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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성령에 대한 표현들(성령론 강좌, 조덕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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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표현들(성령론 강좌, 조덕영 교수)

 

성경 속 초월적 부분에 대해 인간은 형상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교회는 형이상학적 무늬를 가끔 교회 건축에 활용하였다(유럽 예배당 모습)

 

성령에 대한 표현들

 

가. 서론

 

1. 성령에 대해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2. 중요한 것은 <성경 해석자는 성령에 대한 믿음 가운데 진리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3. 또한 성령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성경이 성령을 어떻게 묘사하고 표현하는가 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4. 성경은 성령의 본질이나 사역을 묘사하는 가운데 다양한 상징과 비유와 은유와 유비 등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표현들이 있는 지 살펴봅니다.

 

5. 성경해석학에 관한 시카고 성명 중 성령 관련 부분(1978. 10. 26-28 이후 1982년)

제 4조

“우리는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께서 오늘날도 그 메시지에 대해 신앙을 일으키시는 활동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어떤 것을 어느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가르치심을 부인한다.“

제 5조

“우리는 성령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그들의 삶에 사용하고(私用)하고 적용하게 할 능력을 주신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연인이 성령 없이 성경 메시지를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음을 부인한다.”

 

나. 성령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상징, 비유, 은유, 유비 등)

 

1. 능력으로 옷 입음(눅 24:49)

 

1)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

2)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

3) 개인의 약점을 덮으시고, 그 대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표시로 예복의 기능을 갖는다.

 

 

2. 비둘기같이(요 1:32)

1) 세례 요한이 증거하기를 자기가 직접 봄(목격)

2)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마 3:16)

3)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 예수 위에 머뭄

3) 아름다움과 온유(갈 5:22-23), 평화(창 8:11), 천상의 은유(하늘로서 하강), 본성과 기원, 순결(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6), 희생 제물(레 1:14-17), 무해 등을 의미한다.

 

 

3.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엡 1:13-14)

 

1) 도장(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

2) 성령 자신이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다.

3) 즉 신분, 기업,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4. 불(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행 2:3)

 

1) 초월성에 대한 유비(불의 혀?)

2) 죄를 태움(히 12:9)

3) 뜨거운 심령과 복음 증거의 상징성

4) 불태움으로 인한 깨끗하게 하심(불의 속성)

5) 말씀 선포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불타는 뜨거움(렘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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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상징과 은유와 유비에 대해

 

1. 상징(象徵, symbol)

1) 보편적 의미에 추가된 어떤 의미를 암시하거나 대표하는 일체의 것들

2)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것 들

3) 물건(소금, 등잔 등), 행위(두루마리를 먹다), 성례(세례, 유월절 등), 재료(세마포 등), 금속(금, 동 등), 보석, 생물(사자, 비둘기 등), 숫자(1, 3, 4, 7, 8, 19, 37, 40 등) 등

4) 해석 지침:

(1) 성경 자체 상징 해석 이해할 것 (2) 자연의 경우, 실물의 자연적 성격을 유의할 것 (3) 문맥 연구 (4) 개인이나 성경 이외의 것에서 유추한 억지나 추측 삼갈 것

 

 

2. 은유(隱喩, metaphor)

1) 성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물 비교

2) 분명한 뜻을 드러내기보다 암시를 줌

3) “구원의 잔”(시 116:13), 불의의 떡(잠 4:17)

 

3. 직유(直喩, simile)

1) 은유와 유사하나 ~같다, ~듯하다 등의 비교 표현

2) 그 마음이 돌 같이 단단하니(욥 41:24)

 

 

4. 유비(類比, 類推; Analogia)란 무엇인가

 

1) 유비란 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을 말합니다.

2) 예를 들어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존재성의 차원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유비(한 영역에서 어떤 원칙이 통하면 다른 유사한 영역에서도 그 운칙이 통할 수 있다고 보는 사유)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있습니다.

 

※유비의 중요성 두 가지(알리스터 맥그라스)

 

첫째 유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하나님 편에서의 양보”, 일종의 “적응”-눈높이).

 

둘째 유비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억에 잘 각인되는 특징이 있다.

 

 

1) 비례(proportionality)의 유비:

 

종류가 다른 두 가지 대상 속에서 서로 일치하는 특성들 들여다보기(예: 개의 충성심과 인간의 충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즉 두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유비가 있을 뿐이다)

 

2) 속성(attribution)의 유비 :

 

(1) 예를 들면 선(善)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막 10:18). 그런데 이 선함이라는 단어의 인간적 이해는 인간의 “선한 속성”으로부터 유래한다.

(2) 이 같은 ‘인간 피조물이 선하다’는 이해의 수준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속성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불완전한 실재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3) 즉 완전한 속성 이해가 아닌 속성의 유비만이 있을 뿐이다.

 

3) 존재(entis)의 유비:

 

(1)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 관련.

(2)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과 창조된 세상 사이에는 상응(相應) 또는 유비가 존재한다는 입장.

(3) 일반적으로는 두 존재나 사물이 전적으로 다르다 해도 하나에게 적용 되는 용어가 다른 하나에도 어떤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는 관계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4)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1) 이것은 주로 신학자 칼 바르트와 연관된 이론으로 하나님과 창조된 세상 사이에는 어떤 상응 관계도 없으므로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자기계시에 근거해서 유비가 성립된다는 주장. (2) 칼 바르트의 입장이 이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바르트의 자연계시와 자연신학에 대한 반대 입장).

(3) 오직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초월적 만남 사건이 중요!

 

5. 성경을 알레고리와 모형론으로 해석해도 될까?

 

1) 알레고리적 해석

 

(1) 풍유(諷喩), 우의(寓意), 우화(寓話) 등으로 번역되는 알레고리(allegory)는 헬라어 알레고리아(allegoria, 다른 이야기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문학형식을 말한다.

(2) 본래 이 말은 헬라어의 ‘다른’이라는 단어인 'allos'와 ‘공공장소에서 말하다’라는 'agoreuein'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어원적으로는 ‘다르게 말하는 하나의 방식’을 지칭한다.

 

(3) 어떤 내용을 표현할 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말하려는 대상의 본체를 감추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방법은 알레고리 말고도 다양하다. 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같이’, ‘처럼’, ‘듯이’와 같은 단어로 결합하는 직유(直喩, simile),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은유(隱喩, metaphor),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나타내는 말을 경험적으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나타내도록 표현(예를 들어 ‘흰옷’으로 우리 민족을, ‘백의(白衣)의 천사’로 간호사를 표현)하는 대유(代喩, synecdoche),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환유(換喩, metonymy) 같은 비유법이 있는데 알레고리는 신학에서 관심을 갖는 표현기교 가운데 하나이다.

 

(4) 그럼 성경의 알레고리란 무엇일까?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성경의 문자(rhete) 혹은 분명한 것(phanera) 이면(裏面)에 담긴 구절의 실제적 의미(hyponaia)가 존재한다고 믿는 해석 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알레고리 해석을 확대된 은유(metaphor)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명기 14장 21 후반절에 보면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는 계명이 나온다. 온갖 재료와 향신료가 제한 없이 마구 섞이는 짬뽕이나 비빔밥류를 즐기고 별다른 음식 계명이 없이 살아온 우리 민족은 이 계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또한 염소 새끼를 어미 젖과 섞어 삶을 일도 거의 없다. 만인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이렇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시급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기록하신 이유는 무얼까? 성경이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라 그런 것일까? 우리 사회라면 어미 젖 이슈보다는 아마 도축법에도 없는 강아지를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목사나 성도들이 함부로 영양탕으로 즐겨도 될까하는 문제가 더 쟁점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하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는 계명으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염소 새끼와 어미 젖에 담긴 좀 더 확대된 중요한 해석이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5)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고대 헬라와 유대 사이의 교류를 통해 자연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주전 170-60년) 같은 학자는 호메로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헬라 철학이 오히려 구약, 특히 모세의 율법에서 알레고리 기법을 가져왔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유대의 필로(Philo, 주전 약 20년-주후 약 54년)는 유명한 유대의 알레고리주의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겐, 제롬 등은 알레고리 해석에 능한 초대 기독교 학자들이었다. 성경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책이다. 설교도 결국 해석의 적용이다. 따라서 성경 시대의 상황과 풍습에 능하지 못한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과거 유대, 기독교 학자들의 알레고리 해석에 대해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2) 모형론적 해석

 

(1) 모형론(typology, 유형론, 예표론)적 해석은 구약 성경의 역사는 진리가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라 보는 해석을 말한다. 즉 구약 성경의 그림자 같은 역사는 그 원형(原型)이나 구현이 신약성경의 계시에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말씀, 사건, 인물 그리고 제도들은 모형들(Typen)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相應)하는 것이 신약에 있다는 입장이다. 모형론적 해석은 이러한 모형(模型, Typos: 구약)과 원형(原型, Antitypos: 신약)의 대조를 통하여 구원역사의 연속성을 살펴보게 된다. 어떤 학자는 극단적으로 구약의 모든 사건과 역사를 모형으로 해석하여 실제 역사를 무시하기도 한다.

 

(2) 모형을 나타내는 신약의 단어들로는 튀포스(모형, 롬 3:14; 고전 10:6,11), 스키아(그림자, 골 2:17; 히 8:5; 10:1), 휘포데이그마(사본, 히 8:5; 9:23), 세메이온(표적, 마 12:39), 파라볼레(비유, 히 9:9; 11:19) 등과 같은 용어들이 있다. 모형론을 폭넓게 보아 알레고리의 영역에 넣어 다루려는 학자들도 일부 있기는 하다. 확대 해석하면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약간 그 성격이 서로 다르므로 구별하는 게 좋다고 본다.

 

(3) 모형은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신 것(예를 들어 노아 홍수 사건과 소돔성의 롯의 때를 인자의 재림 사건에 대한 모형으로 언급한 누가복음 17장 26-30절을 참조할 것)이므로 연구 가능한 해석 모델이다. 다만 모형론 해석이나 연구를 하려면 다음 몇 가지를 먼저 잘 숙지해야 한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모형과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구분할 것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나 바울 등이 분명하게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학자들이 임의적으로 모형이라 말하는 것을 구분해야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그릇된 해석을 분별할 수 있다.

 

둘째, 교리와 관련된 모형과 교리와 상관없는 모형을 구분할 것

 

요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부활의 모형임을 예표해주셨다(마 12: 40). 하지만 요나가 육지에 다시 선 것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팔레스틴)에서 회복 될 것이라는 예표로 쓰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 24:32) 말씀하셨다고 무화과를 이스라엘로 해석하고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에 50년 희년을 더하여 1998년을 종말로 해석한 것도 그릇된 적용이요 해석이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알레고리적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하게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엉뚱한 시한부 종말론 교리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 말씀은 종말의 때를 잘 분별하라는 말씀이지 시한부 종말론의 날짜를 계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

 

셋째, 모형에도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부분이 있음을 명심할 것

 

너무 지엽적인 주장을 핵심적인 것으로 몰고 가면 성경 해석의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부차적인 부분을 핵심적인 것으로 집착하는 실수도 조심해야 한다. 일부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본질적 핵심과 부차적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넷째, 완전히 성취된 모형도 있고 부분적으로 성취된 모형도 있으며 미래 또는 내세에 이루어질 모형들(주로 요한계시록 예언들)도 있음을 명심할 것.

 

다니엘서 2장에 나타난 열 발가락을 과거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EC 공동체 10개국으로 해석하여 이 내용을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오해한 것은 잘못 해석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3) 나가면서

 

과거 일부 사람들이 알레고리와 모형 해석을 확대 적용하여 그릇된 성경 해석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알레고리와 모형 해석에 대한 일부 반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성경에는 알레고리와 모형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들 알레고리와 모형에 대한 바른 해석이 중요하다. 물론 성경 전체가 알레고리나 모형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일부가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신앙의 학문인 신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대두 된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던 이단들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성경 해석의 중심을 잡아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탁월한 신학자들이었다.

 

지금 한국 교계는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구별이 어려울만큼 심각한 포스트모던적 담론만이 난무하는 시대적 혼돈상을 경험하고 있다. 성령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싸우고 지켜온 참 신앙과 신학과 교리는 무시하고 마치 영적 사사기 시대처럼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하려 한다. 한국 교계가 바로 서는 길은 과거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엇을 지켜왔는 지, 그 지나 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고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른 길을 찾으려는 일은 등한시하고 너무 대중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넓은 길로만 걸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점이 없지 않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글: 조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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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름(눅 4:18, 행 10:38, 요일 2:20, 27)

 

1) 기름의 부드러움(사1:6)

2) 성령의 치유와 기름의 치유 기능(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 치료한 사마리아인, 눅 10:34; 막 6:12; 약 5:14)

3) 권능, 권위, 구별, 임재의 느낌 등을 강하게 표현

4) 향기(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15, 요 12:3)

 

6. 인침(고후 1:22, 엡 1:13, 4:30)

 

1) 소유권(엡 1:13)

2) 참된 인정(에스더 3:12; 요 3:33)

3) 변경 불가(단 6:8)

4) 마음(고후 1:22; 엡 1:13)과 이마(계 7:3)와 몸(고전 6:19; 갈 6:17)

5) 즉 보장, 안전, 소유권, 권리, 인정, 비밀, 확증

 

 

7. 물 (생수의 강, 요3:5, 요 7:37-39)

 

1) 물 같은 성령(요 7:37-39)

2) 씻음(물로 씻어, 엡 5:26, 중생의 씻음, 딛 3:5; 성령 안에서 씻음, 고전 6:11)

3)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배에서 생수의 강(요 7:38)

4) 삶과 영혼의 목마른 자들을 부르심(요 7:37; 계 22:17).

 

 

8. 바람(요 3:8, 행 2:1-2)

 

1) 임의로운 주권성

2) 끊임없는 역사

3) 강력한 힘

4) 신비성

 

 

9. 비(호 6:3, 시 72:6)

 

1)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묘사(여호와를 힘써 알자,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2) 은혜(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10. 새술(γλευκός, 불완전 발효로 달콤한 포도주, 행 2:13)

 

1) 성령충만을 보고 비평(조롱)한 말

2)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연인들의 착각과 오해

 

11. 숨, 호흡, 감동(요 20:22; 딤후 3:16)

 

1) 생명의 주인, 능력(숨을 내쉬며 사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 하나님의 영감(입김, 하나님의 감동Θεοπνευστος 으로)

12. ‘거룩한 수줍음’(성경 아닌 박영돈 교수의 표현,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수줍음을 가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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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성령 표현 관련 참고 자료:

칼빈의 성경 해석으로서의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조덕영)

 

 

1. 과학 해석에 대한 칼빈의 신학방법론

 

과학의 영역 해석에 대한 칼빈의 방법론은 무엇이었을까?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3 가지 칼빈의 공헌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연구에 대해 긍정적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둘째, 칼빈은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한 인물이다.

셋째, 칼빈은 성경을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 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의 방법으로 나아간다. 이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할 때 겪는 것과 동일한 문제에 부딪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추어 내려 오사 우리의 연약한 점에 자신을 맞추신다. 이것은 유아원 선생님이 유아 언어로 말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면서 자녀들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제한 된 지성의 어린 아이에게 그들의 이해와 경험을 능가하는 말과 개념을 사용할 경우 의사 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아이 수준에 맞는 방법이 요구된다. 이 접근 방법은 칼빈에 의해 적응이라는 용어로 언급된다.

 

 

 

2. 수사학으로서의 적응

 

적응(Accommodation)은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이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 상태 등에 적응 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법이다. 이 적응의 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적응의 방법은 일상의 언어와 전문가 사이의 담론의 긴장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3. 칼빈이 본 창세기

 

창조에 대해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 이들 견해의 특징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칼빈에게 있어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이요 완벽한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므로서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당대의 지성인이 아닌 단지 미개인까지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 방식으로 성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해와 달에 대해 칼빈은 창세기가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밝게 우리들에게 비추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신비한 세계를 더욱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서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이렇게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수준과 능력에 적응한다. 이것을 문자적 묘사로 보면 안 된다. 창세기의 기자는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의 교사로도 임명되었다. 그 때문에 창세기 저자는 배우지 못한 조잡한 교육 수준의 입장에 서지 않고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김성봉 박사(전 안양대 신학대학원장, 조직신학)는 칼빈의 이와 같은 적응의 방법이 현재의 삶을 위한 목회적 관심까지 염두에 둔 해석 방법임을 상세히 분석한다. 그렇게 볼 때 칼빈에게 있어 창조의 6일은 24시간의 여섯 단위가 아니었다. 칼빈은 순간 창조 개념을 반대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4 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확장된 시간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사고 방식에 적응한 것이었다. 칼빈은 그에 따라 궁창 위의 물도 구름에 적응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과 조금 다른 해석 방법이다. 즉 칼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적응된 것이다.

 

4. 과학적 해석의 부담에 대한 칼빈의 자유함의 근원

 

여기서 필자는 칼빈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과학적 해석이 필요할 경우 당연히 일부 잘못 해석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과학자들 조차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따라서 과학자들도 당연히 다양한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 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응 이론 아래에서 칼빈은 자신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에 대해 자유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 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철저하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탁월한 성경 원문 연구가였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당시 유럽의 인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수준의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주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과학적 해석의 부담에 대해 자유함을 가졌을 거라는 충분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5. 칼빈과 유신진화론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해 칼빈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생물의 “종류(min)”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1절에 처음 나타난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종류대로의 창조의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종류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Elohim, 40회)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10회)이다. 그럼에도 칼빈은 이 언어를 아주 일반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한다. 진화론은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자연 과학의 주요 이슈가 된다. 칼빈의 시대는 아직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론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대였다.

 

칼빈은 종류대로라는 이 단어를 주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창세기를 주석하는데 있어 당시의 수준에서 단순한 언어로 묘사하려는 입장을 지속한 듯하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 1:19).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6. 21세기에도 성서해석 방법으로서의 칼빈의 "적응"의 적용은 유효한가

 

적응의 방법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가?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적응”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핵심적인 중요한 논제는 아니었으나 성서 해석과 신학 구조와 관련되어 지속적인 이슈였다고 주장한다. 존 딜렌버거(John Dillenberger)도 적응의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자연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분명히 중요한 이슈의 하나였다고 본다. 칼빈은 결코 과학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열린 신학자였으며 과학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자였다. 물론 칼빈도 간혹 과학적 이론을 바르게 그의 해석에 사용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적응의 방법 아래에서 그런 작은 오류는 그의 신앙이나 성경 해석 방법에 누(累)가 될 수 없었다. 성경의 중심은 과학이 아니라 그 과학을 만드신 주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영생의 소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서의 기록자들조차 “잘못된 견해에 적응하면서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과학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 계시로 재해석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였다. 과학의 문제에 있어 해석 방법과 관련하여 적응의 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 칼빈은 과학 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 적응이라는 해석 방법을 통해 성경 해석이 모든 역사, 온누리를 향한 적응된 해석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 일관적으로 흐르게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해석 방법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은 복음 전파와 신앙의 삶에 있어서 문제도 되지 않을 뿐더러 전혀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칼빈이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도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신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의 생소한 이론이나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적응의 방법은 때를 기다린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보았던 것이다.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하나님조차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하여 낮아지셨는데 우리 인간이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어떤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경향도 교만의 반영일 수 있다. 칼빈은 이점을 잘 아는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칼빈 시대나 모세 시대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상황과 과학의 발달을 분명 예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책이요 미래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 만능, 과학주의가 만연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적응은 어떤 것일까? 또 미래에의 적응은 무엇일까?

 

 

7. 적응의 방식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과학의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적극성)

 

적응이란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는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였고 학문의 영역을 회복 시켰을 뿐 아니라 학문을 부자유스러운 속박에서 건져내었고 칼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학문의 최종적 결과 또한 학문의 자유 아래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적극적으로 과학의 문제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쟁과 협상 없이 승리하는 전쟁이란 없다. 칼빈이 말한 ‘성령의 겸손(condescension)’에 의지하여 학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겸손히 기다리는 것과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양보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진리는 적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분명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적응의 방법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대적 이슈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사랑과 평화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적응의 방법은 이 하나님의 본래 사랑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 지를 추적한다. 즉 기독론적 사랑과 평화가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는 개념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 관계가 없다. 지명수 박사(안양대)는 모든 복음이 그 핵심 내용에 있어 동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은 가장 넓은 함의와 적용을 갖는 말씀으로 보고 이 최초의 축복을 최초의 복음, 창조의 복음이라고 불렀다. 이 창조의 복음은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축복이 포함될 것이다. 이것은 생태계나 생명 윤리 등을 다룰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신현수 박사(전 평택대 부총장)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의 실현의 행위로서 샬롬(shalom)의 신학을 제안한다. 구약의 평화는 기본적인 어떤 것으로 사회적, 역사적 및 다른 형태의 변화도 그것의 기본 의미를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 갈증 혹은 기쁨 등과 같이 변화 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 안에서도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질서의 샬롬을 촉구한다 할 수 있겠다.과학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지향하는 가는 복음주의자들의 끝없는 고민이다.

 

기독 과학 철학자 델 라치(Del Ratzsch)가 말하는 ‘사랑 안에서 진리 말하기/발에 관한 몇 가지 생각’(Speaking the Truth in Love/Some Thoughts About Feet)도 흥미 있는 제안으로 그 중 하나의 도구일 수도 있다. 델 라치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논쟁 할 때의 세 가지 원칙으로 첫째. 말할 때(Speak) 공동체 내부를 쉽게 깨뜨리는 누(累)를 범하지 말 것(토끼 발을 모두 잘라 버리는 발이 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입에 당신의 과학적, 신학적 또는 철학적 발을 집어넣지 말고 참 진리(the truth)를 찾도록 애쓸 것(입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말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어 짐) 셋째, 사랑 안에서(in love) 한 몸을 이루는 (복음의) 친구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그것은 자신의 발을 쏘는 것이요 엽총으로 티눈을 잘라내는 격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 델 라치가 보기에 제일은 사랑이다. 필자가 보기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한 몸이다.

 

둘째는 겸손과 기다림의 방법이다.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 우리 인간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였다. 적응을 오해하여 성경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누(累)를 범하면 안 된다. 적응의 이론은 인간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잘못 적용하여 잘못된 정죄의 오류에 빠지지 말게 하며 겸손히 때를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자연 계시가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에 있어 완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앞서 자신의 주장을 계시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일반 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학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세속 도시의 발달에 대해 부정적인 프랑스의 자크 엘룰(Jacque Ellul)은 현대의 과학 기술이 기독교적인 인간관, 사회관과 충돌한다고 보는 반면 하비 콕스(Harvey Cox)는 기독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많은 학자들이 양편의 입장으로 갈라서게 된다. 세속 도시와 과학 기술의 부산물 가운데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보게 되는 면에서 복음주의는 양쪽 측면을 관찰하면서 좀더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림이 옳다.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발생하는 성경 해석 상의 모순과 대립을 감정적으로 대처해서 자신의 견해만 진리라 여기고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판넨베르그도 이런 적응 이론이 성경의 영감론을 반대하는 게 아니요 말씀 가운데 모순과 대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셋째, 명료성이다. 겸손과 기다림으로서의 적응은 단순한 소극적 대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료성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의 창조 섭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명료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과연 성경적 이론 인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문제는 명료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성경과 과학(자연 계시)과 피조 된 인간에 부여된 도덕과 양심에 따라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 진화론은 결코 복음주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여기서 진화론은 명료하게 부정된다.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다만 그럼 언제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창조되었는가의 문제는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첨예한 문제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겸손과 기다림의 적응이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겸손과 기다림 자체가 명료함인 것이다. 필자 개인의 생각은 생물 진화와 달리 우주 기원론, 지질과 지형학, 층서학, 문화적 발달과 관련된 부분은 분명 생물 진화와 구분할 수 있다. 영역에 따라 진화라는 말을 발달, 발전, 진보, 진전, 변이, 변천, 프로세스 등의 말로 대체 또는 치환하여 적극적으로 관련 전문 기독학자들(유신론적진화론자들)과 활발하게 토의할 수 있다고 본다.

 

넷째, 적응의 적극성이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를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만드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과학에 대해 게으르지 말고 연구하며 접근해 갈 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가만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늘 방향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접근한다. 적응 이론은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성경과 과학과 삶 안에서 우리가 가장 합당한 대답을 이끌어낼 것을 요구한다. 즉 적응 이론이 세상을 향한 결코 소극적 대처 방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적응의 방법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준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들이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려는 유혹을 방지한다. 더불어 구원의 핵심이 아닌 창조의 영역의 문제(adiaphora)에 있어서는 보다 자유함을 가지고 자연의 노예나 폭군이 아닌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생태와 환경은 단순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 자체가 다차원적이다. 이런 다변적 환경에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과 청지기적 사명은 분명 적응의 원리의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과 관련된 성서 해석에 있어 칼빈의 적응 방법과 이론은 과학 기술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