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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신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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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의 신론(루터와 칼빈, 신론 7)

 

Ⅰ. 마르틴 루터의 신론(조덕영)

 

이탈리아 토리노 서점 전시물

Theologia est infinita sapientia

quia nunquam potest edisci.

신학은 무한한 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교육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의 간략 연보(1483-1546)

칼빈, 루터, 멜랑흐톤(왼쪽부터, 사진: 비텐베르크 멜랑흐톤 하우스)

“Theologia Crucis​”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비텐베르크 루터 하우스에서

1. 1483년 11. 10 독일 동부 아이슬레벤에서 출생

2. 1502. 9.29 에르푸르트 대학 학사 학위

3. 1505. 1. 7 문학 석사

4. 1505. 7. 2 뇌우 속 수도사 서원(어거스틴 교단 수도원, 1505. 7. 17)

5. 1510. 11 로마 여행

왼편에 비텐베르크 성채교회, 오른편에 루터 하우스(옛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가 보인다.

비텐베르크는 지금도 우리의 소읍 정도(4-5만)의 작은 도시이다. 현재도 기차역(그림 오른편)에서 종교개혁의 현장(성채교회)까지 도보로 10여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 도시 중앙에는 시청 광장이 있으며 1821년 세워진 루터 동상이 있고 광장 옆에는 루터의 친구였던 필립 멜랑흐톤의 동상도 있다. 멜랑흐톤 하우스는 사진에서 루터 하우스 바로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광장 인근의 성 마리아 시립교회는 루터가 독일어로 처음 설교했던 장소다.

6. 1511. 4 비텐베르그 대학

비텐베르크 교회

7. 1512. 10. 19 신학 박사

8. 1517. 10. 31 비텐베르그 성채 교회 문에 “95 개조 논박”

9. 1518. 8. 25 멜랑흐톤 비텐베르그 대학 부임

게오르게스 기사(Knight George) 로 행세한 마르틴 루터(비텐베르크 루터 하우스 전시물)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를 세우고 마르틴 루터를 교수로 초청한 사람은 작센의 선제후(재위 1486년-1525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63-1525)였다. 그는 현명한 제후였으므로 '현공'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는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고 자신의 성(바르트부르크)을 루터에게 도피처 성으로 제공하였다. 그곳에서 루터는 게오르게스 기사로 행세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10. 1518. 12. 18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 추방하지 않음

11. 1519. 7. 4-14 에크와 라이프치히 논쟁

12. 1520. 8 독일 귀족에게 고함

13. 1520. 10. 6 바벨론 유수

14. 1520. 11. 12 쾰른에서 루터 저서 불사름/그리스도인의 자유

15. 1521. 12. 25 칼슈타트 미사에서 평신도 포도주 나눔

16. 1524. 9.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

17. 1525. 6. 13 노예 의지에 관하여

18. 1527. 여름. 심각한 우울증으로 앓아눕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지음

19. 1543. 7. 창세기 주석 출판(1535-1545년 강의)

20. 1545. 3. 25 마귀가 세운 로마의 교황 제도에 대한 반박

21. 1546. 2. 18 아이슬레벤에서 사망

※마르틴 루터의 신론

1.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allwirksamkeit)

1) 스콜라 신학의 신관을 버림

(1)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과 능력은 당연한 것(롬 1:20)

(2) 이성과 계시의 토마스 아퀴나스류의 신인식 거부

(3) 아리스토텔레스는 "떠벌이"

(4) 스콜라철학 철저히 무시

2) 오직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삼위일체)

(1) 삼위일체론 수용(당위성과 중요성 강조)

(2) 사변적 논증 무관심

3)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1)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

(2)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가면(larva Dei)

(3)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 Servum arbitium)

(4) 공급하시는 하나님 사랑

(5)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칭의(하나님의 고유한 사역opus proprium이요 낯선 사역opus alienum)

4) 십자가 신학(루터 신학의 핵심)

(1) 1518년 4.26 <하이델베르크 논쟁>(Theologia crucis<->gloria)

(2)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로서의 십자가

(3) 나의 등(Posteriora mea)을 볼 것이라(모세-> "Ostende mihi gloriam tuam")

(4)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참 된 신학과 참 된 하나님 인식이 있다!

(5) 즉 고난 가운데서만 인식되는 하나님의 역설

(6) 하나님 인식은 이론적 성질이 아닌 실존의 사실

(7) 모든 올바른 신학은 십자가의 지혜(Sapientia crucis)에 있다.

(8) 십자가는 하나님의 숨어 계심(하나님의 무력하심의 역설)

(9) 십자가라는 미련함이 주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걸림돌

(10) 십자가 신학은 신앙의 신학이요 신앙의 신학은 시련의 신학이다!

(11) 따라서 이 지혜를 하나님의 모든 좋은 은사처럼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잘못 사용하지 말 것

(12) 십자가 신학이 의미하는 반대(역설)로부터 일하시는 하나님(사 55:8-9; 고전 1:26-29, 미련, 약함, 천함, 멸시, 없는 자/전도의 미련, 십자가의 미련, 고전 1:21-24)

5) 죄인의 눈에는 감추인 하나님

(1)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 사 45:15)

(2) 불안과 절망을 기뻐하라!(하나님의 돌보심이 이들과 함께하기에)

(3) 이중 예정보다는 택함 받은 사람들이 이 숨어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사역

6) 유명론의 오컴의 영향

(1) 새로운 길(via moderna)

(2) particular(개별자)<->via antiqua

(3) 실재론의 토미즘(도미니크)과 스코티즘(성 프란시스)

(4) 유명론 속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론(오컴과 가브리엘 비일-펠라기우스)과 비관론(리미니의 그레고리<파리대>-신어거스틴학파<옥스퍼드대>)

(5)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

종교개혁의 인물들(1625/1650년 제작). 중앙 열에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좌우에 칼빈과 멜랑흐톤 그리고 위클리프, 베자, 얀 후스가 보인다. 쯔빙글리(아래 그림 6번)와 하인리히 불링거(그림 9번)는 상열에 배치하였다(베를린 소재 독일역사박물관 전시물).

Ⅱ. 칼빈의 신론

요한 칼빈

(John Calvin, 1509~1564)

인간에게는 신을

의식할 수 있는 본능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속에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놓으셨다.

"나는 나의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칼빈의 신학은

한국교회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의 신학 사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칼빈에 대한 간략 연보(일반적 추정임)

1)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쪽 노와용(Noyon)에서 출생

아버지 제라드는 공장직공과 벳사람에서 노력으로 시 등기관리인과 주교관 행정직 그리고 대성당 소송대리인(일종의 오늘날 변호사 역할)까지 한 사람

칼빈은 12세 때 교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 뜻에 따라 교회 신부 보조하는 목사보에 임명

1520 혹은 1521, 마르슈대학 입학

여기서 훗날 개혁신앙의 동지 파렐 만남

1521~1522,

몽태규 대학(에라스무스, 로욜라)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성경과 스콜라 신학을 배움

2) 1523~27 혹은 1528년 파리 대학

1525 혹은 1526, 석사학위 취득

3) 1527 혹은 1528~29, 오를레앙 대학

아버지의 뜻대로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꾼 시기

4) 1529~31, 부르줴대학

5) 1531~33, 파리와 오를레앙 대학에서

처녀작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칼빈이 회심한 시기

6) 1533~34, 파리와 앙굴렘과 노용에서

7) 1534, 스트라스버그를 거쳐 바젤로 향함

8) 1536, 라틴어로 된 기독교 강요 제 1판(만 26세)

9) 1536년 파렐의 권유로 제네바로 가다

10) 1564년 사망

파렐, 칼빈, 베자, 녹스

※칼빈의 신학의 중심은 무엇인가​

1. 20세기 초까지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신학의 통일적 원리들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았다. 그 중심에는 트뢸치(Ernst Troeltsch) 가 있다. 트뢸치는 칼빈을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한 하나님 중심 신학자로 보았다.

2. 니젤(W. Niesel)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3. 벤자민 위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을 무엇보다 성령 신학자로 보았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교리는 칼빈이 교회에 준 선물이라고 보았다.

4. 그러나 칼빈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 주제로 보여진다

5. 지금까지 신학자들은 칼빈의 한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6. 밀러(Benjamin Charles Kilner, Jr.)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한다.

7. 파티(Charles Partee)는 칼빈의 중심 교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주장한다.

8.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며 이 둘은 <주변적인 것과 중심적인 것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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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론

Ⅰ. 하나님과 계시에 대한 지식

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대한 상관성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참되고 확실한 지혜로 일컬어질만한 우리들의 지식의 전체는 두 가지 부분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시작한다.

칼빈은 저서의 도입부에서부터 개혁주의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절대적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분은 전적으로 타자라는 것을 전제로 신학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실체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묻는 것은 헛된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실체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주권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한 곳에 멀리 떨어져있고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을 깨닫는 특권은 하나님께 위임하라.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분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알 수 있는 자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3)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경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성경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교리에 대해 극소량도 맛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고 깨달을 수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4) 믿음과 하나님

그러나 성경 자체만으로는 안 된다.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신비는 오직 그것을 주신 사람들만 깨달아 알 수 있다.”

5) 성자 예수

그러면 진정으로 성경 속에서 무엇을 추구해야하는가?

“초보자를 가르치고자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선한 감격에 의해서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참된 경건 가운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깨우치게 하려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시며 복음의 본질이 되시는 한 우리에게는 주를 깨닫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있을 수 없다.

옛 성도들은 마치 거울을 보듯이 독생자를 희미하게 보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성경 연구의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께 집중 되어야 한다. 성경 전체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6) 하나님과 우상숭배 이단들

이단자들이 아무리 자기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고백할지라도 칼빈에게 있어 그들은 단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이해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한정시키려는 사람들과 자신의 감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상들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7)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복종에는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는가?

그것은 성령의 중재가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란 성경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모든 성도의 영혼에 심어주는 성령의 증거임을 규정하였다.

“비록 하나님 한분 스스로가 그의 말씀 안에서 증거하시면 충족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 말씀이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해서 인을 치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 속에 신뢰감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선지자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께서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오심이 틀림없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하늘로부터 전해진 게명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가슴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8)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성경의 권위를 세워주는 최상의 기준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심에 대해서 성령의 확증을 통해 주신다고 점점 더 강력한 주장을 폈다. 사도들은 성령의 공증에 따른 대리인이었다. 따라서 성경은 믿을만한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칼빈에게 있어 동등한 권리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9) 이런 주장을근거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칼빈은 성경의 축자영감 교리를 주장한 창시자로 생각한다. 최소한 이 교리를 강력하게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실상 칼빈은 축자영감을 주장한 사람이 아니다. 성경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성경 속의 말씀은 그 무엇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그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성경 그 자체는 “주께서 신실한 성도에게 성령의 조명을 분배하시는 수단”이며 그것은 하나님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10) 자연 계시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연 속에 특히 인간의 본성 속에서 계시하신다.

둘째로 만물의 자연적인 발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셋째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획득한 지식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나아가 인간은 획득된 지식을 선용할 수도 없다.

※ 자연에 대한 어거스틴과 칼빈

1) 자연에 대한 어거스틴의 생각이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빈에게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칼빈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종교의 씨앗(the seed of religion)은 사람에게 심겨져 있다고 보았다. 즉 칼빈도 자연의 은총과 계시를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칼빈은 자연과 우주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보고자 하였다. 그가 사용한 “책”, “거울”, “궁전”, “휘황찬란한 극장”, “무언(無言)의 교사” 등의 용어들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칼빈이 보기에 이와 같은 자연적 계시와 인간의 이성이란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까지 연결되지는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자연에 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미지인 거울, 극장, 책 등의 이미지를 그대로 자연 묘사에 사용하고 있다.

2) 이렇게 성경의 창조주와 구속의 주에 대한 확신에 관한 한 어거스틴과 칼빈의 생각은 동일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고백에는 그런 경험이 깔려 있다. 이 때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구원은 연결된다. 이러한 상태의 원인은 피조물이요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불만족과 공허감’으로 해석된다. 즉 반대로 구속 신앙을 가질 때 창조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이 무의미 한 것은 오직 성경적 창조와 구속을 믿지 못할 때뿐이다. 그런 면에서 바르트가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칼빈을 자연신학에 대한 반대자라고 소개한 것은 잘못된 신학해석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과학신학을 추구하는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칼빈을 자연신학 반대자라고 바르트가 표현한 것은 실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아들은 그 자신의 위대한 형상 안에서 인간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한 조각의 흔적을 가지고도 알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로 꽃동산과 산들바람을 가지고도 기뻐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달콤한 은혜를 항상 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인간이 거만함과 의심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자로 길이를 재듯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바로 자신을 우리에게 보다 가깝고, 친숙하게 만드시고,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허락하신 분이다.

11) 자연계시의 한계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한 자연은 칼빈에게 있어 늘 부정적이다.

즉 그것은 늘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게하는 수단일 뿐이다. 즉 범죄를 합법화 시킨다. 만일 타락이 없었다면 자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유효한 지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창조물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나타내심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게되고 말았다. 우주는 경건을 가르치는 학교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세주로서, 그리고 우리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믿음과 결합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된다.

12) 칼빈은 타락한 인간이 철학 등 긍정적 지식을 통해 소수의 특권자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철학자들의 저서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문장들이 이곳 저곳 아주 훌륭하게 기록 되어 있음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관성 없는 외관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미를 약간 알게 해주었다.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은 아니다.”

철학자들이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성을 부여받은 것을 사실이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종국에 가서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드러낼 정도의 지식에 불과하다.

13)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의지를 타락에 빠뜨렸으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하고 말았다.

14) 우리는 오직 성령의 영감 아래서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을 통해서만 중보자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다.

자연적인 계시를 우리로부터 감추고 있던 장막이 벗겨지고 거듭난 인간은 타락 이전의 인간이 보았던 것처럼, 이제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자취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2. 삼위일체 하나님

1)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각기 독특한 세 인격으로 우리 마음 속에 나타내심으로 스스로를 게시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이 문제를 불충분하게 설명해서 카롤리로부터 아리우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삼위일체교리를 옹호했음은 분명하다. 칼빈은 루터의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용어를 옹호하고 있다.

2) 칼빈은 1536년 초판에서 에베소서 4장 5절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지하기 위해 세례와 믿음의 일치를 첨가하였고 동시에 거룩한 삼위일체의 삼위의 이름으로 행하는 세례의 의무를 강조하였고, 나아가 이 세 인격들이 바로 믿음의 대상임을 주장하였다.

3) 1559년 칼빈은 독생자의 신성이이야말로 신앙의 필수적인 기초라는 이론을 폈다. 세 인격의 신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요, 동시에 기독교 씬학 뿐 아니라, 모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근본 원리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마치 루터가 반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그렇게 격렬하게 반발하였던 것처럼 칼빈도 역시 루터처럼 그리스도 중심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혹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지닌 가치를 침해하고 훼손하는 어떤 경우라도 묵과할 수 없었다.

4)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본질의 통일성은 삼위일체 삼위 사이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구분을 조금도 손상시켜서는 절대로 안된다. 분리가 아니라 구별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5) 칼빈은 하나의 본질이라는 통일성과 동시에 삼위 간의 개별성으로 규정되어야 할 최소한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내세워진 많은 논쟁들은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그는 성 어거스틴을 철저히 따르면서 그리스 교부들의 저서를 염두에 두었다. 비록 독창성을 결여되었으나 삼위일체 교리는 칼빈 신학의 기본적 핵심이다. 그것은 특히 칼빈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에 역점을 두는 것을 가능케하였다.

3. 창조주 하나님

1) 우리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비록 인간의 파멸과 타락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하여 오시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은 아버지시며, 구원자시며, 속죄자이심을 결코 깨닫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창조주이시므로 그의 힘으로 우리를 지속시키시고 그의 섭리를 우리를 다스리시고 관대하심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보존하시며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은혜를 끊임없이 주신다는 것은 이미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것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2) 칼빈은 우주와 인간이 완전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속성을 제시한다. 진실로 창조 행위에 외부적인 개입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는데 충분하였으며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었다.

3) 만일 인간이 창조의 목적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모든 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칼빈의 예정론 속에 이것이 잘 나타난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이 없어도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스스로의 영광을 고려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추론해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다. 비록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으실 지라도 인간을 창조하신 주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속에 영광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4) 칼빈은 창조란 우리 감각으로 자각하고 볼 수 있는 세상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나 천사가 사는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에서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수호천사라는 고전적 개념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천사의 계급이나 그 외적인 모습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스스로 완전하지 못한 천사는 우리의 경배를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과 같다.

5) 즉 칼빈에게 있어 천사와 악마, 인간의 영혼의 모두 창조된 영적 존재들로 분류된다.

대체로 영혼불멸설에 대한 그의 교리는 헬레니즘적인 요소를 가진다. 그러나 그 요소들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칼빈을 영혼의 영원성이나 자연불명성에 대한 주창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영혼의 본질을 창조하셨으며 영혼의 실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만들어진다. 영혼이란 단 창조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불명성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젠간 영혼으로부터 거두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6) 창조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인간은 창조의 핵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독특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칼빈은 스콜라 철학의 형상과 모양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영혼이 인간성의 전부가 아니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일컬여진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동물을 초월하여 높임을 받는 것은 바로 존엄성인바, 하나님의 존엄성은 모든 존엄성에 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말 속에는 아담이 창조될 때부터 부여받는 것은 의로운 마음을 향유하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스스로의 감각이나 모든 내면적 사상을 잘 조절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는 순결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주권적 보좌가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과 그 능력에 자리잡고 있지만 심지어 마음 뿐만 아니라 육체 자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지 않는 부분이란 없다.”

4. 섭리주 하나님(창조주, 섭리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중 지식, duplex cognitio Dei)

1) 칼빈은 1539년 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자신의 논제를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1559년 판에 와서 “창조주 하나님을 단 한번의 역사로 모든 창조를 논의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1559년 판에 와서 “창조주 하나님을 단 한번의 역사로 모든 창조를 완성시킨 일시적인 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 모든 이단과 위선자들과 다르다. 하나님의 힘은 첫 번째 시작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주의 영원한 상태 속에 온누리에 영원하다.

2)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계속 세상에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관심을 베푸시고 철저히 중재하시며 자연법칙에 대한 맹목적인 행위나 하물며 우연으로 보이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신다.

이것은 루터와 쯔빙글리와 같은 견해이며 특히 부처가 말한 자신의 창조 가운데 하나님의 끊임없이 활동하심에 대한 일치된 사상을 발견한다.

3) 1545년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 이란 논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세가지 측면으로 분류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각기 주신 상황과 특성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말한다.

둘째 이러한 ‘우주적 작용’에 대조시켜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종을 도우시거나 악인을 웅징하는 것, 즉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시고 혹은 부성적인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외로우심과 공의와 심판을 실현” 시키는 ‘특별한 섭리’ 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결과적으로 특별한 섭리란 특히 인간에게 더욱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간섭과 더 관련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세 번째 측면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믿는 자들을 다스리시고, 살아 계시고, 그들 속에서 통치하신다.”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직접적으로 복종한다. 이러한 것은 특히 인간이 혼자 있을때나, 사회속에서나 모두 다 적용되는 것이라고 단언하었다. 즉 교회를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보살핌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교회는 칼빈에게 있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보살핌의 대상이다. 제 1권 17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관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 섭리가 미래와 마찬가지 로 과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둘째, 그것은 만물을 조성하고 인도하며, 때로는 수단의 개입으로, 때로는 수단도 없이, 또 때로는 모든 수단에 역행하여 역사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다음의 목적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즉,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떠하신지, 무엇보다도 그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배려로 그의 교회를 얼마나 관심있게 지켜보시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5)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섭리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것은 버림받은 악인들에게도 동등하게 작용한다. 더욱이, 이미 말했듯이 그들을 유익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그러한 방법으로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따르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타락과 부패로부터 떠난 순결하신 분이다.”

6) 우리는 욥기 1장에서, 천사와 마찬가지로 악마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 위해 그 앞에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실로 다른 의미에서 또다른 목적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꼐서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악마와 사악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굴레에 의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는 한, 어떤 악의도 품지못하고 또 악의를 품었을때에도 그일을 저지르거나 그것을 행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속박과 규제로 묶여 있고 굴레의 제갈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이 사실을 성도가 깨달을 때 성도는 충분한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 악인들과 사단이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악의 창조주이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악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수행된 행위에 책임을지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지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라는 물음을 한 장에서 충분히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욥기 1장 17절을 언급하며, 욥의 약대를 탈취한 갈대아인의 악의 행위에서 하나님과 악마의 인간의 3중 개입을 구별하였다.

“갈대아인들은, 스스로를 악행에 내맡김으로 인해서,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타락 시켰다. 그러므로 사단은 그 타락한 자들 안에 역사하여 그들안에 자신의 사악한 통치를 행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에 따른 분노의 도구인 사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로 악인들을 모는 한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명백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역사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 ,하나님과 악마와 인간의 행위는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도와 수단의 차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모든 곳에서 훌륭히 빛나게 만드는 반면에, 악마와 인간의 악행은 그 자체의 무질서를 스스로를 보여준다.”

7) 악인은 분명 하나님 안에 그 책임을 져야한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통해 은밀한 뜻안에서 선언하신 것을 완성시키실 때, 아무리 하나님 계명에 복종하였다 할지라도, 그들 속에 있는 계율을 사악한 탐욕으로 깨뜨리고 거부하였으므로 용서받을 수가 없다.”

이 모든 정교한 논리는 성 어거스틴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