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은 무엇인가(창 3:19)
성경-창조-신학-세계관-과학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는냐"
(고전 15장 54-55)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창 3:19)
죽음 자체보다 죽음의 수반물이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세네카)
마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 죽음을 가장 싫어한다
(라 퐁텐 우화)
최상의 죽음이란 미리 예기치 않았던 죽음이다
(몽테뉴)
사람들은 아이들이 어둠 속을 걸어가길 두려워하듯 죽음을 두려워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사람은 다만 혼자서 죽을 것이다
(파스칼, 팡세)
오직 죽음을 말할 때에만 생기가 도는 necrophilous
(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
사람이 왜 죽는가 하는 물음은 곧 사람은 왜 사는가 하는 물음에 직결된다
(박두진 시인, 흙에 대하여)
죽음은 절대적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이며 운명적인 문제는 없다
(김형석 교수, 죽음에 관하여)
인간이 세상에서 접하는 원수 중 가장 무서운 원수, 죽음
(강원룡 목사, 용기의 원천)
개가 달을 향해 짖는 시각이야말로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시각이다
(이어령 박사,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죽음은 여러 가지의 말로 얘기한다
(일본, 시)
죽음은 갈 것이다~~~중략
죽음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중략
죽음은 네 속에서 다시 숨 쉬며 자라 갈 것이다
(김춘수 시, 죽음)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위해 재촉하는데
(사육신 성삼문)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눅 24:5-6)
종말론 1: 육체적 죽음은 무엇인가(창 3:19)
1. 종말에 대해
1) 세상과 우주의 종말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종교를 떠나서도 정말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신학의 종말론은 이 역사의 마지막 때의 일들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3) 성경은 창조(창세기)로부터 종말(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서술된 계시입니다.
4) 즉 창조주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와 망가진 세상의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구약과 신약 계시를 통해 종말의 때에 대해 계시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 종말의 계시에 대해 미숙한 우리 인간이 명료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6) 바른 종말론은 바로 이 같은 종말 계시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2. 사람의 죽음에 대해
1) 종말 계시 속 사람의 종말(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2) 특별한 경우(에녹, 엘리야)가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3. 낯선 불청객 죽음
1)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으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빈부귀천, 지식고하, 육체의 상황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옵니다.
2) 때론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4.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죽음
1) 사망은 이제 그만 삶을 멈추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니 아무도 이에 불복하지 못합니다.
2) 즉 죽음은 어찌하든 인간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 27)
육체적 죽음에 대해 살펴봅시다.
Ⅰ. 육체적 죽음은 무엇인가(정의)
1.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본 죽음
1) 이레네우스의 <미래 종말론적 죄와 죽음>
(1) 죄와 죽음과 사단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총괄갱신, recapitulation)에서 온전히 격파된 것이 아니다.
(2) 죄와 죽음과 사단의 권세는 미래종말론적으로 보아야 한다.
2) 닛사의 그레고리의 <죄와 죽음과 사단의 파멸에 대한 기독론적, 우주론적 종말론>
(1) 죄를 알지 못하는 그분(사 53: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이 진멸되었다.
(2) 따라서 죄로부터 나오는 죽음도 (근원적으로는) 사라져 버렸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과 죽음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3) 어거스틴이 본 <생명과 죽음>
(1) 생명과 죽음에 대해 구체적 관심을 가진 최초 신학자로는 어거스틴이 있습니다.
(2) 어거스틴은 인간의 죽음을 원죄(죄 중에 태어난 인간)의 결과로 간주합니다. 여기서 개혁주의의 전적 타락과 죽음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3) 어거스틴은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생명이 있다고 봅니다. 영혼과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요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4) 어거스틴은 이 생명의 상실을 죽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는 두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전자가 영혼과 육체의 분리, 곧 육체적 불멸성의 상실을 말하는 반면, 후자는 영혼과 하나님의 분리, 곧 죄로 인한 하나님의 상실을 말합니다.
(5) 어거스틴은 또한 인간의 죽음을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 죽음이란 시간 안에서의 인간 존재의 종식, 즉 육체적 죽음을 말하고, 둘째 죽음은 영원한 정죄의 죽음, 즉 영혼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때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후 부활때까지 존속하게 됩니다. 이 기간이 바로 중간상태(interim)입니다. 이 부분은 별도 chapter로 다루게 됩니다.
4) 펠라기우스
(1) 주후 5세기 로마에서 가르쳤던 수도승
(2)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세상 죽음은 인정(원죄는 부정)
(3) 펠라기우스의 제자 Celestius: 아담은 죄의 유무와 상관 없이 유한하게 창조된 존재로 죽을 존재였다.<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New York : Harper and Row, 1959), 358-359, 361>
(4) 종교개혁 시대 소시니안들도 유사한 견해
5) 마르틴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빛에서 본 죽음>
(1) 죽음의 참 된 실재성을 알려주는 성경
(2) 수고와 슬픔 속 신속하게 지나가는 인간의 삶(시 90). 즉 인간의 죽음은 무한하고 영원한 비참함과 진노입니다(식물, 동물 등 다른 생물들은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한 가공스러운 공포, terribilis horror mortis).
(3)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그리 살지 않도록 창조된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4) 죽음은 소꼽장난이 아님!
(5) 죄와 십자가에 담긴 죽음
(6) "죽음이 나의 잠이 되다"(루터 찬송가)
(7) 죽음의 역설: 우리는 죽음 한 가운데서 생명 안에 있다(Media morte in vita sumus)
6) 칼 바르트
(1) 인간의 죽음이 죄와 죄책과 관련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이긴 하나 죄의 결과는 아니다.
(2) 즉 죽음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
(3)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는 유한하기에 인간 자신은 필연적으로 죽을 유한한 존재. 즉 본질상 죽음이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님.
(4) 결국, 바르트에게 있어 죽음이란 죄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
(5) 인간은 무존재로부터 나아와 제한된 수명을 살다가 다시 무존재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한 존재.
2. 육체적 죽음의 의미
1) 육체적 죽음
(1) 육체적 죽음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서로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전 12:7).
(2) 즉, 신체는 화학적 요소들로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서 부패하게 됩니다.
(3) 그러나 영혼은 창조주와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됩니다.
2) 없어지지 않는 것
(1) 이 세상 물질은 결코 아주 없어지지 않습니다.
(2) 하물며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물을 아무것도 멸절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사망은 존재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스런 가족과 이별이요, 다정스런 친구나 이웃과의 분리인 것입니다(히 12:26-28 참조).
Ⅱ. 죄와 사망과의 관계
1) 형벌로서의 사망
(1) 사망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형벌로써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창 2:17; 롬 5:12; 6:23; 고전 15:21). 즉 죄가 만인을 보편적으로 지배하게 되므로 그 결과,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롬 5:12-14).
(2) 죽음은 이처럼 자연적 현상이 아니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요(시 90:7, 11), 심판이요(롬 1:32), 정죄요(롬 5:16), 저주이며(시 90: 7-11; 롬 1:32; 롬 5:16; 갈 3:13), 인간의 마음 속에 공포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은 사고사를 슬퍼합니다. 하지만 노년사도 죽음의 공포가 연장될 뿐 그 죽음을 향한 공포와 스트레스는 다를 게 없습니다.
2) 반드시 당하는 사망
(1) 죄악 가운데 있는 타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히 9:27).
(2)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인간 범죄 직후에 죽음을 부과하셨습니다.
(3) 죽음은 전 인류 각 개인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종의 체험인 것입니다.
3) 죽음에 대한 성경의 묘사
(1) 조상에게로 돌아감(왕하 22:20)
(2) 음부(스올)로 내려감
(3) 아무런 일도 교제도 없는 곳(전 9:10; 시 6:5)
(4) 하나님과 지속적 교제(시 73:24)
Ⅲ.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의의
1) 성경이 말하는 죽음
(1) 성경은 죽음이 사망의 죄의 결과요(창 3:19),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신자는 이미 죄책에서 벗어났거늘 어찌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할까요?
(3) 그리스도인들은 정죄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형벌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려는 징계의 수단이요, 훈련의 마지막 방편이 됩니다(히 12:6, 10).
(4) 즉 그리스도인도 자연적 죽음을 경험하지만 제 2의 죽음은 그리스도가 이기셨으므로 이기게 됩니다.
(5) 특별은총 가운데서 죄와 죽음의 역사는 정복되는 것입니다(롬 5:17; 고전 15:45; 딤후 1:10; 히 2:14; 계 1:8)
2) 징계의 절정으로서의 죽음
(1) 결론적으로 죽음은 성화를 위해 제정하신 징계의 절정입니다.
(2) 이것은 신자의 강도를 측정하는 마지막 관문이요 신자의 영혼을 성화케 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3) 따라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과 육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점과 흠 없이 입국하는 것으로 죽음은 신자에게는 마지막이 아니라 완전한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3) 죽음의 유익
(1) 참된 신자라면 죽음에 유익이 있다는 귀중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2) 이 진리를 알기에 성경은 "잔치집 보다 초상집이 낫고 죽는 날이 출생 날보다 낫다"(전 7: 1-2)고 말합니다.
(3) 이 육체적 죽음은 인간이 죄악, 고난, 눈물, 유혹, 교만, 속됨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 겸손, 감사, 찬양, 승리의 노래, 은혜, 진리, 영화의 새 삶을 향한 확신과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산자와 죽은 자 모두의 하나님 이십니다!!
(4)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다시 살아나 하나님께 대해서 살게 됨으로써 죄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Ⅳ. 영적 죽음과 “둘째 사망”
1) 영적 죽음
(1) 영적 죽음은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어 하나님과 교통을 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적의를 품는 것을 가리킵니다(창 2:17; 마 8:22; 요 5:24-25; 8:21, 24; 엡 2:1; 약 5:20).
(2) 불신자들의 삶이 바로 그러합니다.
2) 둘째 사망
(1)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되는 것으로 불신자들이 처하게 될 운명입니다(마 10:28; 계 2:11; 20:6, 14-15).
(2) 배교자들도 두 번 죽음(유 12절)
(3) 악인들이 최종적으로 받는 형벌, 하나님에게서 완전한 분리로서의 둘째 사망(계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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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묵상과 적용
1) 죽음을 묵상하며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 깊히 생각해 봅시다.
2) 때때로 의인이나 자비한 자가 악인보다 일찍 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사 57:1-2)
3) 주 안에 죽는 자의 축복을 알아봅시다(계 14:13)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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