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조 신앙/창조 신앙 변증(질의 응답)

하나님이 실수와 오류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728x90

Q.) 하나님이 실수와 오류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제대로 한번 신앙생활을 해보려 결단하면서 본격적인 성경 공부에 뛰어들거나 목회에 대한 소명을 갖고 신학을 시작한 신학도들은 한번쯤 근원적인 고민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성경을 조금 신경 써 읽다보면 성경 속에서 과거에는 잘 보이지 않던 모순 돼 보이는 구절들이 하나하나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주제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겨지던 인물들의 과오가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노출되면 시험에 빠지거나 신앙적 열정이 브레이크가 걸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저명한 인물도 모든 부분에 있어 완전한 경우는 당연히 없었다. 성경의 유명 인물들조차 신앙의 성숙 유무와 관련 없이 늘 범사에 실수투성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잘 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범사에 실수와 오류에 빠져 사는 걸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사람들을 불투명하고 오류투성이에 빠져 살게 하는 것일까?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열매로 아주 경건하고 제대로 된 성숙한 생활을 해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데 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도 살면서 실수와 오류를 범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이렇게 오류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정론(神正論)의 영역일수도 있는 이 문제에 대해 기독철학자 아더 홈즈의 진술을 토대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오류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사람은 영육 간에 미숙한 존재로 출생한다. 그리고 이 미숙한 생명체는 반드시 시행착오와 오류를 거치며 성장하게 된다. 인간의 미숙함에서 오는 핵발전사고 등 대형 참사, 생각지도 못했던 과학기술이 남긴 환경오염의 역습, 실수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선수들의 훈련, 역사 속에서 인류가 남긴 다양한 오류와 미숙한 흔적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학자들이 진정한 학자가 되기까지 겪는 개념의 혼동이나 논리적 오류, 미숙함 등은 인간을 지적 부족이나 행동의 미숙함 속에서 반성하게 하고 성장시킨다. 신앙도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전혀 없다. 다양한 신앙의 환란과 인내와 연단과 소망의 체험 속에서 믿음은 자라난다. 삶이든 신앙이든 오류 없이 성숙 없다.

 

둘째,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진리는 우리들을 자유케 한다. 어떤 지식이나 주장이 우리의 신앙에 적대적이라고 괜히 두려워하거나 떨 필요가 전혀 없다. 스스로 소극적 진리 안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지적 고립을 추구하는 반 지성주의나 반 계몽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일반 은총)의 영역 가운데서 당당하게 진리를 찾아나서는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 진리 안에 자유케 된 지성이 참된 지식과 사실을 소유하는 것이다. 오류는 그저 오류일 뿐이다. 오류가 오류로 바르게 보이는 그때, 자유케 된 진리 안에서 오류는 오히려 진리(참 계시)와 원리(자연 은총)을 하나로 묶는 도구가 된다.

 

 

셋째,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그릇된 사람이나 문화는 없다.

 

사람이 자신과 관점이 다르거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참 된 것을 배울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즉 사람은 어떤 문화적 현상이나 관점에 대해 완벽한 흑백 구분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진리이며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진술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즉 그것이 온전치 않다 하더라도 진리의 편린과 부스러기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 어디서도 찾을 수 있다.

 

 

넷째, 상이(相異)한 관점은 단순한 오류 평가가 아닌 상보적 결론 도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마치 모순처럼 보이는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상호 비판이나 대립, 충돌만이 아닌 상보적 해석을 이끌어낸 사례가 그 보기이다. 칼빈주의와 웨슬리안-알미니안주의가 교리적으로 정면충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융화가 가능한 것도 이 같은 상보적 신비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상이한 관점이 상보적인 것은 아니다. 화해가 불가능하고 불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상이한 관점은 (상보성을 찾는 게 아니라) 분명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어떤 관점의 경우 분명 그 전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 오류의 부분에 대해 포괄적으로 비판 할 수 있다. 예컨대 무신론적 유물론의 전제가 왜 그릇 되었는 지를 신앙의 관점에서 비판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마지노선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