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글을 시작하며
신학은 사유하는 학문이 아니라 발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인간의 생각을 개진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신학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상들이 버젓이, 또는 교묘하게 진리 노릇을 하고 있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능동순종 교리”일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능동순종 교리를 비판하면서, 이 주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는 웨신서 7조 2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 목사가 지적한 웨신서 7조 2항의 문제점은 웨신서 7조 2항이 아담은 영생의 존재가 아니며, 어떤 조건에 의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존재인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정 목사는 “능동순종 교리”를 비판하면서 에덴동사의 아담은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누차 강조했다. 그럼에도 능동순종 교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정 목사의 주장에는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아마도 이들은 성경보다 웨신서 7조 2항의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는 표현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한 채, 인간의 사유에서 생겨난 아류 신학에 불과하다. 이 아류 신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폄하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성까지 훼손하는 신성모독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제대로 살펴야 할 것이다.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은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실이다.
1. 성령 하나님은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였음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와서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인하여, 아담의 범죄로 사망에 이른 자들에게 사망을 제거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아담에게도 그의 범죄로 인한 사망이 제거된다면, 사망이 제거된 자들과 동일하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즉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죄로 인한 사망이 그에게 없었으므로, 그는 영생하는 존재였음이 틀림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사망에 이른 죄인에게 사망을 제거하시고, 아담의 범죄에 의해 잃어버린 영생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즉 아담의 범죄 이전 상태로, 다시 말하면 죄로 인한 사망이 없는 상태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도 범죄 이전에는 죄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영생을 소유한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말이다. 롬5:17은 이를 더욱 명백하게 확인해 준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여기서 “왕 노릇 하였은즉”으로 번역된 “ἐβασίλευσεν”(에바실류센/단순과거)의 원형 “βασιλεύω”(바실류오)는 “왕이 되다, 다스리다(왕 노릇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눅1: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βασιλεύσει/바실류세이/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아담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담의 범죄와 그로 인한 후손들의 범죄를 대속하심으로써, 왕 노릇하는 사망을 물리치시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이 왕 노릇하는 영생을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아담을 유혹해서 범죄하게 함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한 사탄의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멸하셨다는 말이다(요일3: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3:8에서 예수님이 사탄의 일을 멸하려 하신다는 말은 사탄이 아담을 유혹해서 범죄하게 한 그 일(아담의 범죄)을 멸하셔서, 아담의 범죄하기 전의 영생의 상태로 죄인들을 회복시키려 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범죄 이전에 아담이 누렸던 영생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여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은 예수께서 사망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이다. 그렇다면 아담에게서도 사망이 제거되면 그에게도 당연히 생명(영생)이 결과될 것이다. 이것은 범죄 이전의 아담은 생명(영생)을 소유한 자였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논증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선언하신 “영생을 얻었고”는 범죄하기 전, 그러므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 무죄한 아담의 생명(영생) 상태와 동일한 상태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 들어온 사망이 제거되어 죄인이 얻은 것이 영생이라면, 아담이 범죄했으므로 빼앗긴 것은 영생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영생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은 천지가 없어져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2.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기는 아담 안에서도 당연히 영원할 수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생기를”로 번역된 히브리어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은 “숨, 호흡, 기운, 영혼” 등의 의미를 가진 “נְשָׁמָה”(네솨마)의 연계형 “נִשְׁמַת”(니쉬마트)와 “생명”의 의미를 가진 “חַי”(하이)의 복수형 “חַיִּים”(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여기서 복수형 “חַיִּים”(하임)은 풍성한 생명력, 즉 영원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은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력의 호흡”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생기”는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생기”임에 틀림없다. 이는 LXX 창2:7에서 히브리어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생기를)을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으로 번역한 데서 더욱 분명해 진다.
LXX 창2: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의 헬라어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에서 “πνοὴν”(포노엔)의 원형 “πνοή”(프노에)는 “숨, 숨결”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LXX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는 LXX 시150:6(호흡이/πνοὴ/프노에/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일 것이다. 또 “αὐτοῦ”(아우투)는 ‘3인칭 단수 재귀대명사’이다. 따라서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을 직역하면 “그 자신의 생기를”(Breath Himself)이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생기”는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의 “생기”라는 말이다.
또 “πνοή”(프노에/생기)가 “바람, 성령”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רוּח”(루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πνεῦμα”(프뉴마)와 동일한 단어 군에 속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기”는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기”임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기”를 받은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영생)을 소유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기”가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꼴이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주신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는 말씀은 하나님의 갑질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지도 않은 영생을 빼앗겠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언하신 죽음은 단순히 육신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고서 그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언하시는 것은 모순이며, 모순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갑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순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갑질하시는 하나님은 더욱 더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하신 죽음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영생을 다시 빼앗으시겠다는 의미 밖에 다른 것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반드시 죽으리라”의 경고는 범죄 이전의 아담은 영생을 소유한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경고였다.
글을 마치며
필자는 당시의 웨신서 7조 2항을 작성한 사람들이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분량의 말씀들을 짧게 축약해서 기록하는 과정에서 좀 미진하게 표현했거나, 아니면 웨신서를 작성할 당시 17세기의 영어로 표현된 것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제대로 독해하지 못했거나 등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웨신서 7조 2항의 표현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오해의 소지를 줄 수 있다면(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웨신서 7조 2항을 그렇게 오해해하고 있다),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수정은 후대의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는 웨신서 7조 2항만으로는 아담에게 주시지도 않은 영생을 다시 빼앗겠다고 하시는 모순된 하나님, 억지를 부리시는 갑질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웨신서 7조 2항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아담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약속하셨다”
이창모 목사는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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