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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악의 본질과 신정론(조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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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과 신정론(조덕영)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성경적 해석

Biblical Interpretation of Theodicy

조덕영

DUK YOUNG CHO

창조신학연구소

[Abstract] How could a holy and loving God, who is in control of all things, allow evil to exist? How can we believe that God is both good and sovereign in face of the World's evil? This problem has been debated for as long as the church has existed. Theodicy is the study of the problem of evil in the world. The Term 'theodicy' is derived from the Greek theos(God) and dikee(justice). Gottfried Leibniz who coined the term 'theodicy' in an attempt to justify God's existence in light of the apparent imperfections of the world in 1710 argued that God must have created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This paper reviews biblical interpretation of theodicy.

Ⅰ. 기독교 신정론이 대두되는 이유

Ⅱ. 성경이 말하는 악

Ⅲ. 기독교 신정론의 과제들

Ⅳ. 성경의 인물로 본 악과 고통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단상

Ⅴ. 나가면서

Ⅰ. 기독교 신정론이 대두되는 이유

“악(惡)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성경의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악도 결국 하나님의 창조물 아닌가? 도대체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오랫동안 신학과 철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까지 지속되는 논제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악(惡)’에는 살인이나 강도·강간 등 악한 행위와 함께, 지진이나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 심지어는 질병이나 가족·친지의 죽음 등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不幸)마저도 포함된다. 필자의 동서가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정말 하나님이 선한 하나님이라면 왜 예수 믿던 착하신 장모님께서 주일날 억울하게 버스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는가? 따라서 나는 예수 믿을 수 없다”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이렇게 악(惡)의 문제는 오늘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질문일 뿐 아니라,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도 최대의 ‘물음’ 중 하나다. 나아가 ‘죄’를 저지르는 사람까지도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라며 하나님이나 부모님께 공을 떠넘기고 하나님과 부모를 향해 삿대질을 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신정론적 물음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이 문제는 역대 최고 철학자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심오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정말 악을 예비하셨는가?”하는 ‘예정론’과도 맞닿아 있다. 이렇듯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조성자라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인가?(Deus est auctor, causa omnis entis, Unde malum?) “하나님은 왜 악을 방치하고 보고만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 바로 신정론(神正論)이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에서 ‘너무도 정교한 이 세상을 보라 어찌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전혀 반대로 말 할 수 있다. 즉 ‘이 온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와 불공평과 아비규환을 보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반론을 펴는 것이다. 간혹 지적설계나 창조론자들이 춘하추동의 절묘한 계절 변화를 창조의 증거로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만일 100여 년 전 필리핀에 사는 원주민 신앙인이라면 아 필리핀의 변하지 않는 온화한 기후야말로 창조의 증거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논리로 반대이론을 펼치는 게 사람의 논리이다.

사람들은 억울한 성추행 피해, 선량한 사람의 억울한 살인 피해, 선교사의 피살, 선량한 사람이 당하는 많은 억울한 일들, 이유를 모르는 암의 고통 등등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신학과 철학에 던지기 마련이다. 바로 신정론에서 이런 고민이 발견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렇게 악과 관련된 신정론의 문제는 성경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된 중요한 논제가 아닐 수 없다.

Ⅱ. 성경이 말하는 악

악(惡)으로 번역되는 여러 성경 구절 가운데 주요 성경 구절은 히브리어 ‘라’(רע, 800번 나옴)와 헬라어 ‘포네로스’(πονηρὸς, 82번 나옴)와 카코스(κᾰκός, 78번 나옴)가 있다. 이외에도 악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히브리어 ‘딥바’(민 13:32)와 ‘아웬’(욥 15:35)과 ‘짐마’(잠 21:27)와 ‘라솨’(시 140:8) 그리고 헬라어 에피투미아(ἐπιθυμία)와 카코포이에오(κᾰκοποιέω, 막 3:4)도 있다. 이들 구절들은 모두 ‘악’을 나타내는 ‘나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어의 뉘앙스가 서로 다르듯 악은 단순하지가 않다. 사회적 악, 윤리·도덕적 악, 자연적 악, 육체적 악이 모두 나쁜 것들이다. 즉 범죄, 죽음, 아픔, 고통, 지진, 해일, 홍수, 가뭄, 재앙, 질병, 고통, 가난함, 괴롭힘, 등등이 모두 나쁜 것들이다. 심지어 성경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한 것들(창 38:7, 신 4:25, 시 51:4)과 이웃과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해로운 것들도 있음을 지적한다. 종교적 관계적 악들도 많은 것이다. 하나님을 떠남(대하 12:14)과 하나님의 언약을 어김(신 17:2),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 모두 ‘악’하다. 이들 광범위한 성경적 악의 개념들을 모두 신정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악 자체의 신학적 논증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분명 딜레마이다. 시편 기자는 무수한 재앙(악)이 나를 둘러쌌다(시 40:12)고 탄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존제에 대한 성경적 해석의 기본 로드맵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라는 선포를 초라하거나 공허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논쟁은 있었으나 성경적 해석의 구체적 로드맵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본 논고는 바로 지금까지 논의된 학문적 공헌을 바탕으로 성경의 주요 인물 군(群) 가운데 신정론적 12가지 주제와 부합되는 대표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성경적 해석의 기초 골격 작업을 하려는 데 있다.

Ⅲ. 기독교 신정론의 과제들

1. 딜레마

신정론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로,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신정론이라는 개념은 초기 계몽주의자이며 루터파 교도였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저서 '신정론(Theodizee', 원제: Essais de théodicée, 1710)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논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 속에서 악의 문제를 투영해보려는 모든 형태의 유일신 종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신정론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딜레마가 있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닌 가’이다.’ 여기서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악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의 플라톤 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가장 역설적인 형태의 신정론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창조의 선성(善性)을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악을 포함한 모든 역사적 섭리와 진리에 대해 자신을 계시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역설적 진리를 해석하고 논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정론은 늘 독특한 과제와 딜레마를 안고 있다.

빌헬름 라이프니츠 동상(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내)

2. 기독교 신정론의 전제

기독교 신정론은 직접적 신 존재 증명은 아니다. 다만 신 존재 증명을 하다보면 부딪히게 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기독교 신정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기본 전제가 확보되어야 한다. 첫째로 성경적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정론은 제기 되지 않는다. 둘째, 성경적 신이 선하다고 할 때 그 선함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함과 일정한 부분에서 일치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선악개념과 신이 가진 선악개념이 다르다고 한다면 신정론 이전의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성경적으로 세상은 이미 대단히 불변의 토대(constant ground)를 상실한 상태이다. 더구나 21세기 포스트모던 사상 속에서 이 문제는 전제 없이 접근할 수는 없다. 불변의 진리가 없다는 주장 자체도 또 다른 전제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철학적 관점이 아닌 성경이라는 그 불변의 토대 아래서 선악의 유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3.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고뇌

라이프니츠가 주로 철학의 관점에서 이 신정론 문제를 처음 다루었으나 악의 문제가 다루어지는 신학의 부분은 주로 섭리론(攝理論)에서 나타났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은 섭리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천지와 모든 피조물들을 붙드시며 잎사귀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음식과 식수, 건강과 병, 풍부와 가난 등 모든 것들을 우연이 아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손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세계를 다스린다 어거스틴은 악한 사건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유를 잘못 오용한데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이 볼 때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도 주권을 사용하시며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것들로부터 선한 것을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어거스틴이 보기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악은 결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악도 결국 이상스러운 괴물이 아니라 비 존재(non esse)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이해하였다. 악은 어떤 독자적 실체성(reality)가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하나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악에 대한 책임을 결코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다. 악은 허용하도록 놔두신 것일 뿐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는 없다고 본다. 악은 단지 선을 상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악은 더 큰 선(善)을 위한 창조의 한 부분이다. 문제는 악에 대한 이 같은 입장은 도덕적 악에 대해서는 일부 설명이 가능하나 자연적 악에 대해서는 논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악은 실재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핍의 원인에 속한다. 결국 이 같은 악의 근본 원인은 자유의지를 잘못 오용한 인간의 책임 안에서 생겨난다. 이 같은 도덕적 악에 대한 설명은 자연의 물리적 악에 대한 설명에 근본적 난제를 제공한다. 존 힉(John Hick)은 자신의 책 『악과 사랑의 하나님』(Evil and the God of Love)에서 어거스틴적인 것과 구분하여 악을 영혼을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어떤 과정으로 간주한 이레네우스(Irenaeus)적인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레네우스적 관점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을 모두 창조 단계의 과정으로 보게 된다.

Leibniz-Institut für Agrartechnik und Bioökonomie

포츠담의 라이프니츠 농업 공학 바이오경제 연구소

Leibniz-Institut für Agrartechnik und Bioökonomie

포츠담의 라이프니츠 농업 공학 바이오경제 연구소

사진전시회 포스터

(2022년, 3월 14일 부터 4월 8일까지)

신학은 철학자들의 물음에 주로 ‘십자가’의 신정론으로 나아간다. 루터는 늘 참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는 세상적 사변의 한계를 논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열리는 하나님 인식을 드러낸다. 루터는 사탄 속에서도 일하시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악과 고난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유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가면(Verba Dei)으로 풀이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고유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 ‘낯선 사역’을 통해 일하신다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루터의 논증에도 딜레마가 있다. 마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처럼 “결국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닌 가”라는 고민이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었을 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것,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참 자유를 가지는 것은 모두 반드시 섭리적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최고의 축복이다. 칼빈에게 있어 섭리론은 예정론과 동일한 실천적 목적을 가지는 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성급한 확신을 벗겨내고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수백 가지의 위험을 확신과 용기로 대처하게 한다. 모든 피조물을 변함없이 붙드시고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동일한 비를 내리시며(마 5:45)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판의 백합화를 돌보시며(마 6:26-30)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신 분(마 10:30)께서 하물며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칼빈의 견해는 어거스틴보다 자연적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 조금 진전된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악의 근원에 대한 신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 받지 않았더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되뇌인다. 요나스가 아우슈비츠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 표상을 수정한다. 그는 하나님을 ‘무감정의 신’이라는 오해에서 건져내며, 귀납적 추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신론의 전통도 비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는 그는 ‘고난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역설한다. 하지만 “고난을 하나님 안에 수용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문제는 몰트만에게 있어서도 난제였다. 몰트만적 견해는 신정론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든 불의는 사라지고 눈물과 고통과 죽음조차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악은 당연히 사라진다. 어찌 보면 악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더라도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찌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종말론적 미래에 모든 것을 미루어 놓으면 해결될 듯 보이던 것이 지옥의 영벌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정론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치명적 결함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즉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위에 모든 것을 의지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가 볼 때 모든 사건이 모두 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스토아적 개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 의지로 보았다. 바르트가 볼 때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 사건을 통할 때 악의 문제조차 해결의 근원을 찾게 된다. 그렇게 해서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사악한 신’의 선포자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난을 경험하고, 실존적 피조물이기에 상처와 위험을 겪기 마련이다. 바르트는 이를 죄 때문이 아닌 ‘무(無)’로 구분하였다. 이로써 악과 고난을 오로지 인간의 타락 탓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도덕문제로 제한하려는 관점을 저지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전체 화해 사역을 부정하는 근본 죄악이라며 창조의 어두운 면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답게 섭리론을 재정립하면서 악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보편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다운 새로운 접근인 동시에 악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초월적 해석의 프레임에 자신의 생각을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을 동시에 가지게 만든다.

4) 악의 본질(존 프레임)

(1) 악은 환상이다(크리스천 사이언스)

(2) 악은 하나의 결핍(PRIVATION)이다.

① 즉 긍정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어거스틴, 로마가톨릭, 종교개혁 ㅇ후 스콜라 전통, 현대 변증학자와 신학자 등).

② 모든 것은 선하다(창 1:31; 딤전 4:4).

③ 따라서 악은 실체 또는 사물이 아니라 실재하지 않음(NONBEING)이다.

5) 악에 대한 몇 가지 긍정적인(좋은) 측면들(파라독스)

(1) 악은 악의 문제에 대항하여 "더욱 탁월한 좋은 변증"을 이끈다.

(2) 악은 영혼 다듬기를 위해 필수적이다(역경이 지닌 파라독스).

(3) 악에 대한 반응로서의 동정, 인내, 용기, 정의를 추구함 그리고 친구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구속적 사랑(요 15:13)=부차적 선(SECOND-ORDER GOODS)<->원인으로서의 악(FIRST-ORDER EVILS)

(4) 고난을 통한 영혼 형성의 신정론(존 힉)

6)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본 악

(1) 더 큰 선(GREATER GOOD, 롬 8:28)

(2) 기준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의 선(기준의 없는 무신론자들)

(3) 인간 역사 속 평가(시 90:4, 천년이 하루같은 하나님, 롬 8:18,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4) 악으로 선을 이끄시는 하나님 섭리(요셉의 경우)

(5) 궁극적 신정론의 미래상(신앙 속 미래적 평가)

(6) 더 탁월한 선의 변증(THE GREATER-GOOD DEFENCE),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악의 사용을 정당화하는가?(입증 책임은 누구에게?)

(7) 창조주 하나님께 자기들에게 닥친 악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할 수 있을까? 죄?

4. 악은 진화 되었는가

현대 세속 과학의 우주 기원과 생명관은 분명 진화론에 주로 그 뿌리와 근거를 두고 있다. 진화론이야말로 설득력 있는 과학의 사실이라는 데 주로 근거를 두고 세속 과학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신학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신학자 존 맥커리(John Macquarrie)는 이 지구상 진화의 과정은 미리 잘 짜여 진 계획을 실현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보다 시행착오 속에서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수많은 낭비(waste)를 남기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진화론의 윤리적 입장이 주목된다.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저자들에 따라 다음의 4가지 개념으로 쓰여 진다.

첫 번째 개념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원리를 논리적 외삽(外揷, extrapolation)을 통해 윤리학의 영역으로 가져온 윤리학의 체계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투쟁, 경쟁, 선택, 생존과 멸종의 개념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진화의 과정이란 오직 가장 적합한 것만이 가장 잘 살아남는 개념이다. 이 같은 적자생존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해 어떤 윤리적 질서도 없이 오직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은 배려와 양보가 아닌 투쟁 가운데 오직 자신의 개체만이 우월적 생존력을 획득하게 되는 무자비한 승리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모든 질서의 주인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성경적 창조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두 번째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되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윤리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 즉 사회적 자각을 통해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부터 시작된다. 이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의 발달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 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성서적 관점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진화는 목적성도 방향성도 없으므로 당연히 도덕성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결국 진화윤리가 다분히 상황 윤리적임을 설명한다. 그 상황윤리에도 기준은 전혀 없다. 진화의 원리에는 당연히 선과 악의 구분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도덕의 가치도 만들어왔다고 보는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선하다는데서 출발한다(창 1장). 창세기의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함으로 창조론적 윤리와 가치의 규범의 틀을 제공한다. 특별히 피조물 가운데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가장 좋은 것으로 일컬어진다.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진화의 투쟁과 적자생존은 아무래도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이란 다분히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권위를 외면하고 컨텍스트 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고통에 대해 깊이 연구한 손봉호 박사는 과잉 괘락은 불필요한 고통을 요구하고 그 고통이 반드시 그 쾌락을 누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과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누군가가 그 때문에 병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절제는 자원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윤리적 행위의 기본이다. 조그마한 절제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정의롭게 바꿀 수 있음을 내다보았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진화 윤리학에서는 과잉 쾌락이 가져다주는 불필요한 이웃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자원해서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절제의 미학은 있을 수 없다.

셋째 개념은 인류 역사를 통한 인간윤리체계의 발달과 연관된다. 여기에는 윤리가 더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이 개념은 사람이 하등한 윤리 의식을 역사를 통해 고등한 윤리로 발달시켜왔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과 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결과한다는 개념과 상치된다. 선과 악의 개념조차 윤리적 발달 가운데 부각된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도킨스(R. Dawkins, 1986)는 진화에 있어 자연선택이란 단순히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시계의 운명과 같다고 본다. 시계공이 맹인이었다면 그 시계는 온전히 고쳐질 수가 없다. 눈먼 시계공 개념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이탈한 지구 전체 운명의 쇠락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진화론은 윤리 체계의 발달이란 그저 진화의 단계에서 생존에 급급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한 윤리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타난다(시 19:1-6).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하였다. 창조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연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요 구현(具顯)이다. 진화론자들이나 진화 윤리학자들이 진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지평 아래에서 해석을 시도한 경우는 전혀 없다. 선악이 구분조차 없이 눈먼 시계공에게 맡겨진 인류에게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는가!

넷째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채택에 적당한 진화 체계의 본질을 강조한다. 사실 이것은 글로 이해된 일반적인 진화론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윤리체계는 규범적 상태로의 윤리 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이며 알맞은 가치체계와 관련된다. 오직 채택할만하고 적합한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이 4번째 개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화의 개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단순한 진화론적인 진보적 발달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류가 윤리적 체계에 있어 역동적이며 알맞은 본질을 채택해 왔다는 것 자체에 더 강조를 두고 있다. 선과 악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진보적 발달 속에 필요할 때마다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선악의 기준은 없다. 즉 이것도 상황적 윤리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인간이 역동적으로 필요한 윤리를 채택해왔다고 보는데 비해 창조론적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다분히 상황적인데 비하여 창조론적 윤리학은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인 윤리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창조론적 윤리는 그 회복된 양심의 기준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찾는다(요 1:14).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과 기술을 지구에서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성서 전통이 모든 창조물들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 관심을 갖는 윤리에 크게 공헌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악도 진화 과정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는 면에서 선악에 대한 불변의 토대를 가진 성경의 본질과는 그 궤도를 달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Ⅳ. 성경의 인물로 본 악과 고통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단상

성경의 인물들을 정형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의 주요 인물들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각 인물들을 악과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정론적 해석에 접근해보려는 것이 신학적 단상의 취지이다.

1. 악의 시작(아담과 하와)

분명 악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첫 언약 속에는 이미 악의 가능성에 대한 염려가 들어있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처음 사람 아담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의 부산물이었다. 자유의지를 필요악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가 악이라는 요소를 결정적으로 판도라 상자처럼 세상에 뿌린 씨앗이 되었는가 하는 논쟁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칼빈주의와 웨슬리안-알미니안주의 논쟁으로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악은 아담 이전에도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악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타락과 추방 이후 세상은 죄로 물들기 시작하고 악은 흩어지고 범람하였다. 그 악의 매개자는 마귀였다. 악의 매개자가 마귀임이 분명하나 성경은 애석하게도 마귀의 기원이나 마귀가 어떻게 악의 매개자역할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 정보가 없다. 다만 악은 분명 그렇게 우리 곁으로 들어왔다.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의 시작이 모두 이때부터였다.

2. 타락 속 악에 대한 심판과 구원(노아)

악에는 댓가가 따른다. 타락한 세상에서 악은 창궐하였으나 세상에는 분명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도 있었다. 에녹이었다. ‘봉헌’(dedicatio)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둘이 있었다. 셋의 후손 에녹과 가인의 후손 에녹이었다. 가인의 도성의 이름은 놀랍게도 에녹이었다(창 4:17). 가인과 아벨처럼 사람들은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봉헌’의 삶을 시작한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성을 쌓았고 사람(가인)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에녹과 또 다른 성격의 의인이 있었다. 바로 노아였다.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서 영원한 심판과 구원의 원형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은 죄악이 땅에 가득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 오죽하면 하나님은 땅에 사람 만든 것이 후회가 되어 탄식하며 노아에게 심판이 있을 것임을 계시한다(창 6:7). 땅에 홍수가 나던 해 노아의 나이는 600세였고 노아가 세 자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은 500세가 지난 후였다. 그렇다면 홍수가 나던 당시 세 아들의 나이는 모두 100세 가까운 나이였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경 해석의 또 다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아는 500세까지 전혀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말인가? 딸들은 없었는가? 600세 되던 해까지 노아 부부에게 손주들은 전혀 없었는가? 아니면 셈과 함과 야벳과 그들의 자부(子婦) 등 8명을 제외한 가까운 친족들이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것이 지극히 작고 약한 것들을 사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 합당한가? 어찌되었든 죄악의 댓가로서의 대홍수 심판은 대격변이었다. 어떤 해석이든 우리 인간은 멈출 수 없는 악의 심각성과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절대성 앞에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 사건을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 속에서 악에 물들어버린 두 도성의 혼합으로 설명한다.

3. 악의 대중화 속에서의 믿음(아브라함)

악은 세상 속에서 만연하면서 대중화한다. 아브라함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성경 인물 중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대하 20:7).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브라함 시대를 하나님 도성의 청년기라고 말한다. 그런 인정 속에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 아브라함조차 세상에 만연한 악의 세력 속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우상 신을 섬기는 지역이었으며 비록 그는 하나님의 명(命)으로 고향을 떠났으나 사회적으로 만연한 악의 장중에서 그는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오랫동안 불임(不姙)에 시달렸고 급기야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다. 비록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상속자를 약속하였고 그는 그 약속을 믿었으나 기다림에 지친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취한다. 악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대중화된 악 앞에서 자연스럽게 그 악한 풍습에 매몰되고 그 악한 태도와 결과를 합리화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하갈로부터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곧 언약의 자손 이삭과 갈등 구조를 만든다. 하갈과 사라가 인간적 갈등에 빠지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오늘날까지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손들이 일으키는 종교적, 민족적 갈등을 보면 악의 구조가 사회 속에서 대중화되면서 얼마나 끈질기게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괴롭히는 가를 알 수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 아내 사라를 두 번씩이나 권력자들에게 스스럼없이 인계하려고 한 사건은 가나안 지역이 얼마나 남녀 차별이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어거스틴은 아브라함을 악에 물들게 만들어버렸던 두려움은 바로 심판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렇게 악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에게조차 대중화되었던 것이다.

4. 악한 구조 속에서의 삶의 모범(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 진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의 대중화된 구조 속에 매몰되어 살았다면 이삭은 좀 더 악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적 삶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노년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한 이삭은 마치 아브라함과 야곱의 연결고리 같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삭은 미숙한 우리 인간이 악의 대중화 된 구조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순종의 모범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도 아브라함처럼 약속된 신탁(信託)의 인물이었다(창 26:15). 이삭은 약속된 언약의 할례를 받았으며 모리아에 있는 한 산에서 결박당해 번제로 드려질 준비까지 순종하였다. 마치 털 깎인 어린 양처럼 십자가 지러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아무리 신앙인이더라도 이삭처럼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자녀란 늘 자신이 부모에게 불효자임을 인식할 뿐이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눈에 띠는 인물이 아니었을지라도 이삭은 분명 악이 구조적으로 대중화된 사회 속에서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된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소실도 두지 않았고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고 한 아내로 만족하였다. 이방인들로 넘쳐나는 가나안 땅에서 그는 믿음으로 살며 노총각으로 지내다 40세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예비된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를 만난다. 이들 부부도 아브라함-사라부부처럼 난임(難姙)의 부부였다. 그들이 자녀를 얻은 것은 부부가 된지 20년이 지난 이삭 나이 60세 때였다. 바로 쌍둥이 자녀 에서와 야곱이었다. 비록 믿음과 순종의 이삭이었으나 그도 미숙한 인간이었다. 그는 에서를 편애(偏愛)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누구보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산 이삭도 결국 악의 구조 속에서 미숙한 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5. 악은 예정되었는가(에서와 야곱)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것이 창조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 더 좋다고 보았다. 그런데 왜 악은 근절시키지 않는 것일까? 믿음과 순종의 사람 이삭의 쌍둥이 자녀 가운데 왜 하나님은 에서는 버리고 야곱은 택한 것인가? 에서는 왜 망령된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 이삭이라는 언약의 후손으로서 왜 하나님은 쌍둥이를 차별하신 것일까? 이것은 악의 예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의지의 무한책임을 져야하는가? 이 신학적 논쟁은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양측이 아주 팽팽하다. 따라서 이 사안은 신정론을 추적하는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로 여기서 심각히 다룰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신정론을 다루는 입장에서 악의 구조를 놓고 인간은 이렇게 에서와 야곱처럼 갈라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신본주의가 아닌 인간중심주의로는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보다 그리 도덕적인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그 해석과 행동 모두에서 악의 존재 앞에 이렇게 미숙한 것이다. 미숙하다는 면에서 이렇게 비슷한 심령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에서와 전혀 다르게 야곱은 도대체 어떻게 “거짓말쟁이”에서 “이스라엘(하나님을 이긴 자)” 칭호를 듣게 된 것일까? 하나님은 이 우주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 우리 인간이 핑계할 수 없는 신비적 예표를 주었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즉 그것은 십자가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대드라마를 향한 천상적 예표를 보여주는 구약 사건이라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역사는 예정이냐 자유의지냐를 떠나 인간을 영벌(永罰)의 길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의 길임을 성경은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밀로 남아있다”는 벌콥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의 고백에 우리도 함께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오직 깨달은 자는 어거스틴처럼 "복된 죄악이여!"(felix culpa!)라는 파라독스적인 고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6.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예수의 모형으로서의 요셉)

야곱이 진정 사랑하던 아내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 요셉은 예수를 참 많이 닮은 존재이다. 요셉의 꿈과 형들에게 당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시련과 억울함과 오해는 낮은 곳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예수의 삶을 연상케 하는 게 사실이다. 즉 노예로 억울하게 끌려간 애굽 땅에서 모든 환란을 딛고 형통한 사람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긴 요셉은 예수의 모형(模型)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애굽 땅에 들어온 형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사랑하는 막내 동생 베냐민을 보고자 했던 요셉의 마음이나 동생 베냐민의 자루 속에 몰래 자신의 은잔을 숨겨 도둑 누명을 쓴 베냐민을 자기 곁에 두고자 했던 요셉의 계략은 세상 악의 구조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요셉의 전략적 지혜는 마치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려달라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처절한 간청을 외면하는 듯 보였던 예수님의 낯선 응답 방식과 닮아있다. 예수와 요셉 모두 결국 선으로 악을 이겼다.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는 신정론을 루터란 철학자였던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가장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능한 “가장 위대한 세계”(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위대한 방법”이라고 주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형으로 나누었다. 씨 에스 루이스는 그 가능한 최선은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와 죄의 악한 결과들을 모두 떠맡으셨다는 사실이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공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신 십자가 사랑이었다.

7. 악의 배후 사단(욥)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성경은 다시 한 번 악과 고통의 배후에 대해 알려준다. 바로 있는 사단이었다(욥기, 왕상 22장).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였다. 욥기서는 바로 하나님이 욥을 가르친 책이었다. 인과응보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가혹하고 엄청난 감당키 어려운 시련이 욥에게 일어났다. 오늘날 처처에서 일어나는 잔인하고 흉악한 살인, 강도, 홍수, 지진, 가뭄, 기아(飢餓) 등과 유사한 시련이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제시한 위로와 충고와 권고는 당연히 인과응보적 해석이었다. 이 때 하나님은 직접 욥에게 현현(顯顯)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70여 개에 달하는 그 내용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창조주 하나님이 던지는 자연계시적 질문이었다. 즉 욥이 처한 형편에 해당되는 질문이나 처방전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욥을 향한 마지막 두 동물을 통한 클라이막스에서 질문의 안개와 그림자가 서서히 거두어지고 본 모습이 드러났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이라는 두 동물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는 논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동물 가운데 으뜸인 동물 ‘베헤못’을 창조한 모든 세상의 창조주요 주관자라는 것과 ‘리워야단’처럼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한 존재를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즉 두 동물은 모든 것의 주관자요 주인인 ‘창조주를 기억하라’와 ‘교만한 (영적) 존재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두 가지 깨달음을 욥에게 선사하였다. 욥은 이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미숙하고 교만한 존재였는가를 깨닫고 즉시 회개하였다. 참된 회개였다. 그리고 욥의 고난과 고통은 사단이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함께 영육 간에 해결되었다.

8. 인과응보에 대한 오해(욥의 친구들)

사람들은 늘 상식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선입관(偏見先入觀)이다. 즉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 같은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사고는 인간이 품은 아주 오래된 편견 가운데 하나이다. 창세기 11장까지를 제외하면 욥기는 성경의 가장 오래된 책이다. 이 욥기서에도 당연히 이 같은 사고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오래된 책인 만큼 욥기서에는 십계명이나 모세 율법이 없는 대신 인간의 선과 악, 죄악과 심판, 상과 벌 등 인간이 지닌 생생한 문제들이 파노라마처럼 나열되고 있다. 욥에게도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그는 절대자의 명령을 입술로도 어기지 아니하였다(욥 23:12).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요(욥 1:3) 대중과도 친밀한 선교사 바나바처럼 안위(安慰)의 사람이었다. 그런 욥에게 커다란 고난이 닥쳤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 절망과 탄식은 감당키 쉽지 않은 대재난이었다(욥 3장). 이 재난의 해석과 해결책을 찾아 욥의 친구들이 나셨다. 글들 모두는 각기 거처가 다른 지역 출신들이었다. 욥이 우스 사람이었던 반면 그의 친구들은 수아(빌닷), 나아마(소발), 데만(엘리바스), 부스(엘리후) 등 타 지역 사람들이었다.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결백을 주장한 반면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원리로 맞선다. 선한 창조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악의 범람으로 파괴된 것처럼 욥의 고난은 드러나지 않은 욥의 심각한 죄로 인한 하나님의 당연한 징벌인 것이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그 내용은 욥기 4장부터 시작되어 31장까지 지속된다. 좀 더 젊은 엘리후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욥 32-37장)? 욥과 친구들을 향한 엘리후의 장황한 말은 그럴듯하나 실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젊은이가 좀 더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동서고금(東西古今)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젊은이였던 그의 말도 결국 욥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과 죄 된 인간, 인간의 감정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상식 수준의 충고요 감정 토로에 볼과하였다.

인과응보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우리 인간이 범하는 가장 일반적인 실수이다.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때로 어떤 커다란 과오도 용서가 되는 가하면 작은 교만도 커다란 화근과 심판을 가져온다. 인간의 상식과 판단을 넘어서는 일들은 세상 속에서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아론과 다윗과 사무엘과 엘리의 자녀들을 보라. 이 위대한 인물들의 자녀 가운데 천륜과 인륜에 반하는 패륜의 자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한 예수님의 족보를 보라! 예수님 족보에 보이는 이방 여인(룻)이나 술집 작부(라합)이나 시아버지 유다의 자녀를 낳은 다말을 보라! 유대인과 한국인들은 세상 최고의 정밀한 족보 체계를 보유한 민족이다. 한국인들이야말로 족보 체계에 대한 이해가 아주 빠른 민족이다. 한국의 족보들을 보라! 그 많은 역사의 간신배들과 역적들은 족보 속에서 거의 보이지를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수많은 유명 인물들의 과오와 실책이 각 성씨들의 족보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교적 충효의 사상 중심으로 족보는 인물들을 채색한다. 부끄러움을 숨기고 장점은 부각시켜 인과응보에 대응하려는 각 성씨 족보 기록자들의 신념 탓이라고 보아야 할까?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인물들의 과오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인과응보적 선악, 심판 사상은 십자가 앞에 여지없이 부서진다.

9. 악과의 투쟁은 어떻게 성공하는가(다윗)

선으로 악을 제어하는 요셉의 경우와 조금 다른 형식의 투쟁을 다윗에게서 보게 된다. 그것은 악과 투쟁이요 악과의 전면적인 전쟁 선포의 방식이다. 징정한 애굽 도성과 출애굽 도성의 싸움이다. 요셉의 형식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십자가 방식이라면 다윗의 투쟁은 악과의 전면전이다. 성경은 악한 원수 마귀는 사랑과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꾸짖고 대적해야 될 존재로 지적한다. 악과의 전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통과 피투성이의 처참한 싸움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그 마귀의 시험을 친히 당하셨다. 이 시험은 간단하지 않으나 그 치열한 싸움에서 용서와 사랑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항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성문 밖으로 나가 그 치열한 골고다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그 때 고통의 의미도 알게 되고 유익도 알게 된다. 고통은 피하고 싶은 실재이나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누구나 떳떳하게 말한다. 그 고통이 힘들기는 하나 무익한 체험은 결코 아니었다고. 다윗도 당연히 죄인이었다. 충성스런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이요 그 댓가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선지자 나단의 지적은 다윗의 일생에 다윗의 평생 야전(野戰) 전투와 비길 수 없는 엄청난 심적 고통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면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였다. 다윗과 심정이 같은 우리들은 단순히 용서와 사랑만 외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악과 싸우는 것인가 다윗의 모범에서 그 전쟁의 전술전략을 찾아내고 실천해야 한다.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승리 요인은 단순한 전쟁 선포와 전면전을 통한 싸움이 아닌 다른 요소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 싸움의 도구는 놀랍게도 시련 중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시 3-6, 12-13, 70 등), 영적 소망(시 7장), 자연의 주관자 찬양(시 8장),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소통(시 11), 순결(시 101), 은혜(시 103), 확신(시 108), 메시야의 통치(시 110), 샬롬(시 122), 신뢰(시 131) 섭리와 언약(시 132), 감사(시 138), 사랑(시 145), 악으로 부터의 탈출(시 141) 등 다양한 요소들과 관련된다.

이 싸움은 근본적으로는 세상 능력이 사움이 아니라 언약을 가진 자(출애굽 도성)과 언약을 모르고 무시하는 자(애굽 도성)과의 싸움이다. 시편 89장은 그리스도의 언약 아래 있는 다윗의 영광을 보여준다. 애굽을 살해당한 자처럼 박살낼 수 있는 분은 모세나 다윗이 아니라 다볼산과 헤르몬 산을 만든 분이다. 이 전투를 지휘하고 악인에게서 다윗을 지켜주시는 분은 다윗 자신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요 그의 후손들까지 복에 복을 받을 것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다윗은 승리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10. 악에 매몰되지 말라(솔로몬)

세상에 과연 솔로몬처럼 다재다능하고 위대한 인물이 있었을까? 그는 기도 속에 지혜와 부와 명예까지 얻는 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였으며 그는 식물과 동물에 관해서도 매우 박식했다(열왕기상 4:29~34). 또한 그는 3천 가지 잠언을 썼고 1천여 곡의 노래를 지은 시인이요 음악가였다.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우긴 소동 가운데 아이의 생모를 찾아준 솔로몬의 판결은 그의 충만한 지혜로 보여준다(열왕기상 3:16~28). 또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사람이었으며 언약궤를 그곳에 안치한 사람이었다. 시바 여왕과 세기의 연애를 했을 뿐 아니라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 아버지 다윗이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살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 덕분으로 평화의 왕으로 살았다.

솔로몬 스스로 잠언에서 고백한대로 사람은 선줄로 알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솔로몬의 여성 편력은 이방 여인들에게까지 눈길을 돌린다. 그들은 이방 종교와 그 우상을 유대 사회에 가지고 들어왔다. 세상적 형통이 모두 선은 아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 형통은 겨우 '들의 백합화'만도 못한 스쳐지나가는 썩어질 가치에 불과했다(마태복음 6:28~29). 하지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징계는 하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버리지는 않으신다. 다만 지혜의 사람 솔로몬이 미련하게 악에 매몰되었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얼마나 악에 유혹 당하기 쉬운지 모든 인간에게 경종을 울린다. 악은 이렇게 질기고 집요하다. 솔로몬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잠언과 전도서를 통해 악에 매몰되지 말고 악을 극복할 것을 권면한다. 세상의 영화는 지나고 보니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었다. 솔로몬은 겨우 말년이 되어서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이 깊은 사랑을 깨달았던 것이다. 왜 성경이 거듭해서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만 못했다고 말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솔로몬의 교훈은 왜 신앙의 연륜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때론 죄악의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11. 악에 대한 선지자들의 외침과 투쟁(모세 그리고 선지자들)

악은 과연 무엇인가? 유대인들조차 악의 구별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탁(信託)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탁으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 이 출갈대아 우르, 출애굽, 출마귀, 출지옥의 투쟁에 외롭게 좁은 길로 들어선 선봉장이 되었다. 이 진정한 출애굽은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로 건너가는 파스카(Pascha, 해방절, 유월절)를 예표한다. 이 ‘파스카’는 히브리 말로 바로 ‘건너감’을 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기 행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보다 보기에 좋은 것으로 가버렸고, 모세도 백성들에게 배척당하였고 심지어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도 모세에게 도전하였다. 사사들은 희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도자보다 자기들 옳은 대로 행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희귀한 사람이었다. 예레미야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들로부터 매국노 소리를 들었다. 선지자들은 많았고 예레미야는 마이너리티였다. 백성들에게 악은 익숙하였고 분별은 쉽지 않았다. 하나님의 진리는 만민에게 열린 빛과 같은 것이었음에도 세상은 어두웠고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분별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이스라엘은 안식의 범조차 잃어버렸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죄악에 익숙한 이스라엘 민족은 필연적으로 어둠 가운데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외쳤다. 태평성대를 외치는 선지자들이 즐비한 시대에 심판을 외친 예레미야는 당연히 매국노였다. 이렇게 세상은 어두웠다.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 졌는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환상은 북쪽에서 폭풍을 몰고 오는 큰 구름 속에서 번쩍거리는 빛으로 임하였다. 그 불 가운데서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 같은 것이 보였다. 보통 인간들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충격 요법으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찾아와 자신을 계시하였다. 이렇게 참 하나님은 희귀한 분으로 잊혀져 있었다. 죄악이 만연한 시대 희귀한 선지자들은 그 악을 분별하고 죄와 악에서 돌아설 것을 외친 사람들이었다. 싸움의 정석은 이 분별력으로부터 시작한다. 악의 세력은 만만치 않으며 늘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 믿음의 싸움은 분별력과 투쟁을 모두 요구한다. 선지자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엘리야가 그랬고 엘리사도 그랬다. 모든 참된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외치는 소리였다.

12. 영원한 선(사랑)으로 악을 이겨라(제자들의 삶)

선지자들이 악과의 전쟁 선포였다면 이제 주님의 제자들은 다른 방식을 취한다. 일찍이 요셉이 터득한 그 방식이다. 성경은 예수 제자들에게 고난의 자리로 가라한다(히 13:13절). 능욕 당하는 자리로 나아가라 한다. 예수는 예수 제자들에게 값진 고난을 요구한다. 십자가 없는 승리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다. 십자가 신학과 부활 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 십자가 신학이 루터 신학이라면 부활 신학은 칼빈적이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한 점에서 만난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가 없다. 강조점만 다를 뿐 이 두 가지는 함께 강조되어야할 신학의 기초이다. 어떤 성문 밖으로 갈 것인가. 능욕과 고난의 자리는 어디인가! 성경은 예수 십자가의 길처럼 능욕의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사실 그런 장소는 죽음의 장소이다. 능욕의 장소는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종말로 가는 장소이다. 십자가는 결국 제자들을 악과 고통에 대한 종말적 이해에 다다르게 한다. 진정한 승리와 회복과 영원한 사랑이 회복되는 궁극적 지점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긴 십자가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요일 4:16) 안에서 보호될 것이다(마 13: 29-30).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롬 8:28) 악과 고통이 없는 새 세상이 열릴 것이다. 신정론은 이렇게 미래에 완전하게 보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여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memento mori!"

Ⅴ. 나가면서

신정론의 문제는 그동안 주로 철학과 신학이 끊임없이 다루어 온 중요한 주제였다. 본 논고는 좀 더 성경 속으로 들어가 성경의 주요 인물들은 악과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상황을 예표하고 있는 지 성경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수천 명에 달하는 성경의 모든 인물들을 정형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최초로 성경의 대표적 인물들을 12 가지 신학적 단상으로 정리해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앞으로 이를 바탕으로 좀 더 체계화된 신정론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정리가 가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