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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그리스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김대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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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그리스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회의 충만으로 이어져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5)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소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되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실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표현을 통하여 성자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표현을 모든 창조물 중에 가장 먼저 나신 이로 해석하였다. 마치 한 가족의 첫째 아이가 앞으로 그 가족을 이루게 될 자녀들 중 첫 번째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가 창조될 모든 피조물 중 첫 번째 피조물이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씀은 기독론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둥 중에 하나인 신성을 무너뜨리는 말씀일까? 아니면 더 분명하게 강조하는 말씀일까?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다. 아니 기독론 자체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기독론의 약화는 결국 교회의 약화로 연결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골로새서 1:1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곧 교회의 충만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결국 교회를 결핍된 상태로 이끈다. 그리하여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아닌 영지주의와 같은 신비주의와 유대주의와 같은 율법주의로 기울어지고 만다. 오늘날의 교회가 신비주의운동에 빠진 이유가 어디에 있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로 기울었나?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충만한 아버지의 은혜를 인간의 기도와 헌신, 희생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받아낼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이고 기복주의적인 가르침이 유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할까? 하나씩 살펴보자. ​

(1)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이 표현은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곧 보이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진실함이며, 역으로 보이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진실함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일 때만 가능하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부른 이유는 그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성자와 성부의 수직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성자가 성부의 형상(보이지 아니하는 성부를 보여줄 수 있는 Representation)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자는 곧 하나님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요14:9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부의 형상되신

성자 예수님

(2)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 이 본문의 다음 부분에서 바울은 성자와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평적 관계를 다룬다. 바울은 이 관계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모든 창조물이라는 단어는 “모든 창조”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창조물보다”에서 보다는 “모든 창조물과의 관계에서”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할 때 이 구절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는 반드시 “모든 창조와의 관계에서 처음 나신 이(장자)”로 번역되어야 한다.

“처음 나신 이” 혹은 “먼저 나신 이(First-Born)”라는 표현은 주권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이 표현의 용례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하게 파악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이 있었다. 이스마엘이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권리(The right of the first-born)는 이삭이 갖고 있었다. 이삭도 야곱과 에서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에서가 어미의 태에서 먼저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얻었다. 야곱은 12아들 중 르우벤이 장자였지만, 요셉에게 장자권이 넘어갔다(역대상 5:1). 위의 용례들을 볼 때 구약 성경에서 장자란 태어난 순서의 문자적 의미보다는 장자로서의 권리를 가진 위치, 주권적인 위치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시편 89:27절을 보자.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이 구절에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위 구절에서 우리는 히브리 시의 대구법을 볼 수 있다. 히브리 시에서 대구법에서 두 번째 행은 첫 번째 행에서 표현된 의미에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거나 부연설명을 하는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두 번째 행은 첫 번째 행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행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시의 대상을 그의 장자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 행의 의미는 첫 번째 행에서 말씀하신 장자를 삼겠다고 하신 대상을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장자(First-born)는 주권자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 of every creature)는 모든 피조물의 장자로 번역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지 태어난 순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의 주권을 가진 분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님을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피조 된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결코 이런 오해와 착각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만일 바울이 예수님을 제일 먼저 창조된 존재로 이해했다면 그는 마땅히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πρωτοκτιστος, 프로톡티스토스)을 사용했을 것이다(A Patristic Greek Lexicon, p.1200).

그러나 그는 본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상상할 수도 없는 오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신에 그가 사용한 표현은 πρωτοτοκος(프로토토코스)로 그 의미는 장자(First born)다(Thayer’s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p.55). 따라서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평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 그 관계는 바로 그 모든 만물의 주관자가 된다는 점이다.

모든 피조물의

장자이신 예수님

(3)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동시에 창조의 목적

​ 바울 사도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의 주관자가 되는지를 그가 그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밝히고 있다. 이 분명한 근거가 16절에 명시되어 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씀의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다 “그에게 창조되되”라는 표현을 통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하반 절, “다 그로 말미암고”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창조의 주관자가 되심을 설명한 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또한 그가 모든 창조물의 목적이 되심을 밝히고 있다.

창조의 주관자, 만물을 존재케 하신 분, 실제로 창조의 역사를 행하신 예수님이 곧 창조의 목적, 모든 창조물의 목적이 되시는 분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렇게 언어로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에서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창조물의 주관자가 되신다.

창조물의 주관자

예수님

(4) 성자의 선재성과 만물의 보존자가 되심

​이어지는 17절을 보자.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신다는 설명을 통하여 예수님의 선재성을 설명하며, 이어지는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by him all things consist. KJV)는 설명을 통하여 그가 모든 만물의 보존자가 되심을 밝히고 있다.

창조물의 보존자되신

예수님

​이제 우리는 16, 17절을 통하여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결코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다. 16절에서 바울이 명시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는 창조의 한 부분이 되실 수가 없다. 17절에서는 바울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밝혔다. 만일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면, 그는 창조물의 한 부분이 되실 수가 없다. 그의 선재성을 전제할 때, 그가 창조의 한 부분이라는 명제는 결코 성립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17절에서 그가 만물을 보존하신다는 점을 밝혔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와 창조물들을 명백히 구분시키고 있다. 그가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시기에 모든 창조세계를 보존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16,17절은 예수님이 결코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님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표현은 결코 예수님이 창조된 만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만물의 주관자가 되심을 설명하는 것임을 입증할 수 있다.

골1:15의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서 모든 창조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셨음을 언급하고, 17절에서는 예수님의 선재와 모든 만물을 지키시는 분임을 설명하였다. 이런 본문의 흐름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교리와 정확히 일치하며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이어지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였다. 골로새교회가 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지길 소망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때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골로새서 2:15).

 

*미국 Biblical Theological Seminary의 William N. Harding 교수님의 「AN EXAMINATION OF PASSAGES CITED BY THE JEHOVAH'S WITNESSES TO DENY JESUS IS GOD」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