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의 제자 훈련에 대해("사랑의 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카페에 올린 원고)
지난 30년 동안 한국에서 유행한
제자 훈련이 좋은 프로그램이기는 하나 몇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1) 그 명칭에 대해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이지 성경공부나 제자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저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를 따른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직장, 물질, 기득권을 모두 버릴 때 바로 제자가 됩니다. 그 다음에 제자 훈련은 목사가 아닌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는 겁니다. 장로님도 잘 아시다시피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모두 붙들고 하는 제자 훈련은 제자 훈련이 아닙니다. 제자 훈련하는 교회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옥 목사님이 제자 훈련 사역으로 교회 부흥의 성취는 하셨으나 <제자 훈련>이라는 말은 단지 교회 부흥을 위한 <레토릭>에 불과 했다는 말이지요. <제자 훈련>의 한계를 잘 알고 제자 훈련이 전부가 아님을 강하게 어필하면서 행했더라면 사랑의 교회가 좀 더 겸손해지고 한국 교회의 좋은 모델이 되었을 겁니다. 제자 훈련이 일종의 한국교회의 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은 제자는 목사가 되어도 쉽지 않은 겁니다. 옥 목사님이든 최 목사님이든 신학교 총장이든 쉽지 않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소수 정예로 하신겁니다.
2) 나타난 우려스러운 열매들
최근 양식있는 기독교인들이 우려하는 사랑의 교회 건축 문제나 제자 양육 아주 잘 했다는(제자 훈련의 본보기 교회처럼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었지요) 목동에 있는 한 교회의 목회자와 집사, 장로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교인들이 보기에도 민망하고 심각한 갈등 등은 <제자 훈련>의 허상을 보여주는 역설적 본보기이지요. 주의 종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인 액츠의 지난 수십년 간 신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민망하고 시끄러운 잡음들도 우리 인간의 미성숙성을 보여주는 증거의 일부분이지요.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이 좋은 프로그램이었기는 했으나 제자는 그런 방식으로 되는 게 아니므로 <참 제자 훈련>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경책에 별도의 제자 훈련 교재를 부록으로 남겨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따라서 <제자 훈련>이라 하지 말고 그냥 기초교리공부나 신앙 훈련이라고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엄청난 제자가 된 것으로 착각에 빠지거나 무엇을 크게 이룬 것처럼 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그런 식으로 변화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지금 제자 훈련 감행한(?)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바로 이렇게 대단한 것 이룬 것처럼 목이 뻣뻣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제발 거룩한 제자라는 말조차 부끄러움의 대명사가 되게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은 어리석어서 단순한 기초교리공부나 신앙 훈련이라 하면 딱딱하거나 지루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므로 좀 더 남들과는 색다른 신앙 훈련을 받았다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는 면에서 제자 훈련이라 용어를 썼다면 <제자 훈련>이라는 말을 <신앙적 레토릭>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분명한 것은 이 용어 자체가 아주 심각하고 거창한 용어임에도, 세속화된 교인들에게 받아볼만한 괜찮은 프로그램 정도로 적용시킴으로서 오늘날 드디어 서서히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저 좋은 프로그램이라면 이제 이 프로그램을 <제자화>라는 말보다 유익하고 좋은 단순한 <신앙 훈련> 정도로 여기게 만들어야 할 겁니다. 제자 훈련하는 담임 목사가 되어도 제자 되기 어려운 게 <예수 제자>입니다.
제자 훈련이나 제자화란 특수 부대 입대하는 것 이상의 죽기를 각오한(제자 대부분이 비참하고 장열하게 순교하였지요) 비장한 각오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 고급 자가용 타고 맛있는 것 나누어먹고 성경 공부 가듯이 하는 게 아니란 이야기지요.
3) 누구의 제자인가
많은 선교단체나 교회가 제자 훈련 시킨다고 하면서 <예수의 제자가 아닌 목사의, 리더의, 선교단체의 제자>를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적 순종을 예수님께 적용시키기 보다 일차적으로 자신을 양육한 지도자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어려우니까 선생의 제자, 선생의 순, 스승의 가지 노릇을 하게됩니다. 그렇게 제자가 되는 모습을 볼 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게 아니라> 자기도 빨리 훈련 받아 제자를 길러내는 리더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됩니다. 일종의 영적 우월감이지요. 그러다보니 오늘날 한국교회는 <참제자>가 되기보다는 <제자를 양육하는 스승이 되고 싶은 사람>들만 넘쳐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영적우월감만 뼈대처럼 남아버린, 이게 오늘날 한국의 유명 귀족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서민들은 연예인, 상류귀족들이 넘쳐나는 이런 교회 접근하기 쉽지 않게 되지요. 아마 예수님은 커녕 예수 제자들도 지금 이런 교회를 본다면 출입 쉽지 않았을 겁니다.
4) 참된 성숙
신앙은 깊어질수록 영적 우월감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좌절감, 인간의 더러운 면이 보일 뿐입니다(은성출판사의 엄두섭 목사님 책들 참조). 깨끗한 옷 일수록 더러운 티끌이 더 잘 보이는 것과 유사합니다. 즉 <유사 제자>는 <영적 우월감>이 생기고 <참 제자>가 되어가면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과 피(십자가)>만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모든게(학벌, 물질, 세속적 힘과 성공 등) 풍부한 귀족 교회 다니는 한국 교회 교인들의 영적 우월감은 대단히 위험한 수위까지 차올랐습니다.
목사 자신부터 <제자훈련>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저 주님앞에 갈 때 까지 주님의 피로 죄를 닦으며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넘어지고 깨지면서 훈련과 성숙의 언덕을 날마다 날마다 개인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걸어 올라갈 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지요.
5) 한국 교회 대안이 필요한 시점
지름길은 없습니다. 지상에 완벽한 교회나 제자 훈련이란 없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다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딤전). 성경은 바르게 지속적으로 가르쳐져야 하고 세속적 기도가 아닌(doing mode, having mode) 참된 기도(being mode)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게 바르게 지속적으로 가르쳐도 참 성숙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제자 훈련 받았다는 목사나 신자들이 "야베스의 기도" 류를 극찬하는 것을 보고 제자 훈련이라는 게 기본적 교리 분별력을 기르는 데도 부족한 기초 교리 공부나 훈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도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꾸준히 지속적으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값싼 기독교화 되어 가는 지금의 현실은 더욱 신앙 경주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들에게 역설적 경고와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양적 사역은 많았으나 바른 사역은 적었습니다. 바르게 정맥을 배워 바둑 10판 두는 게 파고다 공원 할아버지들 일년 수천판 두는 바둑보다 실력이 훨씬 빠르게 자랍니다. 신앙에도 이 신비의 유비가 어느 정도 적용됩니다. 따라서 영적 속맥을 버리고 영적 정맥의 의미를 알고 배워야 합니다. 정맥을 아는 자들은 빠르게 바둑이 성숙해져 갑니다. 사울이 바울로 바뀐 게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으나,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의 정맥을 잘 알았기에 사울은 사도 바울로 쉽게 바뀌었습니다.
<제자 훈련> 프로그램도 좋기는 하나 이제는 그 명칭에 담긴 오해를 풀어야 하며 제자보다는 참된 신앙 성숙을 위한 길을 한국교회는 모색해야 될 때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겸손하고 꾸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 한국 옛 어르신들의 담론 문화를 활용하여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의 고전 책 강독이나 그들의 신앙, 신학, 삶의 담론를 배우는 것은 한국식 기독교 문화와 성숙을 위한 여러 좋은 본보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모색이 필요하겠지요. 한국교회의 상황을 걱정하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으니 성령의 도우심과 사랑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안에서 조 목사 올림
<이 원고는 정 모 장로님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위에 소개된 카페에 일부 수정하여 올린 원고입니다>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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