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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이슈들/기타(일반 과학 질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류 역사 최고 천재 최초 과학자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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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최고 천재는? 진정한 최초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다 빈치 포스터(다빈치의 고향과 근접한 베네치아에서)

 

인류 역사 최고 천재는? 최초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류 최고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1506년 제작)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명화 중의 하나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사는 한 부자의 아내를 모델로 그렸다는 이 그림의 미소는 보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한때 이 그림이 도둑맞았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이 그림을 도둑맞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모나리자야말로 세계인들이 가장 아끼는 그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명작 가운데 오직 이 작품만큼은 근접하지 못하도록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다. 사진예술가인 필자의 장녀도 아예 모나리자 작품은 촬영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최고의 성화들을 그린 화가

 

그러나 이 신비스런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그림만큼이나 예술가, 기술자, 과학자로서 다방면의 신비한 삶을 산 사람이며, 역사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성화를 많이 그린 사람이었다.

 

많은 뛰어난 화가들이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성화를 그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보다 잘 알려진 작품은 없다.

 

이 밖에도 그가 남긴 《성 제로니모》, 《암굴의 성모》, 《성 모자와 성 안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의 그림 등은 하나님을 믿는 한 화가가 표현할 수 있는 성화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저녁을 잡수시는 《최후의 만찬》은 지금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벽에 그대로 남아, 보는 이들을 감동시키곤 한다.

 

길다란 식사 테이블을 앞에 놓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앉았고, 가룟 유다로 보이는 한 제자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밖으로 막 나가려는 이 그림은 우리들에게 마태복음에 나오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어린 시절

 

레오나르도가 태어날 무렵,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유럽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지금의 독일 마인츠에서 인쇄 공방이 시작된 것은 레오나르도가 태어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날 때 유럽은 르네상스(문예부흥)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이듬 해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던 시기였다. 구텐베르크 이후 번역의 동력은 대단히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활자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별장을 제공하여 플라톤연구소(플라톤아카데미아, 1462년)를 열어 플라톤의 저작들에 대한 라틴어 번역 일을 독려하였다. 메디치가의 피렌체는 레오나르도가 적어도 16년 세월을 보낸 르네상스의 본산이었다. 인류 최고의 천재들이 탄생할 수 있는 여건은 차곡차곡 마련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플로렌스(피렌체)와 피사의 탑으로 유명한 피사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사정으로 그는 부모님과 떨어져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러면서도 명랑하고 총명한 레오나르도는 일찍부터 그의 천재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타고난 손재주와 이해력은 친구들이 따라가기 힘들 만큼 뛰어났으며, 곧잘 하는 어려운 질문들은 선생님들을 쩔쩔매게 하였다. 이런 사실을 잘 알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레오나르도를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베로키오에게 데려갔다. 레오나르도보다 8살 많은 훗날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1485년 완성작)의 화가 보티첼리도 베로키오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베로키오 선생님, 이 데생을 좀 보아 주십시오.” 그림을 본 베로니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 그림이 정말 이 아이가 그린 그림이란 말입니까? 레오나르도는 반드시 훌륭한 화가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베로키오의 제자가 된 것은 불과 그의 나이 15세였을 때였다. 그의 타고난 재능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자마자 활짝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발전 속도는 베로키오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 어느 날, 베로키오 선생은 레오나르도를 불렀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레오나르도, 바알 롬부로조 수도원에서 부탁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그림을 속히 끝마쳐야 될 텐데, 자네가 남은 천사를 좀 그려 주었으면 좋겠어.”

 

“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레오나르도는 정성을 다해 밤을 새워 가면서 천사의 그림을 완성한다. 이튿날 아침, 베로키오가 그림을 확인하러 나왔을 때 그는 그만 레오나르도의 그림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동상처럼 서 버리고 말았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는 오히려 스승인 베로키오가 그린 천사보다도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이다. 더욱이 천사의 그림이 돋보여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세례 받는 모습이 초라하게 보이게 된 것은 베로키오에게 큰 충격이었다.

 

“아아!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이제 내 그림보다 훨씬 훌륭하구나!”

 

화가로서 베로키오의 충격은 생각보다도 대단한 것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이후 베로키오는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의 진위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일화에서 다 빈치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를 위해 일하기 35년 전에 쓰여진 첸니니의 『회화론(Treatise on Painting)』은 당시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젊은 견습생이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려면 보통 13년간의 수련이 필요하였다. 첸니니는 그 과정을 “강제 노역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수석 장인이 되는 데 겨우 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472년에는 이미 장인으로서 화가 조합인 성 루가 회사의 회원이 되었다. 레오나르도가 스승을 떠나 독립한 시기는 1477년경으로,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였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밀라노의 한 궁전에서 토목, 건축, 군사 기술자로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운하의 건설과 수많은 군사 시설 그리고 밀라노 대사원 등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린 유명한 성화들의 대부분이 이때 완성되었다.

 

 

다재다능한 천재 다 빈치

 

그러나 그의 명성은 단순히 화가나 건축가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사물들 전체였다. 그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학적 업적들은 그를 단순히 근대 과학의 선구자라고 불러서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다 빈치는 많은 르네상스주의자처럼 인간 속에 전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최초의 안경은 1285년경에 이탈리아 사람 살비노 데글리 아마티스라는 사람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 렌즈가 작은 사물들을 연구하는데 쓰여 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인 15세기 다 빈치에 의해서였다.

 

혈액의 순환 원리를 발견한 것은 1619년 영국사람 윌리엄 하비였다. 그것도 당시 학자들의 편견 가운데서 우여곡절 끝에 하비는 이 위대한 발견을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미 혈액의 순환 원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인체의 해부도를 만들었으며, 뇌의 구조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 심장의 기능에 관한 그의 지식은 당시 의학자들의 수준을 훨씬 앞서는 것이었다.

 

지구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사실은 목사가 되려 했던 케플러(1571-1630)에 의해 밝혀졌고,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신부의 역할을 감당하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지만, 이미 다 빈치는 지동설의 입장을 취하고 지구의 궤도가 타원형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화석에 관한 그의 관찰은 근대 지질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어느 면에서 오늘날 창조과학자들의 주장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도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관성의 법칙을 부분적으로 발견한 것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근래에 와서야 과학적으로 밝혀진 영구 운동 기관(주-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아도 영구히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상상의 운동 기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제시한 것도 바로 그였다.

 

인간이 새처럼 날고 싶어 하던 소망은 1903년 미국의 라이트형제에 의해 비로소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다 빈치는 그보다 400년 전에 이미 날아다니는 기계를 상세히 설계해 놓고 있다. 다 빈치의 생각과 그가 꿈꾸던 꿈은 이렇게 당시의 사람들보다 수백 년을 앞서 간 것들이었다. 도대체 이 뛰어난 천재의 통찰력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우리들은 도무지 측량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사실 다빈치는 잠수함도 설계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인류에게 선한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쓰여 질 것 같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던 윤리적 측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날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과학의 이 윤리적인 측면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다 빈치의 이런 통찰력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잠수함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노트에는 장갑차, 기관총, 도시의 계획, 기하학, 해부학, 건축, 재료의 강도 실험, 성형술, 카메라 옵스큐라, 콘텍트 렌즈, 증기의 힘, 하늘이 왜 푸른지 등의 고안과 설계와 설명이 가득하였다. 그야말로 지극히 사적인 독창적 노트요 메모였다. 끈과 리본과 가죽 장정 속에 보존된 그의 노트는 약 1만 3천 쪽에 달하였다. 1519년 4월 23일 다 빈치 사망 후 그의 유품들은 가족이 아닌 오랜 친구였던 귀족화가 프란체스코 멜치(Fracesco Melci)의 관리로 넘어갔다. 1570년 멜치가 죽자 이 유품들은 외아들 오라치오(Orazio)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오라치오는 다 빈치 유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 빈치의 유품들은 다락방 선반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다 빈치의 유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동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 노트는 18 세기말까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 빈치의 은밀한 개인 자료들은 프랑스의 문화침략자들이 이탈리아로 들어와 파리로 가져가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오늘날 이 유품 가운데 남은 것은 겨우 절반이 조금 넘는 총 7천 쪽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이들 유품은 온 세상의 수집가들에게 분산되어 버렸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94년 빌 게이츠가 3천만 달러로 구입한 「코덱스 해머(Codex Hammer)」이다.

 

도무지 그 능력을 측량할 수조차 없을 만큼 온갖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화가의 기질을 발휘한 이 천재의 방안에는 박쥐, 도마뱀, 쥐, 잠자리, 뱀, 메뚜기, 벌 그리고 별의별 짐승들과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또 어떤 것들은 썩어서 냄새가 요란하여 방문객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모든 것들이 그의 그림의 소재였으며 연구 대상이었다. 다 빈치가 해부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시체의 혐오감을 극복해도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지고 피부가 벗겨진 보기에도 끔직한 시체와 밤을 지새우는 공포가 있고, 이것을 극복해도 그림에 대한 필수적인 재능이 필요하고, 재능이 있어도 투시 화법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이 있어도 기하학의 증명법이나 근육의 힘과 세기에 대한 평가법에 숙달되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있어도 인내가 부족해서 근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에서 오늘날 의학에 대한 도전이 만만하지 않음을 놀랍게 예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완벽한 인체 해부를 적어도 30번 행하였으며 수천 장의 해부 스케치를 남겼다. 이런 치열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녀를 부모의 과욕으로 시험 한번 치지 않고 의전원까지 억지로 구겨 넣은 교수 부부가 생각난다. 지도 교수는 그렇게 의학에 재능 없는 아이는 교수 생활 동안 처음 본다고 했다. 수차례 낙제에 자퇴를 막으려고 한 교수는 수차례 장학금까지 주었단다. 그런 아이가 억지로 졸업하여 돈을 잘 번다고 인생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연을 알려고 하는 자는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다 빈치의 말이다. 필자는 딸을 억지로 의전원에 밀어 넣은 그 교수 부부에게 “의학을 이해하려면 인생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화 제작에 얽힌 일화

 

이 놀라운 천재에게 훌륭한 성화들을 남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은 그의 나이 44세 되던 해, 그러니까 1497년에 제작이 시작되어 2년 동안에 걸쳐서 완성된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작품에 쏟은 정성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어떤 때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 가며 그렸으며, 때로는 이 천재 화가에게도 뚜렷한 구상이 떠오르지 않아 며칠씩이나 붓만 든 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지내는 날도 많았다.

 

2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역동감이 느껴진다. 그림에서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 품성이 마치 그대로 살아서 우리 앞에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이 천재 화가에게도 고민은 있었는가보다. 그도 마지막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과 가룟 유다였다. 예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천재인 그에게도 너무나 난감한 일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몰랐다고 했다. 그분이 바로 자기가 지으신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말씀, 곧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오신 바로 그 사랑의 예수님을 그려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님을 팔아먹은 배신자 가룟 유다를 그리는 것도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기도와 번민으로 며칠이 지나갔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날을 새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 다빈치의 모습은 영락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도대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일까? 이 천재 화가에게도 그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요 고민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림을 부탁한 성당의 수도원장은 그를 찾아와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주위에 비친 그의 모습은 잔꾀를 부리거나 조금은 이상해진 사람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독촉하는 수도원장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젠 남은 부분은 예수님과 가룟 유다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어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완성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원장은 다시는 독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 그는 위대한 화가였다. 오랜 산고 끝에 그의 손으로 이 위대한 그림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다 빈치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조금은 괴짜로 느껴지기도 하는 이 천재 화가는 누구보다도 다방면의 재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며, 그 받은 달란트를 남김없이 사용한 사람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서, 더불어 인류의 마음속에 진한 감동을 끊임없이 선사하는 성화들을 남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다 빈치는 1513년 가을 로마에 도착하여 미켈란젤로(1475-1564)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의 《천지창조》 중의 ‘대홍수’ 그림을 보면서 바다와 땅을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그렸다고 신랄히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천재 화가들인 라파엘로(1483-1520)와 미켈란젤로가 활동 중인 로마에서 나이든 다 빈치가 실력을 펼칠 기회는 별로 없었다.

 

1516년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가서 살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곳 상크르라는 곳에서 1519년 4월 23일, 69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종교 개혁의 신호탄을 올린 2년 후였고 마젤란이 세계일주여행을 출발한 바로 그 해였다. 그렇지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성화들은 우리 곁에서 그의 이름과 믿음을 길이길이 우리 주위에 남기고 있다.

 

“어린 그리스도의 작은 두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손수 만든 것이다. 이 두상에서는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순수함이 지혜와 지성과 위엄과 함께 느껴진다. 부드러운 어린이의 분위기와 함께 판단력을 지닐 나이의 특성도 보여주는 정말 탁월한 작품이다.”

 

1560년대 밀라노의 화가인 지오반니 로마초의 글이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