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어머니 헨델, 뤼벡으로 달려가다!
ㅖ배
위 사진은
바로크 음악의 대가요
북독일의 위대한 음악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가
오르간 연주자로 있던
뤼벡의 성 마리엔 교회(루터교)의 내부(예배 직 후 풍경)과 오르간 악보다.
북스트후데는
성 마리엔 교회에서
유명한 저녁연주회였던
'아벤트무지켄(Abendmusiken)을 연주했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와
음악의 어머니라 불려지는 헨델(1685-1759)이
휴가를 내고 200마일이나 떨어진
지금의 북 독일 뤼벡으로 도보로 달려간 것은
성 마리엔 교회의 연주자로 있던
북스트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서 였다.
넉달 동안이나 뤼벡에 머물렀던 바흐는
68세가 된 북스테후데가
후임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했으나
아른슈타트로 되돌아가고 만다.
모든 독일 음악가들이 선망했던
성 마리엔 교회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이 젊은 세바스찬이 사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조건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헨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애교라고는 전혀 없는 북스테후데의 서른 살 노처녀 딸과 결혼을 권유하였으니!
세바스찬은 1707년 10월 17일 아른슈타트에서 그리 멀지않은 도른하임의 작은 교회에서 바르바라와 결혼한다.
바흐는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전임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북스테후데와 북독일 거장들의 칸타타를 전사(轉寫)하여 활용하며 문서보관실에 남겼다.
바흐의 초기 칸타타들이(1712년까지는) 바흐 조상들 뿐 아니라 북스테후데, 파헬벨, 뵘 등 작품과 유사했던 이유였다.
북스테후데는 1637년에 태어나 1707년 5 월 9 일에 죽었다.
705년 북스테후데의 나이 68세, 여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일까?
중매를 사양한 혈기 넘쳤을 젊은 음악가들도 이해되나
딸의 중매자가 되고 싶어했던 노 음악가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는 39 년동안 오직 st. marien 교회에서만 오르가니스트와 관리자로 활동했다. 이렇게 그는 17세기 북 독일 오르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st. marien 교회에 묻혔다.
북스트후데와 바흐, 헨델은 모두 창조의 주(主)요 구속의 주이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지상 최고의 음악인들이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글: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 박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교회음악을 연주하라는
소명을 받들어
제 미약한 능력이나마
교회음악에 진력해왔습니다
-윌하우젠 시의회에 제출한 사직서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 1708. 6. 25일)
독일 통일의 토대를 닦은 주역, 빌리 브란트 수상과 귄터 그라스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만의 기념관이 있는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였던 독일 북부 아름다운 뤼벡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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