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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세례요한교의 세례(영지주의적 만다야교,Manda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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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교의 세례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에베소에 있는 열두 명 가량의 '제자들'이 등장한다(행 19:1,7). 바울이 이들과 대화를 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고 답했다.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고 했다.

 

바울은 이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한 말을 일러주었다.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고 말했다. 세례 요한이 가리키는 분은 예수이며, 그 분이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그러자 그 '제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사도 바울이 안수를 하자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사도적 표적 방언을 말하고 예언도 했다.

 

에베소의 이 '제자들'은 '세례요한교'로 알려진 종파의 신자들로 추정된다. 예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다. 안드레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이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십니다"(요 1:29)라고 했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서 돌연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예수는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안드레에게 "나를 따르라,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겠다"(마 4:18-19)고 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를 추앙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례요한교'의 신자들이다. 지금도 존재하는 이 종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유일신교 영지주의(gnosticism) 종파이다. 공식 명칭 만다야교(Mandaeism)이다. 이 종교는 세례 요한을 창시자, 교주, 지고의 존경스런 인물로 여긴다. 세례요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일한 방식의 세례를 거행하고 있다.

 

만다야교는 유대교 뿌리를 가진 팔레스틴 거주민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바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추종자들이 상당히 많이 살았고, 에베소에 열두 명 가량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주후 1세기, 예루살렘이 파괴된 무렵에 페르샤 제국에 정착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하류 지역과 이라크와 이란의 접경지역에 주로 거주했다. 지금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등지에서 살기도 한다. 시리아와 요르단에도 소수의 신자들이 살고 있다. 현재 전 세계의 만다여교 신도 수는 약 6만, 7만 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라크와 이란 접경 지역에 2007년경 약 5,000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라비아 지역 이슬람권은 만다야교와 사비교(Sabians)와 동일시한다. 사비교도 세례요한의 제자로 자처한 종파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현재는 후계자들이 없다고 한다. 만다야교가 사비교를 환영하지 않은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만다야교의 존재는 영국국영방송(BBC)과 영국국교회 신부 등 외부인들이 이 종교를 세상에 알리면서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영국 옥스퍼드에서 이 종파에 대한 학회가 열렸다. 이 종교는 한동안 '세례요한 기독교'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 종교는 신조와 교의 체계보다 실천 전승에 크게 의존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만다야교가 믿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무형상의 지고한 존재: 이 존재가 시공간 속에서 나타날 때 영계(spiritual world), 에텔계(etheric world), 물질계(material world)와 이들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창조한다. 이 세계들을 창조하는 행위 자체는 이 존재가 창조권을 위임한 해당 세계의 단수 또는 복수의 창조자 또는 조물주에 의해 이루어진다. 물질 우주는 원형 인간(Archetypal Man)에 의해 창조되었다. 원형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물질 우주를 창조했다.

 

2) 이원론: 우주적인 아버지와 어머니, 빛과 어둠, 좌와 우를 비롯한 대대(對對)의 쌍들인 시즈지(syzygy)들이 우주적 측면과 소우주적 측면에 존재한다.

 

3) 이데아의 세계: 이러한 이원론의 한 특징으로 물질세계의 만물의 원형으로서의 이데아의 세계(world of ideas) 곧 지고한 존재와 생각의 세계가 존재한다.

 

4) 고급계로부터 실락하여 물질계에 속박되어 있는 영혼: 인간의 영혼은 고급계로부터 실락하여 물질계에 속박된 상태에 처해 있다. 인간의 영혼이 결국에 되돌아가야 할 고향은 지고한 존재 그 자체이다.

 

5) 별과 행성의 영향력: 별들과 행성들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이것들은 사후에 영혼이 구금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6) 단수 또는 복수의 구세주 영: 각 영혼이 삶의 여정을 가는 동안 그 영혼을 돕는 단수 또는 복수의 구세주 영(saviour spirits)이 있다. 또한 이들은 사후에 그 영혼이 '빛의 세계들'(worlds of light)로 여행하는 것을 돕는다.

 

7) 상징과 은유의 컬트, 종교적 언어: 지고한 존재의 이데아들(ideas: 생각들)과 특질들을 의인화하여 표현한다.

 

8) 신비 의식(Mysteries): 영혼을 돕고 정화시키며, 영체(spiritual body)로 재탄생(rebirth)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물질 세계로부터 고급계로 상승할 수 있게 하는 성례전 곧 '신비 의식'(Mysteries)이 존재한다. 많은 경우, 이 신비 의식들은 계절 마다 행하던 기존의 전통적인 의식에 밀교적인 해석을 더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9) 엄격한 비밀 준수: 만다야교의 비전가들(initiates) 또는 입문자들에게는 엄격한 비밀 준수가 명해진다. 위의 (1)의 지고한 존재, (2)의 이원론의 대대(對對)의 시즈지(syzygy)들, (8)의 신비 의식에 대한 상세하고 완전한 해설은 이러한 신비 가르침(gnosis, 그노시스)을 알아듣고 그 비밀을 엄수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만 전수된다.

 

만다야교는 결혼과 출산에 높은 가치를 둔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중요시한다. 가족생활에 높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성직자는 독신 생활(celibacy)이나 금욕 생활(asceticism)을 하지 않는다. 술과 같은 강한 음료나 소·양·돼지고기 등의 삶았을 때 살이 붉은 고기(red meat)를 먹는 것을 삼간다.

 

만다야교는 행성의 아르콘들(archons)이 물질 세상을 지배하며, 따라서 이 세상은 '감옥'(prison)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감옥은 잔인하지 않으며,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다른 영지주의 분파들과 같다.

 

이 종교는 《경전 대전집》, 《긴자 라바》, 《아담의 서》, 《만다야교의 기도 정전: 라스타》, 《세례자 요한의 서》 등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만다야교의 주 특징은 자주 거행하는 세례(洗禮)와 세례 양식(mode)이다. 이 종교의 세례는 전체적으로 보아 온 몸을 물에 적시는 목욕, 목욕재계이다. 침수(immersion) 형태의 씻음 예식이다. 물로 영혼의 더러운 것을 씻어야 영혼도 맑아진다고 본다. 그래서 정결례를 강, 호수, 실내 탕에서 행한다.

 

'세례요한교'의 세례 양식은 침례교인이 생각하는 침례 형태가 아니다. 온 몸을 물에 적시는 일종의 침수 예식이지만 온 몸을 물표면 아래로 담그는 것을 본질로 여기지 않는다. 세례자가 피세례자의 몸을 뒤로 눕혀 물속에 담그는 침례가 아니다. 물을 튀겨서 적시기-끼얹기(splashing), 뿌리기(sprinkling), 붓기(pouring), 관수(灌水, affusion), 물 뒤집어쓰기(watering), 물로 씻기(washing), 독자적 잠수(submerging oneself), 독자적 목욕재계(ablution themselves) 등으로 구성된다.

 

 

세례자와 피세례자 무릎 높의 물에 들어간다. 피세례자가 앉은 자세로 약간 엎드리면, 세례자는 피세례자의 몸에, 특히 머리와 얼굴에 물을 끼얻는다. 물을 머리에 붓고, 뿌리고. 찍어 바른다. 얼굴을 물의 표면에 세 번 가볍게 담그기도 한다. 물을 입 안에 세 번 넣어주어 씻게 한다. 피세례자 스스로 몸을 물 안에 푹 담그기도 한다. 몸을 약간 앞으로 엎드리는 자세나 곧바로 서서 자신의 몸을 물속에 완전히 담그기도 한다.

 

 

만다야교는 유아세례도 거행한다. 기독교인은 세례를 일생에 한 번 받지만 만다야교 신자들을 자주 세례식을 한다. 매 주일 하거나 가끔하기도 한다.

 

침례교 침례는 세례자가 피세례자의 머리와 몸을 뒤로 눕여 물 안에 완전히 잠기게 한다. 피세례자가 물이 코에 들어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코를 잡거나 호흡을 조절하면 세례자가 물속으로 집어넣고 완전히 잠기면 물 표면 밖으로 올라오게 한다.

 

 

침례교 신자들은 이 양식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한다. 세례(침례)를 '씻고 말리는'(wash and dry) 형태가 아니라 '죽고 다시 사는'(die and live again) 형태의 신앙고백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침례교는 침례-세례의 본질을 잠김 행위로 본다. 몸 전체를 물속에 완전히 잠그는 것을 세례의 본질로 여긴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어느 교수는 “뱁티즘의 성서적인 의미는 ‘씻는 예식’(세례, 洗禮, washing)이 아니라, ‘물속에 잠그는 예식’(침례, 浸禮, immersion)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침례교 신자들은 '침례'(immers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몸 전체를 물의 표면 안에 잠그는 잠례(潛禮, submersion)를 상상한다.

 

잠길 '침'(沈)은 완전히 잠기는 경우만 아니라 부분 침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발목, 정강이, 허벅지 높이에 물이 차오르는 경우와 홍수로 물이 집 안에 조금만 스며들고 방바닥만 적셔도 이를 '침수'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침례'라는 용어는 침례교 신자들이 상상하는 '침례 양식'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침례'(immersion)보다 '잠례'(submersion)가 더 적합한 용어로 보인다.

 

헬라어 동사 '밥티조'(baptizo)는 '물로 씻다'(to wash), '물을 끼얹다,' '물이 젖게 하다'(to immerse), '끼얹거나 담궈 깨끗하게 하다,' '물로 깨끗하게 하다', '목욕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옷을 '염색하다', 우슬초를 피에 '적시다'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명사 '밥티스마'(baptisma)는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글성경은 이 단어를 모두 '세례'로 번역한다. 침례파 형제자매들은 애써 한글성경의 '세례'를 '침례'로 발음한다.

 

 

세례(침례)를 담금 의식으로 보는 침례교도들은 성경의 세례와 관련한 "물로 내려가다"는 표현을 피세례자가 물의 표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다'를 물속에서 물표면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시니"(마 3:16)를 물에 잠겼다가 물 표면 밖으로 올라온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관점은 사도행전 8장의 세례 이야기와 상충된다. 전도자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마차 위에서 읽던 그 이사야서가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은 수례를 멈추고 세레를 행했다. 두 사람이 함께 물로 내려갔고, 두 사람이 함깨 물에서 올라왔다. 세례자와 피세례자 모두 물로 내려갔고 세례를 마치고 둘 다 물에서 올라왔다.

 

나는 예일대학교 신학부 학생 시절(1980년대 초)에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장소를 탐색한 적이 있다. 예루살렘유니버시티칼리지의 '성경의 역사와 지리적 배경' 과목의 과제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남쪽 길"(행 8:26)을 따라 물이 있는 곳을 탐색했다.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은 세 방향이 있다. 서쪽 샤론지역을 향한 비탈길은 마차가 통행하기 어렵다. 중간 방향의 한 없이 꼬불꼬불한 길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통행이 불편하다. 마차를 탄 채로 성경을 읽고 타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유대 산지의 평평한 내리막을 따라 내려가는 남쪽 길이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 가까운 지역을 통과하면 헤브론-가자로 내려가는 도로 길가에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물 저장탱크가 있다. 그 지역 주민들은 이곳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바로 그 장소라고 한다.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곳이라는 것이다.

 

사막 지대인 유대 산지를 여행자들은 물이 있는 곳의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빌립에게 "자, 여기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행 8:36). 그곳의 물 탱크의 물을 이용하려면 열두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세례에 필요한 물에 접근하려면 세례자와 피세례자가 "물로 내려가야"(행 8:37)했다. 그 지형과 물탱크의 형태를 고려하면 그릇이나 손으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세례를 행한 것 같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물에서 올라왔다(행 8:38).

 

우리나라에서 강둑에서 물가로 내려가는 것을 "물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로, 물가에서 강둑으로 올라옴을 "물에서 올라오다"로 표현한다. 세례자와 피세례자가 다 '물로 내려갔다'가 함께 '물에서 올라왔다'라는 표현은 이와 똑같다. 그리고 이 표현은 사해 북부 쿰란의 에쎄네파 공동체의 세례에 사용된 물 저장 구조와 일치한다.

 

에세네파 공동체는 매일 아침 정결례 곧 세례를 했다. 매일 몸을 씻었다. 빗물을 모아 사용했다. 적은 양의 물로 온 몸을 씻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 저장소에 접근하려면 약 열두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씻기를 마치면 물에서 열두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쿰란의 물 저장소는 예루살렘에서 헤브론-가자로 내려가는 길 가에 있는 로마 시대의 물 저장 탱크 구조와 동일하다. 전자는 샘물을 저장하는 탱크이고, 후자는 빗물을 모아 사용하는 구조이다. 유대인의 결례대인 미끄베와 비슷한 구조물이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애논'으로 장소를 옮겨 세례를 베풀었다. 애논은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8마일 지점에 있다. 사막 지역이지만, 연일 소나기가 내린 뒤에 여기저기의 작은 물줄기들에서 물이 나오는 것과 같다(요 3:23). 애논의 수량(水量)은 개울물 정도이지만, 조금 씩 흐르는 '물들' 곧 물줄기들이 많다. 이곳에서 몸을 물표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하기에는 물의 양이 적고 물의 깊이가 얕다. 물을 끼얹거나 머리에 부어 온 몸을 씻는 세례에 적합한 맑은 '물들'이 많다. 1980년대 초, 내가 이곳을 탐색했을 때, 가장 깊은 곳의 물의 깊이는 50센티미터 정도였다. 무릎에도 미치지 못하는 높이였다.

 

침례파 형제자매들은 세례가 아닌 침례가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그 양식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성경 로마서 6장 3절과 4절과 골로새서 2장 12절을 근거로 삼는다. 이 성경구절들의 '세례'는 물세례 또는 물세례 양태를 일컫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뜻하는가?

 

로마서 6장은 기독인이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을 말한다. 6장 3절은 동사형 '밥티조'를 두 번 사용한다. "우리가 예수에게로 세례되어 짐은 그의 죽음에로 세례 되어 지는 것이다"(many of us as were baptized into Jesus Christ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4절은 명사형을 한 번 사용하여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가 "세례로 그의 죽음에로 장사된다"(we are buried with him by[through] baptism into death, KJV)고 말한다. 로마서 6장의 '세례'는 물세례 또는 세례 양식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기독인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바울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고 말한다. 이 구절은 명사형 '밥티스마'를 사용한다. 이 구절의 초점은 '함께'라는 단어이다. 골로새서가 언급하는 '세례'는 그 예식의 의미 곧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해 보인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을 뜻하는 것으로 말한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이 구절에 등장하는 세례는 동사, 직설법, 과거형, 수동태, 복수 표현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수동적 죄 씻음으로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 곧 연합되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 자복'(마 3:2,6)을 조건으로 하는 죄 씻음의 예식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자신이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고 또 그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마 3:11)고 말했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시다. 왜 그가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마 3:15) 때문이었다. 이처럼 세례요한의 세례와 기독교의 세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요 3:22; 4:1-2). 세례요한이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 저 편에서 세례를 베푸는 예수에게 세례를 받으려 몰려갔다. 요한의 제자 한 명이 이를 문제삼아 변론을 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기뻐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했다. 세례 요한의 세례의 양식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세례 양식이 같았으며, 세례의 개념이 바뀌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만약 양식과 개념이 달랐다면 상당한 쟁론이 일어났을 것이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약 3천 명 가량의 개종자들도 회개와 죄 씻음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았다. 복음을 들은 자들은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를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어찌 할꼬"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7-38)고 했다. 바울은 예수 이름으로 '회개의 세례'(행 19:4,5)를 베풀었다. 만다야교가 물로 몸을 씻으면 마음과 영혼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하면서 행한 씻음의 예식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거행한 것 같다. 이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가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명했다.

 

네게브 사막의 기독교 노바티안교회당 세례대는 온 몸을 물속에 잠그는 양식으로 세례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이다. 피세례자가 십자가 형태의 세례대 안에 서면 세례자가 밖에서 물을 피세례자 머리에 붓는 형식으로 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례대에는 항아리 모양의 석고물이 만들어져 있다. 물을 담는 곳처럼 보인다. 예일대학교 예술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두라 유로푸스의 기독교회당 세례대는 침례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작은 크기이다. 현대 아파트의 작은 욕조 정도의 크기이다.

 

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세례 양식에 대한 상당히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초기 기독교의 세례 양식이 만다야교의 세례 양식과 다르지 않음을 뒷받침한다. 세례는 물속에 온 몸을 잠그는 예식이 아니라 물을 뿌려 몸을 씻음의 예식이었으리라고 짐작하게 한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세례는 죄 씻음을 상징하는 예식이었다.

 

주후 95-150년경에 만들어진 교회 규례서 <사도들의 교훈집>, 일명 <디다케>(Didache)는 흐르는 물(running water)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말로 세례를 베풀라고 한다. "만약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에서 세례를 주어라. 만약 너희가 찬 물에서 세례를 베풀 수 없으면 따뜻한 물(warm water)을 사용하라. 만약 너희에게 이 두 가지 물이 없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머리 위에 세 번 부으라"(If you have neither, pour water on the head thrice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Holy Spirit)고 한다. '흐르는 물'은 활수 곧 맑은 물을, '따뜻한 물'은 빗물 저장고 물이나 고인 물 등 미지근한 물을 지칭한다.

 

머리에 물을 붓는 세례 양식을 '약식 세례,' '약례'(略禮)라고 일컫는 침례파 신자들이 있다. 이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 물을 붓는 형태의 세례도 세례 유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교' 세례에는 세례자가 피세례자의 머리에 물을 붓기도 한다. <디다케>는 이 방식을 '약식 세례' 또는 '약례'라고 칭하지 않는다.

 

초대교회당의 세례 모자이크에는 조개껍질이나 물그릇에 물을 담아 머리에 붓는 형태의 세례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초대기독교가 만약 '밥티조'가 '씻는 예식'(洗禮, washing)이 아니라 '물속에 잠그는 예식'(浸禮, immersion)으로 이해했다면, <디다케>가 물을 머리에 세 번 부음으로 행하는 세례 양식을 교회의 세례 규례로 제시할 까닭이 없다. 사도들이 세례의 본질이 '물속에 잠그는 예식'으로 이해했다면, 정신 나간 상태가 아니고서는 교회를 향하여 본질에서 벗어나는 형태의 세례를 하라고 가르칠 까닭이 없다. <디다케>는 브리에니오스 필로세우스(Bryennios Philotheus)라는 학자가 콘스탄티노플의 어느 도서관에서 1873년에 발굴했고, 1883년에 공식 출판되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후 기독교의 물세례가 씻음 예식(세례)의 양식에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예식(침례, 잠례)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없다. 세례의 의미가 씻음에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몸의 완전한 잠김으로 바뀌었음을 명시하는 기록은 없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과 골로새서 2장 12절의 '세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인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뜻한다. 이 구절들에 나오는 '세례'가 정결례의 양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침례파 신자들의 '해석'이며 '상상'이다. 지금까지 침례파 관점과 동일한 해석을 담은 초대 교회사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세례요한 당시의 세례 양식과 현대 세례요한교- 만다야교의 세례 양식이 동일한기?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양식과 오늘날의 만다야교 신도들의 세례의 양식이 다르지 않음은 여러 가지 증거들이 뒷받침 한다. 세례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들, 유대인의 미끄베, 지하묘소 카타콤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유아세례' 등 벽화들, 초기 기독교 교회당 안의 배수구 없는 십자가 모양의 작은 세례대 등은 모두 이 사실을 지지한다.

 

그로토우스키 연구소(Grotowski Institute)는 영국 옥스퍼드에서 2002년에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 학회의 어느 발표자는 "만다야 교인들은 세례요한 시절 이래 무려 2000년 동안 세례 양식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Mandaeans say that the form of baptism has not changed for two thousand years, since the times of John the Baptist)라고 증언했다. 만다야교 신자들이 "우리의 세례 요한이 우리의... 세례를 주다"(Our John the Baptist baptised our...)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들의 세례 요한이 우리의 예수를 세례주다"("their John the Baptist baptised our Jesus)라는 말을 하더라고 전한다.

 

만다야교는 기독교 세례 양식의 원형을 보존해 온 셈이다. 쿰란에서 발굴된 성경 사해사본 일부가 사본 연구가들을 놀라게 한 것처럼, 기독교 세례 양식의 원형을 탐구하는 학자들에게 주는 진귀한 선물이다. 만다야교 세례와 세례 양식은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세례는 정결례 곧 씻음을 상징하는 예식이다. 둘째, 한국어의 '세례'가 '침례'보다 원의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유유미션-BREADTV 대표

 

최덕성 교수의 리포르만다 

최덕성 교수는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