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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독일 문호, 괴테·실러·헤르더, 바이마르 교회에서 서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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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헤르더교회(Herderkirche<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앞 헤르더 동상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는 18세기 독일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로 신학자·철학자·작가요 문예비평가였다. 동프로이센의 소도시 모른겐(지금의 폴란드)에서 초급 교원의 아들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의학과 신학을 배운 뒤 철학자 칸트(1724-1804)의 강의를 듣는다. 목사였으나 그는 항상 성직자뿐 아니라 당대 철학사상가요 작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남긴다.

바이마르의 성 페터와 바울교회는 일명 헤르더교회(Herderkirche)로 불린다. 27년 동안 담임(1776-1803) 목사였던 헤르더가 루터파교회인 이 시 교회의 교구총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의 건립 시기는 1489-1500년 사이였으니 루터도 헤르더도 오늘날 모습과 유사한 모습의 교회에서 설교했을 것이다.

괴테와 쉴러의 동상

독일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프랑크푸르트 태생이었다. 배경이 다른 헤르더와 괴테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종교도시 스트라스부르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헤르더는 프랑스와 다른 독일어의 특별한 정체성을 역설했고, 괴테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 모습을 보며 독일문화의 찬란함을 찬미한다. 이 인연으로 자신이 유아세례를 받았던 교회가 있던 바이마르 공국의 여러 공직을 맡게 된 괴테는 헤르더를 바이마르로 부른다. 18세기 바이마르에서의 독일 두 천재의 만남이었다.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 괴테와 쉴러 동상

신앙심이 깊어 목사가 되려했던 시인이자 고전주의 극작가, 철학자, 역사가, 문학이론가였던 뷔르템베르크 주 마르바흐 출신의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를 바이마르로 부른 사람도 괴테였다. 괴테가 부른 두 사람 헤르더와 실러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헤르더가 사망한 후 2년 후 실러도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괴테는 그 슬픔을 글로 남기고 있다.

성 페터와 바울(헤르더)교회 내부

 

교회 안 성화에는 십자가 아래 세례 요한과 마르틴 루터가 성경(아마도 로마서 1장)을 펴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루카스 크라나흐에 의해 제작되어 1555년 아들 크라나흐가 완성한 이 그림은 어린 양 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구원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

©조덕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