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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신학과 철학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준 신플라톤주의란?(플로티누스, 오리겐 그리고 성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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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준 신플라톤주의란 무엇인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성경 해석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구약 성경과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그 이후의 복음 전파에 대해 기록한 신약 성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시의 책인 이 성경은 한 가지 언어가 아닌 특정한 민족인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와 팔레스틴에서 널리 사용되던 아람어 그리고 예수님 당시 글로벌화 된 언어였던 헬라어 등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언어는 그 말을 사용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던 지역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한다.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반드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하는 책이라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언어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약의 히브리어 '말씀'(다바르)이 히브리어를 모르던 헬라 세계에서는 ‘로고스’(요 1장 1장)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 요한은 이 ‘로고스’를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히브리어 ‘말씀’은 복수(다베롯, 신 33:3)로 사용이 가능한 단어이다. 물론 ‘로고스’도 당연히 복수형(‘로곤’)이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데 말씀은 복수형이 가능한 단어라는 이런 성경 언어의 미묘한 복잡성이 성경 해석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게 하고 신학의 필요에 대한 당위성을 가지게 만든다.

 

우리말 번역 성경도 당연히 마찬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환경에서 탄생한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다시 간단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한 유대인은 아침, 저녁으로 1일 2식을 하였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의 점심이란 용어는 사실 조금 어색한 단어이다. 더구나 점심(點心, 눅 11:37; 눅 14:32)이나 극락(極樂, 시 43:4) 같은 단어들은 성경적 용어가 아닌 불교식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도 타문화권의 새로운 언어로 번역이 될 때에는 그 언어 선택에 있어 문화적 제한성으로 인해 이렇게 때론 문화적 수용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는 또한 늘 유동적으로 변한다. 성경은 그래서 그 문화를 수용하면서 문화와 언어의 변천을 따라 또 다시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번역본을 요구하게 되고 신학은 독자들이 언어의 변신에 따른 부적절한 성경 해석을 하지 않도록 제어하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말 개역개정판 성경이 나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위에 보기를 든 ‘극락의 하나님’이 개역개정판이 나오면서 ‘큰 기쁨의 하나님’(시 43:4)으로 바뀐 것 등은 바로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 성경신학자들이 어떻게 성경을 꼼꼼하게 살피는 지를 보여주는 한 예인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시작

 

불교와 유교와 토착 종교와 샤머니즘의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와 달리 주후 1 세기 복음이 먼저 들어간 유럽은 헬라 철학이 꽃피던 지역이었다. 당연히 초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된 인물들 가운데는 철학에 능통한 지식인들이 많았다. 따라서 초대 교회때부터 신학은 이 헬라 철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가 논제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반대로 철학자들은 이들 성경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가 늘 과제였다. 그리스도 이전 유명철학자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보려고 했던 철학자가 있었는 가 하면 철학자들을 모두 헛되고 헛된 일을 잡고 늘어지는 한심한 몽상가처럼 보는 학자도 있었다.

 

신학자 가운데서도 입장은 갈라졌다. 철학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었던 라틴신학자 터툴리안이 있었는가 하면 철학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도 있었다. 철학에 대해 팽팽하게 의견을 달리하는 이 같은 신학의 양대 줄기는 사실 21세기의 신학계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에 일정한 영향을 준 신플라톤주의는 바로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잉태되었다.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란 바로 주후 3-6세기 이곳 아프리카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플라톤(Platon, B.C. 428~348) 철학을 계승한 철학자들이 지녔던 철학적 입장을 일컬었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175-242)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입장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문헌으로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카스의 수제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 204-270)를 신플라톤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으로 꼽는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나 방랑 생활을 거쳐 로마에 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성품이 경건하고(기독교적 경건이 아님) 온화한 성격으로 일반 시민들 뿐 아니라 로마 황제 칼리에누스와 왕비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를 향한 시민들의 존경심은 거의 일방적인 미신적 섬김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플로티누스의 사상

 

플로티누스의 철학과 사상은 6권의 책(엔네아덴)에 집약되어 있다. 전 54편으로 이루어진 플로티누스의 글은 제자 포르피리우스(Phorphyry)에 의해 이들 6권의 책(Enneaden)으로 남겨 졌다. 각 권은 매 9장으로 되어 있어 총 54편의 간략한 논문이 묶여진 것이다.

 

이들 논문을 살펴보면 (1) 제 1권은 주로 일반적으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주제들(윤리학 관계 논문-미덕, 변증법, 행복, 미, 선, 악의 유래, 함당한 죽음 등)이며, (2) 제 2권은 세계의 문제들(세상의 창조와 발전 과정- 천구와 회전 운동, 별들의 영향력, 두 가지 물질, 가능태와 현실태, 피조물, 전체상, 바람 봄과 멀리 있는 것이 작게 보이는 이유, 영지주의 에 대한 반대 등)을 다루며, (3 제 3권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주제들(운명, 선견지명, 악마, 사랑, 비육체적인 것, 영원과 시간, 자연의 본성, 학문 등)을 다루고, (4) 제 4권은 플로티누스의 중심 주제인 영혼에 대한 것(영혼의 실체, 감각과 기억, 영혼의 불멸성, 지상으로의 영혼 강하 등)을 다루고, (5) 제 5권은 정신과 이념에 대한 것이 수록되었고, (6) 마지막 6권에서는 일자(一者)와 관련된 존재와 수(數), 선(善) 등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들 6권이 엄격한 분류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플로티누스와 그 제자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학설의 창시자라고 자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충실한 플라톤의 제자요 해설자로 여겼다. 하지만 플라톤을 해석하는 데 있어 이들의 견해가 플라톤과는 근본적 차이가 생겨나면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불려 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와 관련된 신플라톤주의의 주요한 특징과 입장

 

1) 신

 

신플라톤주의는 물질적 세계보다는 영적 세계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즉, 물질적 세계는 영적 세계에 의존적임을 강조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One)'에서 파생된 것이며,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세계에서 영적이며 영원한 ‘하나’, 즉 신(God)에 도달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다. 이 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누스(Nous)보다도 더 높은 신이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신플라톤주의에서 공부와 수행의 목적은 인격 수양이며, 인격 수양의 목적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그 철학에 종교적 색채를 가미시킨 입장이라 할 수 있다.

 

2) 신과 우주

 

신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이나 피조물은 그렇지 않다. 즉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점에서 플로티누스는 이 두 철학 체계를 종합하려는 종합론자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플로티누스는 선, 이데아, 실체, 물질 등과 같은 플라톤의 개념들을 신으로부터의 유출(流出, emanation)로 이해하였다. 플로티누스가 볼 때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성태(엔텔레케이아)로 가득 차 있다고 본 누스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누스는 창조자는 아니나 오류가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와 플라톤의 이데아를 모두 포괄한다. 하지만 영혼은 누스의 산물인 까닭에 오류의 영역이다. 그렇더라도 영혼은 물질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누스 안에 존재하면서 물질을 낳고 물질을 움직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영혼은 물질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는 존재이다. 즉 논리적으로 누스는 신 안에 존재하고 영혼은 누스 안에 존재하며 물질은 영혼 안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결국 논리적으로 '존재의 가장 큰 사슬'인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선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사슬의 가장 하한에 자리한 물질조차도 당연히 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로티누스가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신 그리고 인간과 우주

 

플로티누스는 우주의 이성적 원리인 로고스와 물질을 대조시킨다. 또한 그는 로고스를 빛과 동일시하였다. 반면에 물질은 어둠과 동일시된다. 어둠은 결국 존재가 없는 비존재이며, 빛의 결성태(缺性態)일 뿐이다. 악(惡)도 형상 없는 사물로, 형상을 결여한 '비존재'일 뿐이다. 즉 악은 신을 외면하는 자들을 위한 실재적 가능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다르다. 아름다움은 일상적 감각 지각이나 영상보다 뛰어난 플라톤의 이데아의 표상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은 이성과 선성이 영혼을 지배하듯이 지배의 힘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고난과 시련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자기 방향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 물질적 대상들의 세계로 하강하면서 감각 대상들과 물질을 지배하고자 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렇게 인간은 신의 영역을 포기하게 되어지만 필연적으로 신에게 환원되어 복귀해야할 존재이다. 즉 인간은 자유 의지 가운데 덕을 통해 구제와 자기실현을 하면서 신으로의 복귀를 갈망하게 마련이다.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

 

알렉산드리아의 암모니우스 사카스에게는 플로티누스 말고도 또 다른 유명한 제자가 있었다. 플로티누스와 동시대인이었던 오리겐(Origen)이었다. 플로티누스가 비기독 철학자였던 반면 오리겐은 기독 철학자, 신학자의 길을 걸어갔다. 이렇게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의 본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플로티누스파와 갈라졌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여러 종교들에 함축된 전제들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여긴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신플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곤 했다. 물론 어거스틴의 모든 것이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성육신(incarnation)’의 예수, 예수의 부활과 같은 개념은 신플라톤주의 전통에 당연히 없었다. 대신학자 어거스틴은 이 난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은 받았으나 신플라톤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통합을 시도한 주요한 인물로는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of the Areopagite)가 있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플라톤적 성향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영혼불멸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위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초자연적인 것’, 즉 신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에 있어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자기 보존과 관련되며, 다른 하나는 신과 하나가 되려는 영혼의 본질과 관련된다. 자기 보존과 관련된 육체는 소멸하나, 신과 하나가 되려는 영혼의 본질은 파괴되지 않는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이 같은 생각은 어거스틴의 영향력 아래 중세 기독교의 절대적 교리로 자리잡게 된다. 물론 영혼 불멸설은 사후 구원에 대한 필요조건이 아니며, 육체 또한 원죄설과는 무관하다. 원죄설을 바탕으로 영혼 불멸설을 사후 구원과 연관시킨 사람은 위 디오니시우스가 아닌 어거스틴이었다. 이밖에 암브로시우스, 빅토리누스와 보에티우스, 에리우게나 등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 같은 신플라톤주의적 영향은 오늘날 화이트헤드의 과정 신학이나 신정통주의의 폴 틸리히, 보편구원설 등에까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철학은 수천 년 동안 다듬어져 온 정교한 학문이다. 다만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세속 철학의 치명적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속 철학이 수천 년의 학문적 축적을 이루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적 구속 계시를 위해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플라톤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신플라톤주의가 신을 말하고 우주를 말하고 영혼의 창조를 말하고 영혼의 불멸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참고 자료는 될지언정 구속 신학의 영광을 위해서 능동적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창조와 구속이 전혀 무관한 별개 개념이 아니듯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학문이다. 신플라톤주의는 신학이 어떻게 시대적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일반 계시로서의 수용 가능한 철학은 이용하면서 구속 신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흔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조덕영 박사(조직신학, Th. D.)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김천대, 안양대, 평택대 겸임교수 역임

현 평택대 <신학과 과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