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 측량치 못할 판단, 찾지 못할 길)
(7) 계시는 성부 하나님(Deus Pater)에게서 유래(origo)하나 성자 하나님 곧 하나님의 로고스(Verbum Dei)를 통해서 옵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처럼 <아들이 곧 계시와 일치한다>고 보면 안 됩니다. 이건 좀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계시가 곧 아들이 아니라 칼빈이 말한대로 <성령께서 우리가 계시를 수납할 수 있게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계시를 이해케 하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8) 계시 종류
첫째 자연(일반계시):
하나님은 만드신 세상과 역사와 사람의 양심을 통해 자신을 증거하신다(시 19:1, 롬 1:20). 그러나 일반계시에는 한계가 있다(인류 범죄로 인한 두 가지 결과=롬 1:21-24). 자연 안에서 구속에 이르는 참 된 진리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도 계시이기는 하나 불완전 한 것입니다. 신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같은 과학적 변증이 기독교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둘째 특별계시:
(a) 현현의 방법으로: 불, 연기, 구름 속(출 33:9, 시 99:7,), 그룹 사이(시 80:1), 폭풍우 가운데(욥 33:9, 시 99:7), 세미한 음성,성육신(요 1:1-12,1:14,골 1:19,2:9
(b) 예언으로: 꿈, 환상, 제비뽑기,우림과 둠밈(민 12:5-7), 예언의 정의(암 3:7-8, 벧후 1:20-21)
(c) 이적으로: 예언의 말씀 확증(막 16:20, 행 14:3), 성육신 사건(사 7:14, 마 1:23).
(d) 성경으로 충분
특별계시에는 자연계시에서 불충분한 <구원의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범죄한 인류를 죄의 세력에서 구출하여 신체와 영혼의 전인격적(지,정,의)인 새로운 피조물로의 재창조하시려는데 있습니다.
*계시와 영감(Inspiration)과 조명(Illumination)의 차이와 관계의 중요성(What과 How와 Why의 관계):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전하시는 행위 자체와 내용을 말하고, 영감은 그 계시를 권위있게 전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사람의 인격을 초자연적으로 주장하시는 사실을 가리킵니다(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여 계시하심). 아무리 계시가 있고 영감의 말씀(성경)이 있어도 조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2:6-16). 조명은 성경을 읽는 인간의 마음을 <성령>께서 밝히 비추시는 신비로운 사역을 말합니다.
아이에게 미적분 책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영감된 성경 책도 단순히 역사책, 아포리즘을 담은 책, 아름다운 시편 정도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2) 聖經(Scriptura sacra):
성경은 기독교 지식의 유일한 원천(fons unica)이요 규범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 규범(fidei et vitae norma unica ad salutem)입니다. 즉 Sola Scriptura.
3) 敎理(dogma):
"symbola", 함께 고백하는 것
성경은 ‘노르마 노만스’(‘norma normans’= 규범 시켜 주는 규범, norma absoluta, norma causativa)이고 교리나 신조는 ‘노르마 노마타’(norma normata= 규범 되어 지는 규범)
4) 믿음(fides):
인간의 측면에서 중요!(sola fide, solus Christus)
5) 理性(ratio):
“重生(renata)한 理性이 必要”
“人格(知-情-意)의 未熟性”
客觀主義= “共通 中心”--> 과학, 경험
主觀主義= “나 中心”--> 신비주의
5. 신학에 대한 오해
1) 신학이 기쁨을 빼앗아간다?
역사적으로 참된 신학자 가운데 신학 때문에 기쁨을 상실했다는 사람이 전혀 없음을 기억하라!
오히려 나쁜 신학이야말로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간다.
2) 신학은 신자를 분열시킨다?
참된 분리라면 분리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마 10:34).
반대로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후 11:14)
성령은 성령의 신학 안에서 성도를 하나 되게 하고 오히려 나쁜 신학, 거짓 신학이 신자를 분열시킨다.
“가능한 화평을, 그러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를!”(마르틴 루터)
3) 신학은 지나치게 사변적(思辨的)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즐긴다.
불신자들에게도 있는 책 읽는 기쁨!
그리스도인들도 신학과 경건 서적에서 불신자와 차원이 다른 사변(思辨)의 따분하고 지루함이 아닌 기쁨을 느낄 수 있다(보기: 칼빈이나 마르틴 루터의 책을 제대로 읽어볼 것).
4) 신학은 멈추어진 따분한 학문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하지만 신학의 해석과 적용은 무궁무진 하다.
6. 역사에서 찾는 신학의 중요성(이슈)의 보기
1) 정통(바른 신학)과 나쁜 신학(가짜 신학)의 갈림길
(1) 靈知主義 논쟁 -> 최초 조직신학자 Irenaeus가 저지
(2) 삼위일체 논쟁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세 위격이면서 한 실체인 문제)
첫째 본질(일체)에 대한 Arius(類似本質)-Athanasius(同一本質) 논쟁:
둘째 위격(삼위)에 대한 갑바도기아 교부들(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가이사랴의 바실)의 역할
<페리코레시스>(co-inherence, 공동내재, 상호상통, 상호관통)
<專有, appropriation>: 로고스, 보혜사, 은사-열매(성령의 사역)
<Per Fillium>(성자를 통하여)-> Filioque(그리고 성자로부터)
Ⅱ. 16C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근대 과학의 태동이 꿈틀대던 시대)

칼빈 500주년 기념(서울교회당, 2009)
요한 칼빈은 자연 과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칼빈이 현대 과학 기술시대를 산다면 어떤 신학적 해석과 입장을 취하였을까? 본 논고의 목적은 21세기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요 신학자인 칼빈을 통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데 있다.

인류의 과학적 사고에 혁명이 일어난 것은 16-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 시대를 살다간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 1473-1543)로부터 뉴턴(Issac Newton, 1642-1727)에 이르는 동안 이룩된 고전적 근대 과학(classical-modern science)은 고대 및 중세 과학의 대부분을 무효화시켰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6 세기의 초·중반을 살다간 인물들이다. 루터와 칼빈은 근대 과학을 향해 꿈틀거리며 역동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자연 과학의 바람을 결코 피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던 시대를 살았다. 비록 자연과학도는 아니었으나 당대 영적 지성의 상징적 인물들이었던 루터와 칼빈은 과학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신앙적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칼빈의 경우 신앙인의 입장에서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다.
과학이 꿈틀대던 루터와 칼빈 시대는 천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였다. 루터와 칼빈은 과연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 쿠페르니쿠스의 태양계 중심설은 신학과 종교와 자연과학의 긴장과 충돌을 상징한다. 당시는 모든 천체는 지구를 돈다는 지구 중심설이 성서의 지지를 받는 듯 여겨지던 시대였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지동설을 담은 새로운 천문학 개론서를 낸 것은 1514년이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짧은 논문⌟(Brief Treatise, Commentarieolu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는 코페르니쿠스 사후(死後) 루터파 개신교 목사였던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에 의해 출간되었다. 당시 이것은 성서의 권위와 신빙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단테, 에라스무스,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세계 최고(最古) 볼로냐대
그렇다면 루터와 칼빈은 과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알고 있었을까? 이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정죄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가 않다. 루터가 천문학 서적의 기본 원리들을 이해할 만한 학식을 지닌 사람인 것은 분명하나 우리는 그가 천문학적 주제를 탐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개신교 수학 강사 레티쿠스(Georg Johachim Rheticus, 1514-1574)가 코페르니쿠스의 수제자로 성서와 지동설을 양립하고자 노력한 사람임이 호이까스(R. Hooykaas)의 노력으로 발견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루터는 결코 자연에 무지한 학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모든 자연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존재함도 인정하였다.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 본질의 완전성과 아들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현존함을 인정하였다. 다만 루터의 관심의 중심은 달랐다. 루터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관심보다 과학의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 좀더 집중한다. 아란트(Charles P. Arand)는 루터의 창조론(Luther's Thought on Creation) 강좌에서 루터의 요리문답 제 1조에 나타난 창조론과 그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면서 루터는 후기 작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란트는 창조주와 창조물 간의 경계와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과의 구분 그리고 하나님의 가면(Larva Dei)으로서의 피조물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피조물은 존재의 낮은 질서에 속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피조물은 오히려 신적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렇다고 인간이나 피조물이 창조의 중심이 아니다. 루터는 철저히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 초점을 맞춘다.
루터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은 광대한 은하수로부터 미세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을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Ex nihilo)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 또한 창조주는 인간들을 다른 창조물로부터 구분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요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이것은 과정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루터의 창조 신학에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루터는 아버지를 문법, 아들을 변증법, 성령을 수사학으로 비유하곤 했다.
Ⅲ. 자연 과학에 대한 칼빈의 이해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과학과 신학의 전쟁 역사⌟(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1896)에서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통상 시편 93편 1절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도전했고 어느 누가 감히 성경의 권위 위에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올려놓으려 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안티기독교인이었던 러셀(B. Russel)은 서양 철학사에서 화이트가 주장한 이 내용을 반복해서 칼빈을 공격하였다. 심지어 최근의 토마스 쿤(T. S. Kuhn) 조차 이 구절로 칼빈을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칼빈을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고 인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꼼꼼히 살펴본 적은 없는 듯하다. 칼빈의 어느 책에도 위의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칼빈은 시편 93편 1절에 대한 주석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지동설을 유지하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해석학적 오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말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하고자 감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문헌은 결코 없다. 로젠(E. Rogen)은 화이트와 반대로 칼빈의 모든 텍스트를 찾아보았으나 칼빈이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떤 태도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호이까스(R. Hooykaas)도 칼빈은 한번도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칼빈이 말했다는 ‘인용구’는 모두 가공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칼빈이 죽기 25년전(1539) 마르틴 루터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카톨릭의 인물이었고 칼빈보다 루터가 카톨릭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칼빈이 코페르니쿠스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칼빈의 저서나 관련 문헌에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일까? 여기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칼빈이 설혹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해도 그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을 공적으로 논평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그의 태양 중심설은 지지자들을 거의 얻지 못하였다. 겨우 한 대학교(스페인의 Salamanka 대학)에서 가르쳐졌으며 보댕(Jean Bodin, 1530-1596)이나 몽테뉴(W. Montague, 1533-1592) 같은 16세기 후기의 학자들도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침묵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후 반세기가 지나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에 의해서 본격 부활된다. 신학자로서의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관심의 대상이었더라도 자신의 저작 가운데서는 간과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저서에 나오지도 않는 이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했다는 낭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인용이 되었던 것일까? 샤프(John Sharp)는 멜랑히톤(Philip Melanchiton, 1497-1560)의 물리학 서론(Intia Doctrineae Physicae)에서 인용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칼빈은 과학을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에 대해 열려있었으며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칼빈은 과학적 연구를 적극 권장하였으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질 세계와 인간의 몸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거한다. 칼빈은 천문학과 의학 연구를 모두 적극 추천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더 많은 증거와 지혜와 섭리를 알게 되는 일이었다. 과학이 하나님의 과학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칼빈과 루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창조 신앙의 반열에 있었다.
다만 칼빈은 성경을 관점과 관심이 다른 책으로 보았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었다. 성경은 전문 과학 서적처럼 대할 책이 아니었다. 칼빈은 분명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자연은 조금 일그러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책으로 본 것이다. 피조세계의 연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훌륭한 도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었다. 1645년과 그 이듬해 과학에 헌신한 사람들의 부정기적 모임으로 출발한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 회원 대부분이 청교도적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한 칼빈

창조-타락-구속(하나님 나라)의 기독교세계관에서 나오는 참 된 가치와 행동과 문화의 변혁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상세히 다루고 있고 여기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지지한다.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 머물 때에 위(位)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기독교 강요에서는 이 용어의 사용을 옹호하며 이 용어를 싫어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은 어거스틴이 적극적 관심을 가졌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에 대해서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어거스틴에 대해 해박한 칼빈의 지식으로 보아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에 대해 칼빈이 몰랐기 때문이라고는 결코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거스틴 견해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3위 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 세상 사물을 통해 유비(類比)시킬만한 예증을 자신이 찾아내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칼빈이 어거스틴의 견해가 틀렸다고 보았다면 적극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을 것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암묵적 동의했음이 틀림없다.
칼빈은 성서 해석에 있어 자연 과학을 결코 부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국 왕립 협회(royal society) 회원의 압도적 다수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과학과 과학자 만능의 엘리트주의자가 아니었다. 칼빈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였다. 칼빈이 보기에 하나님의 영(靈)은 특별한 사람들만 배려한 고등 교육 기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통 학교를 개설하시는 분이었다. 칼빈의 해석학에 대한 안명준 교수(평택대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논문 “칼빈의 해석학에 있어서의 간결성과 용이성”(Brevitas et Facilitas)의 방법론은 칼빈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모세는 지식인 뿐 아니라 무식자의 선생으로도 소명을 받았다. 칼빈은 천문학이나 기타 난해한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보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칼빈은 자연 과학에 대해 어떤 이해 수준을 가지고 있었을까? 방델(F. Wendel)은 멜랑히톤(Philipp Melanchton)이 자연 과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반면 칼빈은 정치사, 교회사, 문학사와 언어학, 해석학, 철학 등 인문 분야의 방대한 학식에 비해 물리학 또는 자연과학 혹은 수학 등에는 조금도 진지한 관심을 보인 것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유명한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로이힐린(J. Reuchlin, 1455-1522)의 증손자로 어릴 때부터 신동의 소리를 듣고 자라며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에게까지 찬사를 들었던 박학다식의 멜랑히톤에 비해 칼빈이 자연과학 부문에 멜랑히톤 만큼 관심이 덜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저서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멜랑흐톤 하우스(비텐베르그)
지만 그것이 자연 과학에 대해 칼빈의 무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칼빈의 사상에는 분명 일관되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그것은 과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분명하였다. 즉 칼빈에게 있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과학은 하나님의 피조의 질서이다. 하지만 칼빈에게 있어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칼빈이 이교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교도로부터 유래한 것을 모두 거부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일반 은총 교리는 헬라의 문학적이고 학문적인 유산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막았다. 최초의 타락이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붕괴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문주의자로서의 칼빈은 타락이 모든 것을 완전한 부패로 이끌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진리의 빛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교도에게도 비치고 있었다. 만약 성령을 신앙의 유일한 원천으로 본다면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지 않고 성령이 어디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든지 그 진리를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우주론을 성경에 투사시켜 읽던 당시의 일반적 관습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과 창세기의 세계상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었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 체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천문학적 내용을 기술하는 데 있어 통속적으로 글을 썼고 상식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한 반면 천문학자들은 전문가들로, 인간의 두뇌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언어로 기술하였다고 보았다. 칼빈의 해석 방법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가 누구에게든지 이해할 수 있게 묘사되었다는 종교 개혁 이론에 기초한다. 성령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된 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주제를 선정하였을 것이다. 즉 모세는 교육받은 자의 교사만은 아니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사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평범한 언어를 채택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책이므로 천문학 및 다른 어려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시편 주석에서도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과학적 사건에 대해 감관이 느끼는 대로 묘사했지 과학적 용어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성령께서는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내리기 위해 성령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아무도 그 말씀이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Ⅳ.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해석 방법
1. 칼빈의 적응(accommodation) 방법
그렇다면 과학의 영역 해석에 대한 칼빈의 방법론은 무엇이었을까? 맥그라스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3 가지 칼빈의 공헌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연구에 대해 긍정적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둘째, 칼빈은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한 인물이다.
셋째, 칼빈은 성경을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의 방법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할 때 겪는 것과 동일한 문제에 부딪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추어 내려 오사 우리의 연약한 점에 자신을 맞추신다. 이것은 유아원 선생님이 유아 언어로 말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면서 자녀들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제한 된 지성의 어린 아이에게 그들의 이해와 경험을 능가하는 말과 개념을 사용할 경우 의사 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 수준에 맞는 방법이 요구된다. 이 접근 방법은 칼빈에 의해 적응이라는 용어로 언급된다.
적응(Accommodation)은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이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 상태 등에 적응 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법이다. 이 적응의 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칼빈은 신학 언어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은 “신인동형설”(anthrophomorphism)의 언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신인동형적으로 손과 발이 달린 한 인간으로 언급하거나 희생 제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 적응의 원리에 근거할 때 이해가 가능해진다. 적응의 방법은 일상의 언어와 전문가 사이의 담론의 긴장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거스틴의 장황한 설명을 반대했다. 칼빈은 신인동형설이라는 언어 자체는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그런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2. 창세기 1장 주석에 나타난 해석 방법으로서의 칼빈의 적응(accommodation)
창조에 대해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 이들 견해의 특징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칼빈에게 있어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이요 완벽한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므로서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단지 미개인까지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 방식으로 성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해와 달에 대해 칼빈은 창세기가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밝게 우리들에게 비추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비한 세계를 더욱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서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수준과 능력에 적응한다. 이것을 문자적 묘사로 보면 안 된다. 창세기의 기자는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의 교사로도 임명되었다. 그 때문에 창세기 저자는 배우지 못한 조잡한 교육 수준의 입장에 서지 않고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김성봉 박사는 칼빈의 적응의 방법이 현재의 삶을 위한 목회적 관심까지 염두에 둔 해석 방법임을 논증한다. 그렇게 볼 때에 칼빈에게 있어 창조의 6 일은 24 시간의 여섯 단위가 아니었다. 칼빈은 순간 창조 개념을 반대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4 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확장된 시간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사고 방식에 적응한 것이었다. 칼빈은 그에 따라 궁창 위의 물도 구름에 적응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과 조금 다른 해석 방법이다. 즉 칼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적응된 것이다.
칼빈의 시대 루터란주의자들은 이미 지동설을 책망하고 있었다. 칼빈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창세기 주석에서 비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 이것은 화이트의 일방적 주장일 뿐 창세기 주석 어디에도 이런 구체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 좀더 검토해볼 여지를 남기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설령 칼빈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잘못 해석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달이 불명료한 물체라는 것을 인정하나 캄캄한 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은 달이 불타고 있는 물체일 것이라 보았다. 즉 달은 발광체라고 말한다. 성경이 달을 광명(창 1:15-16)이라고 부르니 성경에 적응하면 달이 광명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천문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물론 지구도 광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이나 지구가 그 중심에 뜨거운 마그마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또한 그 실체에 대한 해답이 간단하지는 않다. 즉 발광체든 아니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과학자들의 견해도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도 당연히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 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적응 이론 아래에서 칼빈은 자신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에 대해 자유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 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철저하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탁월한 성경 원문 연구가였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당시 유럽의 인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수준의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주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생물의 “종류(min)”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1절에 처음 나타난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종류대로의 창조의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종류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Elohim, 40회)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10회)이다. 그럼에도 칼빈은 이 언어를 아주 일반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한다. 진화론은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자연 과학의 주요 이슈가 된다. 칼빈의 시대는 아직 진화론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대였다.
칼빈은 종류대로라는 이 단어를 주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석을 기록하는데 있어 당시의 수준에서 단순한 언어로 묘사하려는 입장을 지속한 듯하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 1:19).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Ⅴ. 현대 과학과 적응 방법의 사용
그럼에도 적응의 방법은 여전히 유효한가? 맥그라스는 “적응”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핵심적인 중요한 논제는 아니었으나 성서 해석과 신학 구조와 관련되어 지속적인 이슈였다고 주장한다. 딜렌버거(John Dillenberger)가 보기에도 적응의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자연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의 하나였다.
칼빈은 결코 과학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열린 신학자였으며 과학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자였다. 물론 칼빈도 간혹 과학적 이론을 바르게 그의 해석에 사용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적응의 방법 아래에서 그런 작은 오류는 그의 신앙이나 성경 해석 방법에 누(累)가 될 수 없었다. 칼빈은 성서의 기록자들조차 “잘못된 견해에 적응하면서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과학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 계시로 재해석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였다. 과학의 문제에 있어 해석 방법과 관련하여 적응의 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 칼빈은 과학 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 적응이라는 해석 방법을 통해 성경 해석이 모든 역사, 온누리를 향한 적응된 해석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 일관적으로 흐르게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칼빈이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도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신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의 생소한 이론이나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적응의 방법은 때를 기다린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보았던 것이다.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하나님조차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하여 낮아지셨는데 우리 인간이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어떤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경향도 교만의 반영일 수 있다. 칼빈은 이점을 잘 아는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칼빈 시대나 모세 시대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상황과 과학의 발달을 분명 예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책이요 미래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 만능, 과학주의가 만연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적응은 어떤 것일까? 또 미래에의 적응은 무엇일까?
적응이란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는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였고 학문의 영역을 회복 시켰을 뿐 아니라 학문을 부자유스러운 속박에서 건져내었고 칼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학문의 최종적 결과 또한 학문의 자유 아래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적극적으로 과학의 문제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쟁과 협상 없이 승리하는 전쟁이란 없다. 칼빈이 말한 ‘성령의 겸손(condescension)’에 의지하여 학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겸손히 기다리는 것과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양보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진리는 적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Ⅵ. 맺으면서
여기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현대 과학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기독교는 분명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적응의 방법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대적 이슈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사랑과 평화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적응의 방법은 이 하나님의 본래 사랑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 지를 추적한다. 즉 기독론적 사랑과 평화가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는 개념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 관계가 없다. 지명수 박사는 모든 복음이 그 핵심 내용에 있어 동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은 가장 넓은 함의와 적용을 갖는 말씀으로 보고 이 최초의 축복을 최초의 복음, 창조의 복음이라고 불렀다. 이 창조의 복음은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축복이 포함될 것이다. 이것은 생태계나 생명 윤리 등을 다룰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경륜)->생화학(항상성)->오이코스(집,가정,지구촌)->환경(sound &sustainable)->이콜로지(지진,화산,폭우,가뭄, 기상이변?)->이코노미(부동산,경기, 경제,주식 등)->심지어 정치,건강,운동,폭식,금식 등까지<->탐욕, 과욕, 우상숭배, 해체, 붕괴, 추락(radical의 위험성)

부동산은 반드시 오른다? 샬롬(항상성)을 뚫는 (radical한) 인간 탐욕이 작용하기 때문에 상향의 그래프를 가짐!!! 정치도 경제도 생물이다(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아마추어가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정맥(경륜을 아는 법)과 속맥(사람보기에 옳은 일반 상식의 법)의 차이
신현수 교수(평택대 피어선 신학전문대학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의 실현의 행위로서 샬롬(shalom)의 신학을 제안한다. 구약의 평화는 기본적인 어떤 것으로 사회적, 역사적 및 다른 형태의 변화도 그것의 기본 의미를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 갈증 혹은 기쁨 등과 같이 변화 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 안에서도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질서의 샬롬을 촉구한다 할 수 있겠다. 기원과 윤리와 현대적 이슈를 다룸에 있어 과학의 질서 안에 내재된 창조의 샬롬, 하나님의 샬롬을 찾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복음주의는 자연 안에서 찾게 되는 이것들이 성경의 완전한 충족성에 비해서는 비록 작은 빛이기는 하나 여전히 피조된 세계 안에 펼쳐진 자연 계시 안에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피조 세계가 샬롬의 질서를 많이 상실하고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지향하는 가는 복음주의자들의 끝없는 고민이다.
기독 과학 철학자 델 라치(Del Ratzsch)가 말하는 ‘사랑 안에서 진리 말하기/발에 관한 몇 가지 생각’(Speaking the Truth in Love/Some Thoughts About Feet)도 흥미 있는 제안으로 그 중 하나의 도구일 수 있다. 델 라치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논쟁 할 때의 세 가지 원칙으로 첫째. 말할 때(Speak) 공동체 내부를 쉽게 깨뜨리는 누(累)를 범하지 말 것(토끼 발을 모두 잘라 버리는 발이 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입에 당신의 과학적, 신학적 또는 철학적 발을 집어넣지 말고 참 진리(the truth)를 찾도록 애쓸 것(입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말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어 짐) 셋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복음의) 친구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그것은 자신의 발을 쏘는 것이요 엽총으로 티눈을 잘라내는 격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 델 라치가 보기에 제일은 사랑이다. 필자가 보기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한 몸이다.
둘째는 겸손과 기다림의 방법이다.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 우리 인간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였다. 적응을 오해하여 성경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누(累)를 범하면 안 된다. 적응의 이론은 인간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잘못 적용하여 잘못된 정죄의 오류에 빠지지 말게 하며 겸손히 때를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자연 계시가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에 있어 완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앞서 자신의 주장을 계시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일반 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학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세속 도시의 발달에 대해 부정적인 프랑스의 자크 엘룰(Jacque Ellul)은 현대의 과학 기술이 기독교적인 인간관, 사회관과 충돌한다고 보는 반면 하비 콕스(Harvey Cox)는 기독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많은 학자들이 양편의 입장으로 갈라서게 된다. 세속 도시와 과학 기술의 부산물 가운데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보게 되는 면에서 복음주의는 양쪽 측면을 관찰하면서 좀더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림이 옳다.

종교개혁의 인물들(1625/1650년 제작). 중앙 열에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좌우에 칼빈과 멜랑흐톤 그리고 위클리프, 베자, 얀 후스가 보인다. 쯔빙글리(아래 그림 6번)와 하인리히 불링거(그림 9번)는 상열에 배치하였다(베를린 소재 독일역사박물관 전시물).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기독교 역사(교리사)를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radical한 사이비,이단들)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발생하는 성경 해석 상의 모순과 대립을 감정적으로 대처해서 자신의 견해만 진리라 여기고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판넨베르그도 이런 적응 이론이 성경의 영감론을 반대하는 게 아니요 말씀 가운데 모순과 대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셋째, 명료성이다. 겸손과 기다림으로서의 적응은 단순한 소극적 대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료성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의 창조 섭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명료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과연 성경적 이론 인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문제는 명료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성경과 과학과 피조된 인간에 부여된 양심에 따라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에 진화론은 결코 복음주의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여기서 진화론은 명료하게 부정된다.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다만 그럼 언제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창조되었는가의 문제는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첨예한 문제이(즉 우주 기원론, 지질-층서학과 생물진화론을 구분할 것) . 이럴 경우 우리는 겸손과 기다림의 적응이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겸손과 기다림 자체가 명료함인 것이다.

수성(水星, Mercury)에서 최초 물 발견!(사진: NASA 홈피)
수성 탐사선 메신저호가 촬영한 수성 북극 사진(좌측)과 지상 전파망원경이 얼음으로 추정한 사진을 합성한 영상(우측)

넷째, 적응의 적극성이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를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만드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과학에 대해 게으르지 말고 연구하며 접근해 갈 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가만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늘 방향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접근한다. 적응 이론은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성경과 과학과 삶 안에서 우리가 가장 합당한 대답을 이끌어낼 것을 요구한다. 즉 적응 이론이 세상을 향한 결코 소극적 대처 방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
마지막으로 적응의 방법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준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들이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려는 유혹을 방지한다. 더불어 구원의 핵심이 아닌 창조의 영역의 문제(adiaphora)에 있어서는 보다 자유함을 가지고 자연의 노예나 폭군이 아닌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생태와 환경은 단순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 자체가 다차원적이다. 이런 다변적 환경에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과 청지기적 사명은 분명 적응의 원리의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과 관련된 성서 해석에 있어 칼빈의 적응 방법과 이론은 과학 기술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