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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에 대한 관용, 최덕성 박사의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 정신"<글: 고경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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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에 대한 관용, 최덕성 박사의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 정신"<글: 고경태 박사>

 
 
웨스리, 터툴리안, 최덕성 박사의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 정신"에서..

최덕성 박사는 2016년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조직신학연구 24호)을 발표했다. 최덕성 박사가 제시한 논문 중 몬타누스의 부분을 발췌하여 정리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첨언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2)의 이단 관용정신(catholic spirit, generosity)은 독일의 급진적 경건주의(radical pietists) 교회사가인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의 이단 해석과 일치한다. 웨슬리는 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를 이단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열정적 복음전도자 웨슬리와 그 추종자들―메소디스트(Methodist)들은 영국국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경건하고 완전한 갱신을 추구했지만 결국 영국국교회에 의해 제명당했다. 메소디스트는 성령이 마음에 부어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자(롬 5:5)이다. 그래서 이름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real Christian)이 되길 원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선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와 완전하게 동일화되는 것을 목표한다.

 

웨슬리는 배에서 모라비아인들을 경험한 뒤에, 모라비아인들을 동경하여 독일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했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모라비아인들에게서 초대 기독교가 지닌 몇 가지 요소들을 발견했다. 교회 갱신 목적의 ‘교회 안의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와 상호 죄 고백 실천을 배웠다(Howard A. Synder, The Radical Wesley and Patters for Church Renewal(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80). 호와드 스나이더, 『혁신적 교회갱신과 웨슬레』, 조종남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41). 웨슬리의 부흥운동 조직이 경건주의의 특징인 ‘교회 안의 교회’ 형태를 지니자, 영국국교회는 위협적으로 등장하는 새 종교운동을 거부했다.

 

웨슬리의 몬타누스(Montanus)에 대한 평가는 파격적이다. 웨슬리는 몬타누스(Montanus)와 2세기 후반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것을 부당하다고 평가했고, 터툴리안을 언급하면서 몬타누스를 강변했다. 웨슬리는 몬타누스가 거룩함과 성결을 강조하고 가르치다가 이단자로 몰렸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기독교인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 몬타누스를 이단자라고 비난한 것은 악마의 계략의 결과라고 말한다. “나는 대 이단자, 몬타누스가 2세기경 가장 거룩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는가라는 의문을 품습니다.”(존 웨슬리, “하나님의 사려 깊은 지혜,” 『웨슬리설교전집』 , 6: 31). 교회가 부패하고 거룩함을 상실하자, 악마가 그리스도인들을 조종하여 몬타누스를 이단자로 매도하게 했고, 사탄이 계략을 부려 몬타누스의 선한 것이 교회 전체에 사용되지 않도록 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알아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닌 자를 이단으로 정죄한다면, 정죄한 그 집단이 이단이 된다. 공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단 단죄를 난발하는 교회는 없다.

 

웨슬리에 따르면, 몬타누스는 진정 모범적이고 선한 그리스도인이다. 웨슬리는 몬타누스의 성령체험, 환상, 황홀경 체험 같은 주관적이고 열광주의적인 요소를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몬타누스를 따르는 초기 지도자들이 죽은 뒤 몬타누스주의는 피리기아와 북아프리카에 새롭게 뿌리를 내렸다. 그 지역에서 살던 라틴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저술가 터툴리안(Turtullian, c. 155-230)은 몬타누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극단적인 경향, 도덕적 엄숙주의 경향을 지닌 라틴계 신학자였다. 몬타누스파의 세상에 대한 경멸과 엄격한 금욕주의, 철저한 권징, 순교적 열정, 천년왕국설 등에 마음이 끌렸다. 세상과 점차 동화되어 가는 로마의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마의 교회는 제피리누스와 칼리스투스가 차례로 감독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로마교회는 권징을 매우 느슨하게 시행했다.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 그룹에 가담한 뒤 저서들을 집필하여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등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비판했다. 당대의 신학논쟁에 뛰어 들었다. 로마 교회가 가진 오류(프락세아스의 성부수난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학문적 자질을 갖춘 신학자 한 명이 그룹 전체의 구성원만큼이나 중요할 때가 있다. 교회사가 필립 사프는 몬타누스파를 넘어 서 있었던 터툴리안 덕택에 이 그룹은 기독교계 안에서 명성을 얻었고 주목을 받았으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몬타누스 추종자들은 어거스틴의 노력으로 정통신앙의 교회 회원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오늘날의 성령주의운동, 오순절파 운동, 은사주의운동, 방언운동, 기도원운동, 신비주의운동, 극단적 종말론 등에서 왕성하게 부활하고 있다.

 

몬타누스주의에 연결되는 지점에 터툴리안과 웨슬리가 있는 것이다. 터툴리안, 정통 신학자이지만 이단인 몬타누스주의에 가담한 위인이다. 이단에서 정통신학으로 옮겨 올 수는 있겠지만, 정통신학에서 이단으로 간 신학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쓴 물에서 단 물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은혜의 치료가 있어야 한다. 이단 집단에 은혜의 치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그 집단은 이단일 수 없다. 터툴리안에 대한 긍정적 해석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그 한 위인은 웨슬리이다. 필자는 터툴리안에 대한 긍정적 해석에 주의를 하자고 제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통신학에서 이단으로 옮겨갈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덕성 박사는 웨슬리가 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 재세례파 등 이단 사상에 대해서 관용을 펼쳤다고 밝혔다. 웨슬리가 관용한 이단 사상가들은 열정, 성결, 엄숙, 기도 등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런 부류를 교회는 왜 이단으로 정죄했을까?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령했다(딤후 3:5). 경건의 능력은 십자가 복음, 전도의 능력이다. 복음전도를 구체적인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는 주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면 하게 될 현상으로 말씀하셨다(행 1:8). 지금은 세르베투스의 후계자들인 유니테리언이 지배하고 있으며, 다수 이단 사설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정진하자.

고경태 박사(형람서원 대표, 광주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 한영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