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조직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은총과 이성, 두 날개로 전개한 가톨릭 사상(기독교 사상가 탐색)

728x90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은총과 이성, 두 날개로 전개한 가톨릭 사상(기독교 사상가 탐색)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은총(신앙)과 이성(자연)의 양날개

(기독교 사상가 탐색)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신앙과 이성"의 조화

“하나님은

인간의

말과 상징을 통해 믿을 만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와 언어를 초월하신다.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 언제나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을 제일 잘 아는 자이다.”

1. 생애

1) 1225년, 나폴리 근처 로카세카에서 아퀴노(Aquino) 지방 백작 란돌프의 아들로 태어나다.

2) 별명 ‘벙어리 황소’(풍채가 당당한 사람)

3) 1244년, 전통적 베네딕트수도회(정통적 권세를 가진 수도회) 수사가 되기를 바라던 가문의 강한 바람을 저버리고 탁발(卓拔, mendicancy, 자선에 의존하여 금욕적이고 생존을 도모하는 행위) 수도회인 도미니크파(복음과 학문, 설교와 회개케 하는 사명 강조) 수도회(the Order of Preachers)에 들어가다.

4) 1252. 파리와 꼴로뉴 대학에서 알베르투스(Arertus Magnus, 1193-1280, "전과박사, Doctor Universalis", 신학구조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최초 활용)에게 배우고, 파리서 선생 노릇(이후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교수 생활)

5)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가톨릭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2층집)의 조화 추구.

6) 알베르투스는 수집의 대가, 토마스는 체계화의 대가

7) 성자 반열(1323)

8) 교회 박사(Doctor Ecclesiae) 칭호(1567)

9) 가톨릭 교회 대부(Patron) 칭호(1880)

2. 저서(성경 주석, 철학 논문, 신학 논문,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등 방대한 분량)

1) 『이교도에 대한 지침서』(Manual against the Heathen):

1260년대 초반,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 같은 이교도들을 위해 쓰여 진 4권으로 된 책. 1-3권은 주로 이성과 철학으로 하나님의 존재, 사랑, 지혜, 전능 등의 속성, 세계 창조, 섭리, 예정 등 설명. 마지막 권에서는 계시적 성격을 가지는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성례전, 부활 등 설명.

2)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총 512개 문답(생의 마지막 10년 동안)으로 이루어진 주(主) 저서임

첫째, 하나님께 대한 교리와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경위

둘째,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도덕, 덕, 악덕)

셋째, 성육신과 성례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ologica)에 나타난 신 존재에 대한 5가지 증명들(다섯 가지의 길)

신은 그 존재가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하고 요청된다. 안셀무스가 신의 본성이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를 도출시킬 수있다고 본 반면, 아퀴나스는 인간이 신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로부터 존재를 도출하는 존재론적 논증의 진행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 고유한 영향과 결과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이 원인이 되는 결과들을 보여줌으로써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은 발생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퀴나스는 세계의 시작이 있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창조론교리는 입증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논증은 잠세태의 현실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1)첫째 방식

순수 현실태(actus prus;잠세태가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른 존재의 우선성을 드러냄. 이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초의 부동의 동자(원동자)와 유사하다.

(2)둘째 방식

신은 최초의 동력(causa efficiens)이다.

그러므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부차적인 동력인들은 원인성을 지니기 위해 신과 동인적 인과성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세계 안에 널려있는 동력인들이란 \'부차적인 원인들\'일 뿐이다.

(3)셋째 방식

신은 필연 존재(ens a se)이다.

아퀴나스는 신의 본질에 대한 인간의 지식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는 가정은 거부한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는 모든 다른 존재자들과 세계 전체로부터의 신의 차별성을 발생과 소멸을 초월하는 신의 특성에서 찾으려 했으므로 신과 피조물을 구별하는데 시간적인 차원이 관여한다. 신은 시작과 종말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세계의 한부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4)넷째 방식

신은 스스로 있는 존재(esse per se)이다.

이것은 네 번째 방식과 관련된다. 신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온갖 제한된 완전성의 원천이다.

(5)다섯째 방식

신은 만물이 잠세태로부터 현실 세태로 질서적으로 운동하는 변화 과정의 원천이면서 지향하는 바의 목적(casua finalis)이다.

아퀴나스는 다섯 가지 증명방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이 동자 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초월적으로 신에 대한 성격을 규정한다.

신은 순수현실태로 운동의 제일 원인(제1 증명)이며, 만물의 궁극적인 목적(제5 증명)이며 도한 제일의 동력인(제2 증명)이며, 동시에 모든 완전성의 원형적 또는 형상적 원인( 제4증명)이다.

무엇보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세계의 한부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제 3증명).

아퀴나스는 이성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철학적 추론에 입각해서 인의 속성들에 대해 논증한다. 즉 신의 자존성으로부터 다른 완전성을 도출한다. 독자적 단일성, 진리성, 무한성, 방대성, 편재성 그릭소 영원성 등이 그것이다.

3. 토마스 아퀴나스를 간략히 살펴봄으로서 얻는 것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에 새로운 방향을 어떻게 제시하였는가

2) 신학 이해를 위해 철학이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이유

3) 자연 신학 분야에 있어 아퀴나스의 기획을 통해본 그의 업적의 방대함

4) 칼 바르트의 "자연신학에 대한 반대 입장"에 대한 이해의 자료 제공

5) 현대적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이 고전적인 자연 신학을 현대적으로 대치하고자 제시한 수정적 제안에 대한 이해의 자료

4.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 유비(類比, 類推; Analogia)

유비란 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존재성의 차원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유비(한 영역에서 어떤 원칙이 통하면 다른 유사한 영역에서도 그 운칙이 통할 수 있다고 보는 사유)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유비의 중요성 두 가지(맥그라스)

첫째 유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하나님 편에서의 양보”).

둘째 유비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억에 잘 각인되는 특징이 있다.

(1) 비례(proportionality)의 유비:

종류가 다른 두 가지 대상 속에서 서로 일치하는 특성들 들여다보기(예: 개의 충성심과 인간의 충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즉 두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유비가 있을 뿐이다)

(2) 속성(attribution)의 유비 :

예를 들면 선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막 10:18). 그런데 이 선함이라는 단어의 인간적 이해는 인간의 선한 속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런데 ‘인간 피조물이 선하다’는 이해의 수준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속성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불완전한 실재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완전한 속성 이해가 아닌 속성의 유비만이 있을 뿐이다.

(3) 존재(entis)의 유비: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 관련.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과 창조된 세상 사이에는 상응 또는 유비가 존재한다는 입장. 일반적으로는 두 존재나 사물이 전적으로 다르다 해도 하나에게 적용 되는 용어가 다른 하나에도 어떤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는 관계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4)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이것은 주로 신학자 칼 바르트와 연관된 이론으로 하나님과 창조된 세상 사이에는 어떤 상응 관계도 없으므로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자기계시에 근거해서 유비가 성립된다는 주장. 칼 바르트의 입장이 이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참고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는 무엇을 말하는지요?

1) 스콜라주의란?

스콜라(schola)는 본래 중세의 학교를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강의한 교사에 의해 형성된 학문을 바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콜라주의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데 중세 카톨릭의 철학, 신학 그리고 교수 방법을 통칭하는 단어가 되어 있습니다. 즉 중세 기독 학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조직화하는 방법을 찾았지요. 이를 통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9-15세기(에리우게나) 또는 11-15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났던 이들 일련의 기독철학 체계를 스콜라주의 시대로 봅니다.

어거스틴(Augustin, 354-430)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반면 스콜라주의자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및 철학 이론에 대한 헬라어 원본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이후 아랍어 번역본이 다시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당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적극 이용하면서 신앙을 이성과 합리적으로 해석한 데서 스콜라철학하면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를 사람마다 편하게 스콜라철학 또는 스콜라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신학 등의 별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2. 스콜라주의 신학자들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Eriugena, 810?-877?),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4.21),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 알베르투스 마구누스(Albertus Magnus, 1193/1206-1280),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 Giovanni di Fidanza, 1217~1274),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9) 등이 모두 스콜라주의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 가운데 에리우게나(9 세기)를 스콜라주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고 안셀무스(11세기)를 시발로 보기도 합니다.

3. 스콜라 철학의 개념은 무엇이고 어디에 필요한가

스콜라철학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던 질료(materia)와 형상(forma), 개별화(individuatio), 관계(relatio), 보편(universale), 본질(essentia), 선험적(trascendentalis), 실체와 우유(substantia et accidens), 완전성(perfectio), 우연(contingens), 원인(causa), 유비(analogia), 인과원리(principium causalitatis), 존재와 존재자(esse et ens). 존재원리(seinsprinzip), 참여(participatio), 추상(abstractio), 현실태와 가능태(actus et potentia), 형이상학(metaphysica) 등 스콜라철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해야 접근이 가능합니다. 이 외에도 신학을 한 사람들에게도 낯선 또 다른 철학적 전문단어들을 이해해야 하는 난관이 있습니다.

경험과 이성과 논리에 기초한 이들 스콜라주의 철학은 ‘자연신학’이라고도 하며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신학’과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구분이 되기는 하나 완전히 분리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즉 은혜와 자연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은혜의 전제가 되고 은혜는 자연을 완전케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일반 계시, 일반은총 영역)과 은혜(특별 계시, 특별 은총 영역)의 조화는 오랜 기간 기독 신학자들의 연구 자료가 되어왔습니다.

스콜라신학이나 현대신학과 같이 철학적 사변적인 신학은 스탠리 그랜츠(S. Grenz)와 로저 올슨(R. Olson)의 말("Who Needs Theology?")을 빌리면 학술신학(academic theology)이라고도 합니다. 전문신학자들이나 철학에 관심있는 목회자들의 경우 신학자들 사이의 소통이나 철학자, 타종교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해 이들 철학적 언어들을 이해할 필요가 반드시 생깁니다. 따라서 이들 철학이나 학술신학은 일반 평신도들은 구태여 공부할 필요가 없으며 이해하지 못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스콜라신학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이나 둔스 스코투스의 실재론(實在論)과 오컴의 유명론(唯名論)은 오늘날 신학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으므로 신학도들은 알아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가 설명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는 로마 카톨릭의 스콜라 신학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스콜라 신학이란 중세 로마 카톨릭 신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어 설명하려고 한 신학입니다. 그래서 스콜라철학이라고도 하는 것이지요.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일반적 특징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철학적으로 논증합니다. 이것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르는 자연철학적 방식인데 그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신 존재 논증을 말합니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pt. Ⅰ. Q. 2, Art. 3). 논증(論證)은 전제(前提)가 있고, 그 전제에 따르는 증거들(evidences)을 가지며, 그 증거들의 목표인 결론으로 구성됩니다. 이때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고 그 전제의 증거들이 만든 결론이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그 논증은 비로소 증명(證明, proof)이 됩니다. 따라서 신 존재 증명이란 말보다는 신 존재 논증이라 부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신 존재에 대한 깊은 논증이 아닌 질문하신 토마스 아퀴나스의 5 가지 신 존재 논증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운동과 변화(motion or change)로부터의 논증입니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볼 때 그 물체가 스스로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하여 움직여집니다. 따라서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제일의 (원인으로서의) 운동자(Prime mover)인 “부동(不動)의 동자(動者)”(unmoved mover)가 있어야 합니다. 그 “부동의 동자”가 바로 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인과법칙(因果法則)에 따른 능동인(能動因)으로부터의 논증입니다.

본래부터 능동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 사물이 그 자체가 원인이 되려면, 자신보다 먼저 능동적 자신이 존재해야 되는데 그것은 논리상 불가능합니다. 본질에 있어 알려져 있는 모든 원인이란 것은 동시에 다른 원인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찰 가능한 유한한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원인들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인과 법칙으로서의 제일 원인(First-Cause)을 필요로 하며, 이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우연적 존재들로부터 필연적 존재를 따지는 논증입니다.

관찰된 대상은 본질에 있어 우연적입니다. 우연적 존재들(contingent beings)이라 함은 대상이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물에 의존함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의 존재는 그들이 존재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이지요. 이와 같은 존재의 가능성은 그 이외의 것에 의존하지 않는 필연적인 존재(Necessary being)가 있음을 시사해주는데 이 필연적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넷째, 자연에는 상대적 가치가 존재하므로 이에 따른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보는 논증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 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말합니다. 즉 가치의 등급(degrees of value)을 매깁니다. 이런 가치의 상대적 비교는 필연적으로 판단의 규정과 일치하는 절대 가치(Absolute value)의 기준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즉 선함과 질서, 조화, 아름다움, 완전함 등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제공한 존재를 바로 신이라 여기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에 존재하는 지적 목적성으로부터 신적 설계자를 논증하는 방법입니다.

자연에는 특정한 질서와 조화와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일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맞는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질서나 조화나 모양을 단순한 운명이나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잘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자연은 우연이 아닌 자신이 의도하는 지적 목적에 따라 모든 모양과 일을 이루어 나가는 어떤 지적 설계자가 있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목적성(purposiveness)이 있습니다. 그 신적 설계자를 바로 신이라 봅니다.

이 논증의 처음 세 가지는 우주에 있는 모든 알려진 경험적 속성(운동,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에서 나오는 원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도 크게 보면 우주론적 논증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데 다섯 번째 논증이 이에 해당합니다(telos라는 헬라어는 끝, 목표, 목적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논증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안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이구요. 다만 중세 카톨릭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마침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접했으므로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플라톤의 책들이 번역 되었다면 당연히 플라톤의 사상도 흡수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므로 플라톤을 아무리 뛰어 넘으려 했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안에는 플라톤적인 요소들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논증에도 그것이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4번째 논증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 논증을 플라톤적 논증이라고 말하지요.

신 존재에 관한 논증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말고도 인간은 절대적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가지고 논증하는 안셀름(Anselm), 데카르트(Descartes) 등이 주장한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Ont-라는 단어는 존재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파생된 접두어)과 인간의 선악과 참과 거짓 등을 판단할,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내릴 궁극적인 입법자와 재판관과 같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최고선(最高善)의 완전한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도덕론적 논증(Moral argument)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토마스 아퀴나스적 자연철학, 자연은총적 논증은 일부 변증학이나 창조과학운동, 지적설계운동 등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많이 활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자연신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신 존재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데이빗 흄이나 버트란트 러셀 같은 세상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 같은 일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신랄한 논리적 비판도 만만치 않은 편이지요. 그래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신 존재 논증에는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철학적 성찰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신 존재 논증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존재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에 대한 핑계치 못할 분명한 증거를 그 만물 안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롬 1:20). 성경은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라 하였으니(벧전 3:15) 어떤 방식이 성경적이고 바른 대답인 가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항상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적 단순한 자연신학 논증이나 변증이 아닌 참된 성경적 복음주의 창조신앙의 논증과 확산에 대한 전방위적, 종합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런 부분에서 너무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상이요 우리들의 창조 신앙의 영역입니다. 본 창조신학연구소는 신학을 단순한 이론적 책상신학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신학의 눈높이를 대중들에게 낮추어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종합적 창조 신앙의 첨병 역할의 짐을 감당하기를 다하겠습니다.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