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의 다리를 놓은 철학자들(헤겔, 포이어바흐 그리고 마르크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철학적 무신론에서 과학적 무신론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과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가 징검다리를 놓았다.
헤겔의 철학은 모순과 대립이 보다 높은 단계에서 종합된다는 변증법적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를 적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철학에서 역사의 주체는 절대정신 또는 세계정신이었다. 헤겔은 1807년에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그 운명』과 『정신현상학』을 잇따라 발표하여 독일 관념론 철학의 꽃을 피웠다.
앞의 책은 그의 신학을 정리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임을 갈파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일치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영혼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고 싶은 육체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 할지라도 인간세계에서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뒤의 책은 인간정신이 낮은 도덕적 단계에서 절대적 진리의 장(場)인 그리스도교적 세계정신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단순한 감각적 의식에서 주체적 자기의식으로 변화하는 반성과 고립된 자기이성이 이질적인 공동체의 정신과 갈등을 극복하는 변증법적 과정이 진술되어 있다. 헤겔이 발전시킨 변증법은 관념론 철학의 최종적인 방법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대해서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그가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 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1943)에서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을 배척했지만, 그의 변증법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헤겔이 “인식의 전체 역사를 총괄하는 철학적 과학으로서의 변증법을 완성하고 사고의 변증법적 방법의 근본원리를 발견”했다고 칭송하고 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보는 헤겔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물사관을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다윈의 진화론에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파 기독교 신자였던 헤겔이 변증법적 관념론 철학을 완성하고 죽은 뒤에 ‘헤겔 좌파’(또는 ‘청년 헤겔학파’)가 등장했다. 이 가운데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신학과 철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공부했다.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던 그는 1830년에 『죽음과 불멸에 관한 고찰』을 익명으로 발표하여 기독교 교리를 반대하였다. 그는 개인적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는 대신 인류의 보편적 이성과 유의식(類意識)의 불멸을 주장했다. 그가 이 책의 저자임이 밝혀지자 그는 교단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은둔생활로 들어가서 저술활동에 몰두했는데, 주저인 『그리스도교의 본질』(1841)에서 “종교는 최초의 자기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 에 신을 숭배하는 모든 종교를 부정하고 공격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특히 기독교 신학과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더욱 놀랍게도 그는 신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의 관점으로 전향하고 있었다. 그는 헤겔이 기독교적 신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을 단순히 ‘자연물’에 불과한 존재로 보았다. 말하자면 인간의 의식에 투사된 것이 신이며, 따라서 인간의 신 개념은 사람의 의식에 비치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영혼은 개별적으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 법칙에 따라 의
식의 바다와 같은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와 같은 조건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신은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신에게도 인간의 종교적 제의와 교리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신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신이 필요 없고 신에게도 인간의 종교적 섬김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소위 인본주의적 무신론자(humanistic atheist)였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무신론적 유물론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극구 부인했다. 그러므로 포이어바흐는 무신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유신론 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포이어바흐는 철학적 무신론을 마감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포이어바흐는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그의 사상적 영향 하에 19세기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견해가 형성되었으며, 그는 철학 부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직접적인 선행자의 한 사람이었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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