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박찬호 교수의 “워필드 창조론 재고”에 대해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평택대)
1. 본 논문의 중요성
자연과학은 자연철학(physica)으로부터 비롯된 헬라 철학에 기반을 둔다. 헬라 고대 철학이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자연과학은 칼 포퍼가 말하듯 늘 반증(反證)의 가능을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 그 자연철학 선구자들의 출발이 일종의 소박한 “기원론”이라는 점에서 그 모호함과 “반증” 가능성은 더욱 증폭되어 왔다. 기독교 창조론은 이 기원론의 모호함 속에서 성경 창조 계시의 초월성과 무오성을 변증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철학을 전공하여 과학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조직신학자 박찬호 교수는 이 같은 난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탁월한 기독 신학자들의 창조론을 추적하는 귀한 작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워필드 창조론 재고”도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소중한 성과다. 개혁주의 성경무오론의 상징적 인물로서 워필드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생명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고유 권한을 드리는 데 최우선을 둔다”고 말한 워필드이기에 신앙의 출발점으로서 그가 어떤 창조론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개혁신학이 반드시 규명하고 정리해야할 논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9세기 중반 등장한 진화론에 기반 한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큰 파문을 던졌다. 논문 저자는 서두에서 미 프린스턴 신학의 찰스 핫지(1797-1878)와 프린스턴 대(당시 뉴저지 대)에 등장한 진화론에 대한 초기 대응을 잘 소개하고 있다. 다윈 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아쉽게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 장로교인들도 진화에 대한 두 학파의 견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구 프린스턴 신학의 마지막 거장인 성경무오론자 워필드(1851-1921)는 과연 어떤 입장에 있었을까? 이를 규명하는 것이 저자의 논문이라 할 수 있다.
분명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어떤 조정이 이루어졌을까? 저자는 이 해답을 위해 워필드를 유신진화론자로 본 북아일랜드 출신의 지리학자로 기독 저널의 편집인을 역임한 데이빗 리빙스턴과 “휘튼”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마크 놀의 주장, 개혁 침례신학자 자스펠의 반론, 워필드가 주장한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 개념, 양승훈 박사의 논문 “진화의 세 가지 층위” 등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개혁신학적 평가와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2. 논문의 내용과 저자의 분석
1) 진화론을 긍정한 워필드에 대한 논증(리빙스턴과 놀의 경우)
저자는 워필드가 프린스턴 학생 시절부터 진화론의 주 된 옹호자였으며 유신진화론자인 맥코쉬가 프린스턴의 총장으로 부임할 당시 이미 순수 다윈주의자였으며 다소 입장이 약화된 적이 있기는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론을 다시금 받아들인 한결 같은 진화론 옹호자였음을 리빙스턴과 놀의 논증을 통해 잘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리빙스턴과 놀이 칼빈주의자 워필드가 진화론자라는 확신을 가진 것은 두 가지 고려 사항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첫째 1906년 제임스 오르(1844-1913)의 저서에 대한 서평에서 워필드는 사람이 몸과 영혼의 통일체라는 오르의 이해를 지지하면서 인간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진화와 창조의 결합을 제안했다는 점과 둘째 “칼빈의 창조론”에 대한 워필드의 1915년 논문 때문이라 했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이 2차 원인을 사용해 창조하신다는 주장을 통해 인간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은 무에서 생겨나지 않은 경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인데, 여기서 진화는 단순한 진화가 아니라 ‘순수 진화론’(a very pure evolutionary scheme)으로 일종의 발전(development)를 말한다고 했다.
놀과 리빙스턴은 워필드가 진화론에 대해 중도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가 분명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를 수용한 것은 사실이고 “진화와 성경적 칼빈주의의 조화”가 프린스턴 시절 내내 워필드의 한결같은 목표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박찬호 교수는 제임스 패커 자신은 진화론 문제에 유보적 입장임을 피력하며 워필드를 대표적 유신진화론자로 지칭하고 있음도 소개하고 있다.
2) 워필드는 진화론에 “분명한 불가지론”의 입장이었다는 자스펠의 반론
개혁 침례신학자 자스펠은 워필드에 대한 리빙스턴과 놀의 입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자스펠은 워필드가 기독교 유신론이 몇몇 진화론과 필연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님을 거듭 인정했다하더라도 진화 가설을 사실에 대한 참된 설명으로 수용한 적은 결코 없다는 입장이다. 자스펠은 1916년 워필드가 프린스턴 대학 시절을 회고하면서 맥코쉬 학장과의 대화를 공개한 내용을 보면 워필드는 1880년 대 초 이미 진화론을 거부했고 이후에는 일관되게 진화론에 회의적인 유보적 입장이었다고 보았다.
3) 직접 창조,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한 워필드의 이 같은 유보적 모호한 주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박찬호 교수는 자스펠이 워필드의 창조론과 관련하여 제시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직접 창조,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의 개념에 주목한다. 직접 창조는 진화와 다른 하나님의 기적적 행위인 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키며, 간접 창조는 진화 그 이상의 것으로 섭리적 통치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진정한 창조 행위를 말한다. 이 부분은 유신진화론을 부정한 찰스 핫지와 동일한 입장이다. 다만 워필드는 핫지와 달리 진화를 병기하여 간접 창조를 비교 설명한다는 점에서 핫지와 다른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같은 변화와 혼란에 대해 박찬호 교수는 양승훈 박사(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가 자신의 논문 “진화의 세 가지 층위”에서 제안한 ‘관찰로서의 진화, 논리적 추론으로서의 진화, 이데올로기로서의 진화’ 개념을 활용하면 왜 워필드가 어떤 의미에서는 진화를 긍정하고 어떤 경우에는 진화를 부정하는 듯 보였는지 그 모호함을 나름 설명하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한다. 신학의 관점에서 진화는 단순한 생물학 개념이 아닌 다양한 층위를 가진 개념인 것이다. 즉 상당 부분 워필드는 진화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만을 위한 입장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것을 최선의 잠정적 결론이라 했다.
이 유보적 결론이야 말로 실은 타당하고 탁월한 개혁적인 절묘한 결론이라고 논평자는 평가한다. 성경이 유보하는 것에 대해 신학과 신앙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는 지혜와 겸손이 때론 요구되기 때문이다. 창조 신앙의 일종의 아디아포라 같은 것이다. 성경의 창조 계시에 대해 기독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일관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설파해 왔다. 그런데 내재의 학문인 자연과학은 초월의 삼위일체 창조에 대해 접근 가능한 도구가 없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유일신 창조가 아닌 삼위일체 창조(창 1:1-2; 요 1:1-3; 고전 8:6)를.
자연과학은 빅뱅이라는 막연하고 잠정적인 우주기원론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그 태초 물질의 기원이나 시간의 기원 그리고 빅뱅과 진화 유발의 메커니즘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장벽을 마주한 것처럼 오리무중이다. 하물며 삼위일체 창조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기원론과 진화의 전체 밑그림은 창세기 해석과 기독교 창조론에 제한적 정보만 제공할 뿐이다. 여기서 잠정적 결론 유보의 상황이 적절할 수 있다는 당위성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화론은 단순한 생물학적 이론이 아니라 빅뱅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 생·화학·분자진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문화, 예술의 진화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켜 왔다. 사실 이 같은 진화라는 용어는 발달, 발전, 진보, 변이, 과정 등의 용어로 대치 가능한 것들이 모두 진화라는 용어로 통합되어 버린 감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함축을 담은 용어가 되어버린 “진화”에 대해 좀 더 정교한 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3. 진화론에 대한 워필드의 유보적 자세와 열려진 입장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결론
박찬호 교수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분위기는 진화에 대한 맹목적 찬반이나 공격적 논쟁이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했다. 박 교수는 지양해야 하는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공격성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사이 꽤나 인기 있는 입장이 되어버렸다고 “진화 논쟁”에 담긴 문제점을 요약한 것이다.
이 같은 첨예한 갈등 가운데 워필드는 진화론 해석에 제 3의 길이 있음을 보았음이 분명하다. 워필드는 다윈의 진화론은 분명 다윈의 기독교 신앙을 앗아갔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진화를 인정하는 것과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는 것이 정말 동일시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일까? 교회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브렌트 렘펠은 과학적 발견은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학과 신학은 생산적인 관계로 존재해야 하는 데 워필드는 성경의 진실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진화론의 유신론적 형태를 인정했던 하나의 실례가 된다고 했다. 워필드는 “진화론 이슈”가 기독교와 자연과학의 단순한 충돌 모델이 아님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유보적 자세와 매우 열려진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워필드의 입장을 정리하며 박찬호 교수는 프란시스 쉐퍼의 견해를 통해 본 논문의 결론과 논지를 드러낸다. 저자는 어느 정도 여지를 열어 놓고 유신진화론에 대해 살펴보자고 말한다. 철학, 과학, 문화, 예술, 기독교세계관 등 창조 세상의 모든 것에 해박한 통찰력과 해석을 제공해 온 쉐퍼 박사는 시간과 우연의 기초 위에 선 연속적 진화 개념은 현대 합리주의적 인간에 의해 견지된 신념적 입장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합리적 결론이란 겨우 인간 이성의 테두리 안에 머무를 뿐이다. 하지만 쉐퍼는 유신진화론의 개념을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인다면 우주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논의할 만한 자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은 숨기지 않았다.
박찬호 교수는 쉐퍼의 견해가 워필드의 견해와 일치하는 지 여부는 이 논문의 범위는 아니라 했다. 박 교수가 호감을 갖는 에릭슨(1932-)의 창조론도 마찬가지다. 점진적 창조론의 에릭슨은 소진화는 인정하고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박찬호 교수는 진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는 데, 이는 분명 워필드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다 여유를 가지고 이 부분에 대해 접근해보려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4. 나가면서
박찬호 교수는 워필드의 예를 통해 진화론과 기원 문제에 대해 분명 기독교의 전향적 자세를 촉구한다. 필자는 이 견해에 전폭적으로 동의하고 지지를 보낸다. 논평자는 창조와 창조 신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컴퓨터가 설계(인류 지능)의 부산물이듯 컴퓨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생체의 자동 생화학 컴퓨터시스템의 설계에 주목한다. 이 능수능란한 작동 시스템이 우연하게 설계(시작)되었다는 우연진화론에는 회의를 넘어 부정적이다. 하지만 섭리적 개입이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통합적 단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내재의 과학을 초월하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듯 말이다. 즉 기독교의 근본적 투쟁은 진화가 중심이 아니라 창세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로 믿느냐 아니면 우연이냐의 싸움인 것이다.
개혁신학은 초월의 창조로부터 시작하기에 섭리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성령의 겸손”은 피조물인 우리에게도 창조 앞의 겸손을 요구한다. 즉 때로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영역에 대해 요구되는 “유보”는 “단순한 모호함”이 아니다. 성령의 겸손이요 칼빈과 개혁신학의 교훈을 바르게 따르는 길이라 논평자는 본다.
박찬호 교수는 신앙의 경건과 학문적 깊음과 성실함과 탁월한 역동성을 동시에 소유한 보기 드는 신학자다. 본 논문도 과학과 철학과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륜이 필요한 아무나 접근이 쉽지 않은 연구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에 대한 워필드의 생각”과 “그 워필드의 생각을 해박하고도 종합적으로 접근”한 이 논문은 앞으로 보다 더 진전된 기독교와 과학 그리고 진화 영역에 대한 개혁 신학의 논문들의 바른 길잡이 역할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 방향을 잡아 준 귀중한 논문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앞으로 꾸준히 나올 관련 후속 연구 성과들을 기대하며 늘 분주한 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이 귀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박찬호 교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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