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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진화, 목적론, 종, 종류, 소진화, 대진화, 중간화석(창조론과 진화론 이해, 7-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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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목적론, 종, 종류, 소진화, 대진화, 중간화석(창조론과 진화론 이해, 7-2강)


3. 진화, 동어반복, 목적론

교재: 강건일 박사(창조론과 진화론 이해)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

프랑크푸르트 자연사박물관 전시물

1) 진화에 대한 관점 차이

창조론 적 관점에서는 진화의 사전적 의미(생명의 단순한 형태로부터 고둥 형태로 점진적으로 발전) 속에서 진화를 비판하는 반면, 진화에 대한 현대 과학적 정의는, 많은 세대에 걸쳐 퍼져 있는 한 집단에서 유전적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 또는 유사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유전자 풀 내의 대립유전자 빈도의 변화와 같은 것으로 본다.

2) 적자생존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기 전 스펜서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다윈에게 자연선택보다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 사람은 1866년 윌리스로 알려져 있다.

3) 동어 반복은 바로 “내일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진술처럼 공허한 진술을 말한다. 즉 창조론적 관점은 진화론의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이며 적자가 생존하는 자라는 공허한 동어반복이라고 비판한다고 저자(강건일 교수)는 서술한다.

4) 과학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종이 존재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윈의 해석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5) 진화가 진보적이라는 개념은 바른 개념이 아니다. 

6) 진화론과 진보를 이해하는 핵심은 진화의 역사성이다. 이 역사성 때문에 진화론을 목적론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7) 플라톤의 목적론의 외적인 해석은 목표가 의도, 목적을 가진 어떤 인자, 마음에 의해 정해진다고 본다.

8)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적 목적론적 해석은 역사적 해석을 찾는 점에서 진화론에서 쓰인다. 내적인 목적론이란 일종의 인과론적 해석을 내리는 것이다.

 

4. 진화의 증거, 연구 방법

1) 고생물학적 화석 연구: 중간 단계의 화석 문제

2) 생물 지리학: 종의 자연적, 지리적 분포 연구(15만 종의 식물, 10만 종의 곰팡이, 100만 종의 동물 등 생명의 다양성 연구)

3) 종 사이의 생리학적, 생화학적, 발생학적 유사성 등 연구(생며체 단백질의 분자적 구조 연구)

4) 고생물학의 진화적 추론들에 대해 비교 해부학적 연구

5) 생물의 상동성 연구(창조론적 측면에서의 상동성 비판)

6) 현대의 분자 생물학(유전자와 진화론)

7) 창조론: 발생 반복설

8) 흔적기관은 진화를 증거 하는가 

공룡 화석(프랑크푸르트 자연사 박물관 전시물)

5. 종, 종류, 소진화, 대진화, 중간화석

1) 성경 창세기 1장의 “종”(min) 개념과 생물학의 종 개념의 차이

2) “종류대로”(창 1장)의 종류에 대해 일치된 기독교적 정의는 없다.

3) 종 분화(소진화와 대진화) 

4) 분류학의 계, 문, 강, 목, 과, 속, 종을 성경의 “종류대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25)”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늘 성경의 비역사성이나 과학적 모순을 지적할 때 창세기 1장을 거론하곤 하였다. 그렇다면 만일 현대 과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창세기 1장을 과학적(?)으로 서술하고 약 100년 후쯤 그 글을 다시 한 번 검토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여러 가지 모순과 비과학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과거, 과학자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 성경의 창세기를 비판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 그 내용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진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볼 때, 간단한 과학적 논문은 짧은 지면 안에 필요한 모든 말을 기록하여야 하므로 훨씬 더 쓰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은 가장 간략한 언어로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창조의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에 관한 논문과도 같다. 이 짧은 창조의 계시는 수 천 년 동안 모든 인류에게 조금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전해져 왔지만 지금도 아무런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인가!

 

그 놀라운 창조의 섭리를 짧은 창세기 안에 모세의 손을 빌어 모든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들에게 계시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다양한 창조 기사 가운데 <종류대로>라는 구절은 특별히 강조되고 있어서 매우 관심을 끈다. 창세기 1장에서만 10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강조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특별히 전하고자 했던 각별한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현대 생물학은 유연관계가 있는 것끼리 일정한 분류 체계를 정하여 놓고 이것을 진화의 계통도나 생물의 외형적 ,생리적, 화학적 비교에 응용하고 있다.

 

이 생물의 분류 체계를 최초로 확립한 인물은 스웨덴 사람으로 목사의 아들이었던 칼 폰 린네(1707-1778)였다. 그가 생물의 종류에 대한 분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처음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을 창세기에 말씀하신대로 그 종류대로 나누어보려던 것이었다.

 

이 린네의 분류 체계가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거꾸로 진화론적 생물 분류 체계로 바뀌어져 버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종류대로>라는 말은 교배가 가능한 범위를 말하는 것같다. 이 말은 현대 생물학이 종(種;species)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속(屬;genus) 또는 과(科;family)에 해당된다.

 

종(種)은 기본이 되는 단위인데 대체로 같은 형질을 나타내므로 같은 종 사이에는 교배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집고양이와 들고양이의 경우에는 같은 속에 속하지만 다른 종이면서도 교배가 가능하다.

 

가끔 서로 다른 속 사이에서도 교배가 가능할 수도 있다. 즉 어떤 종류의 곡물류는 목초류와 교배 시킬 수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가 과(科)에 적용될 것이다.

 

같은 속에 속하면서 다른 종인 말과 당나귀는 서로 교배시켜 노새를 생산할 수 있는 데 노새는 생식력이 없다.

 

따라서 이 두 종은 종류라는 말의 한계에 가깝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생물계의 재생산 영역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들 종의 근본적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일정한 종류의 기본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종류 내에서는 환경에 따라 적응하여 변천할 수 있는 기본 형식을 정하셨다고 보겠다. 이것을 소진화라고 한다.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종 내에서의 변이를 의미한다.

 

그 대신 종과 종 사이로의 변이는 대진화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대로>라는 말은 바로 이 대진화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제각각 약 100만종에서 200만종 가까이 생물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로 보면 그 종류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이 중에서도 성경은 생물학에 있어서의 생물의 분류 체계와는 달리 동물과 식물을 좀더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은 네페쉬(nephesh)를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 단어는 구약에서 영혼을 뜻하는 단어로 때로는 생명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문맥에 따라서 성경 가운데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노아의 홍수 당시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 6:22)고 한 말씀은 바로 이 네페쉬를 소유한 생물의 멸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 네페쉬는 하등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해당되지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다고(창1:29-30) 하신 의미는 바로 네페쉬를 소유한 생물과 그렇지않은 식물 사이에는 커다란 구별이 존재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여(창2:7), 네페쉬를 소유한 생물 가운데서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분명히 다르게 창조하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식물도 동물과 한 뿌리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렇게 성경은 동물과 식물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식물에게도 정령이 존재한다는 등 식물도 영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일부 신비주의 자들의 주장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미 텍사스 주에 있는 에이 엔 엠 대학의 딜론(L.S.Dillon) 교수는 “사람은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다”라고 참으로 엉뚱한 주장을 하는데,사람의 염색체 수가 동물과 달리 일부 식물과 오히려 유사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피조물인 우리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적 논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 하나님께서는 지구라는 단일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야하는 모든 생물에게 동일한 사랑의 배려를 하신 것으로도 해석된다.

 

물론 지금도 동물과 식물의 구별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이론이 많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식물은 동물들처럼 혼이나 영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못한 것이 분명하며(창1:29-30),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창 9:3-6,레 17:11)는 말씀처럼 생명을 뜻하는 피를 소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식물체에 존재하는 물관, 체관 등의 통도 요소에 있는 체액을 동물의 피에 비유하여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그리고 단순한 무척추 동물의 경우도 흔적만 남아있는 순환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성경적인 의미의 생명을 나타내는 피를 가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쉽지 않은 문제들은 좀 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물과 식물 사이에 명확한 구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생명에 있어 이와 같이 구별된 위치에 관하여 성경 레위기 19장 19절은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를 깨달은 랍비들은 말과 나귀를 다른 종류로 간주하여 교배를 금지하였다고 한다. 성경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것이다.

 

레위기 19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설정하신 자연계의 순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와 이방인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성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주시는 이중의 교훈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이 준행하여야할 일단의 규범을 주신 하나님은 인류에게 또다른 사랑의 표현으로 자유의지도 주셨다. 이 축복된 권리는 인류 타락의 씨앗도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과 순리에도 이 의지를 적용하신다.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이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자연을 상당할 정도로 개선할 수 있을 문턱까지 도달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 인류의 올바른 의지의 진행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 계속적으로 성경적 윤리의 기준을 거부하는 세상에 그대로 동참만 할 것인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로마서1:28)”

 

성경은 과학적으로 모자이크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 세계에 대하여도 인류가 올바른 의지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윤리적 경고를 하신다고 생각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그러한 류가 아니었는가?

 

<종류대로>라는 성경의 구절과 오늘날 유전공학의 빠른 발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8-39)”

 

영적인 법칙이 있듯이 자연 세계와 생명의 육체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정한 법칙이 반드시 있다. 지식은 같되 올바른 지혜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조덕영 교수(환경화학공학,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