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의 안셀무스(안셀름, 기독교 사상가 탐색)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Anselmus Cantuariensis,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 ~ 1109)
그리스도의 죽음!!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결 받은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롬 5 : 19)
“이는 영광의 나무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고통을 참으신 나무로다
인류의 온갖 죄악을 위하여
태고적 아담의 죄를 위하여“
1. 안셀무스의 생애
알프스의 아오스타 풍경
1) 출생 :
(1) 1033년 이탈리아 서북부 고대도시 아오스타(현 피에몬테주-주도 토리노)
(2) 아오스타는 현대 밀라노에서 알프스 꾸르마이어를 거쳐 프랑스 샤모니 몽블랑(Chamonix Mont Blanc, 1924년 제 1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알프스 산맥에 있어 인구 규모는 그리 많지 않음)
(3) 이탈리아 귀족 롬바르드 가의 자손으로 태어나다
2) 1060년, 북부 노르망디 르 벡(Le Bec) 수도원(베네딕트 수도원)에 정착(수도원이 유명한 지역)
3)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은 영국을 공략한 후 르 벡 수도원장 랑프랑(Lanfranc)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름
4) 안셀름은 르 벡 수도원의 수도원장(1078-93, 15년 재임)이 되다..
르벡 수도원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중세 수도원들은
유럽의 신앙과 영성과 학문의
일정한 교두보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일생도
수도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이었다.
르 벡 수도원(by E. S. Cho)
5) 그 후 1093년, 영국 왕 윌리엄 2세에 의해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다(1109년 죽기까지 15년간 대주교 역할).
※캔터베리(Canterbury)에 대해
런던 남동쪽 약 85km, 스투어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브리튼 시대(로마 침입 이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하여 로마 점령군의 거점이 되었으며, 로마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켄트 왕국의 수도였으며, 591년에는 로마가톨릭 교회가 파견한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에 상륙, 국왕을 비롯하여 많은 켄트인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교회를 세운 것이 캔터베리대성당의 기원이다. 8~11세기에는 데인인(人)들의 약탈로 교회도 불타 버렸다. 노르만인들이 잉글랜드를 점령한 후 색슨인으로서는 최초로 T.베켓이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헨리 2세와의 불화 때문에 1170년 암살당하였으며, 죽은 뒤 성인(聖人)의 서열에 올랐다.
지금의 대성당은 1174년 화재로 소실된 후 84년에 재건되고 1495년에 증축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되었다. 캔터베리대성당은 영국 성공회의 총본산이며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거행하는 대관식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새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는 관습이 있다.(두산백과) 참조.
6) 그러나 당시 유럽의 노르만디 공화국과 영국 간 긴장 관계와 교황과 영국 왕 간의 충돌의 와중에서 대주교가 된 이후 주로 유럽에 망명 생활!<1093년 12월 4일 정식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에 부임한 후, 윌리엄이 질병에서 회복되자 안셀무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고, 안셀무스는 이를 성직매매 행위(성직 임명에 대한 보답)로 보고 거절. 1097년 60세의 나이로 추방 당함.>.
7) 1100년 윌리엄 2세 사망과 헨리 1세의 초청으로 캔터베리로 돌아오다. 그러나 서임권(평신도에 의한 성직자의 임직) 문제로 재 추방. 로마로 망명.
8) 유럽 체류 동안 동방 정교회에 맞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信條)의 하나인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성자[聖子]로부터') 교리를 옹호하는 등 공의회에서 적극적 역할(1054년 이래 동-서방교회 분리)
*참조: '동로마교회의 신조는 "성신은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서로마교회는 거기에 '그리고 성자에게서'라는 의미의 '필리오케(filioque)'를 수용. 즉 서로마교회의 신조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주장. 로마 가톨릭은 6세기부터 사용해 온 "필리오케"교리를 11세기 공식적으로 수용)
9) 1106년 왕의 양보로 캔터베리로 돌아오다.
10) 중세 최초의 위대한 신학자!
<1720년 교황 클레멘스 6세(1700~21 재위)는 안셀무스를 교회박사로 선언>.
2. 주요 사상
1) 중세 스콜라 신학(안셀름으로부터 종교개혁 직전까지의 신학)
<※스콜라주의란?>
스콜라(schola)는 본래 중세의 학교를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강의한 교사에 의해 형성된 학문을 바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콜라주의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데 중세 카톨릭의 철학, 신학 그리고 교수 방법을 통칭하는 단어가 되어 있습니다.
즉 중세 기독 학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조직화하는 방법을 찾았지요.
이를 통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에리우게나(810경-877경, 아일랜드 출생으로 파리서 활동, 구원은 예정-죄는 예정되지ㅡ않았다 주장<이설>, 신플라톤주의-스톨라신학 설파 ) 또는 안셀름으로부터 11-15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났던 이들 일련의 기독철학 체계를 스콜라주의 시대로 봅니다.
어거스틴(Augustin, 354-430)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반면 스콜라주의자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및 철학 이론에 대한 헬라어 원본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이후 아랍어 번역본이 다시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당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적극 이용하면서 신앙을 이성과 합리적으로 해석한 데서 스콜라철학하면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를 사람마다 편하게 스콜라철학 또는 스콜라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신학 등의 별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1) 안셀름은 로셀리누스(Roscellinus, 1050경-1125경, 프랑스 태생으로 신학에 있어 철학의 변증적 접근, 유명론의 대표 주창자)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강하게 반대하고 실재론을 가르침.
-“보편(Universalia)이 개체(Res)보다 앞서는가?(실재론)
개체(Res)가 보편보다 앞서는가?(유명론)의 문제!”-
*플라톤-> 영혼은 세상에 나기 전에 이데아를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한다. 이성은 영혼의 본질인데 이 영혼의 이성적 지각인 관념 혹은 보편은 실재성이 있다. 따라서 "보편은 개체보다 앞선다"(Universalia ante rem)
*아리스토텔레스-> 보편은 단지 개체 안에 활동하는 힘이다. 따라서 “보편은 개체 안에 있다”(Universalia post re).
(2) 캔터베리는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면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도 무너진다고 봄
2) Monologion(독백론, 1077)
(1) 신 존재의 증거 제시
(2) 우리가 선함의 분별이 있다는 것은 표준이 되는 절대 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절대 선 뿐이며 가장 선하다. 가장 선한 까닭에 가장 위대하기도 하다.
(4) 따라서 최고의 선과 최고의 위대한 존재 즉,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인 하나님이 계신다.(어거스틴도 유사한 주장)
3) Proslogion(A Discourse대어록, 對語錄, 1078)
(1)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
(2)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이해한다!”
(3)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어거스틴 (354-430, crede, ut intelligas, "믿는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다.")
*로셀리니의 제자 피터 아벨라르드(Abelard, Peter, 1079-1142, 1141년 Sens 회의에서 정죄 받음)는 “나는 믿기 위하여 안다”(이성에 의한 시험을 통해 완전한 이해에 도달 주장)
(4)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5)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분“(존재론적 논증, ontological argument)
(6)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어거스틴-안셀름-칼 바르트 1931)은 칼 바르트의 신학 접근법에 영향
4) 안셀무스의 구원론(성육론)
“Cur Deus Homo?”(1098,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Why God Become Man)?!
(1) 르벡 수도원의 수사 Boso와 대화 형식의 저서
(2) Cur Deus Homo=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Why God Become Man?
(3)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하는 가
(4)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 두 가지 속성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5) 안셀름은 이성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다. 성육신과 십자가를 전제한 전제론적 접근이었다.
5) 인간 창조 이유=
(1)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2) 창조의 복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데 있다.
6) 인간 창조 목적의 좌절=
인간의 죄 때문이다!
(1) 죄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을 드리지 못한 결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
(2)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으려면 인간은 죄에 대한 배상의 의무가 있는 데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다!
(3) 하나님이 이러한 배상을 인간 대신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한 배상을 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면 회복시킬 의무와 능력을 가지게 되신다(성육신의 필요성).
(5) 우리의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배상 된다(적절한 보속補贖, satisfaction).
7) 존재론적(본체론적) 신 존재 증명(Ontological Argument)
(1)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이다.
(2) 즉 하나님이라는 관념(사상)에서 하나님의 실재가 추론 된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위대한 실재를 상상할 수 없는 실재다”
3. 안셀무스 평가(묵상과 토의, argument)
1) 신앙은 정말 합리적인가?!
2) 당시 교회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해 제도와 명예와 보속(배상) 개념에 친숙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는 신학은 아닌가?
3)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다루는 데 있어 너무 십자가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과 승천 교리에 소홀한 점은 없는가?
4) 비록 11세기의 사회상과 분위기를 반영하여 안셀무스가 이성을 의지하여 논증하고 있기는 하나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불신자들에게 왜 십자가가 필요한 가를(십자가 이외 다른 일은 왜 안 되는 가를) 주장하는 일이었다.
5) 강력한 주장(오직 십자가)을 반영함에도 그의 주장은 이성을 기반으로 유연하였다.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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