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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위르겐 몰트만의 생애와 신학(ft. 현대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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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의 생애와 삼위일체론

1. 몰트만의 생애

1)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은 로마 가톨릭이 아닌 복음주의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한자 동맹 중심 도시인 독일 북부 함부르크 태생의 개신교 신학자다.

함부르크의 복음주의 교회들 첨탑이 선명하다

2)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에 입대했으나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3) 괴팅겐 대학에서 수학하고 오토 베버(1902, 바르트 영향, 칼빈 <강요> 獨譯)의 지도 아래 1952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일 년 후인 1953년 목사 안수

4) 1954년부터 시골 교회에서 약 5년 동안 목회를 경험하고 브레멘의 교회 대학(Kirchliche Hochschule)에서는 교목 생활을 경험

5) 이후 본(Bonn) 대학교를 거쳐 1967년 튀빙겐 대학의 조직신학교수가 되어 1994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일반적인 신학자들이 장수하는 것처럼 그도 장수하면서 튀빙겐 대학의 명예 교수로 있다.

6) 1975년 한국을 방문하여 정치 신학을 강연한 이래 꾸준하게 한국의 신학교와 교회들을 방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오토 베버, 칼 바르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에른스트 블로흐(유대인, 동독 마르크스 철학교수, 1961년 서독 이민 튀빙겐대 철학교수, Das Prinzip Hoffnung) 등의 영향 아래 희망의 신학(1964), 종말론, 정치신학, 그리스도론Der gekreuzigte Gott(1972), 성령론(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1975), 창조론, 기독교와 과학(과학과지혜,Wissenschaft und Weisheit) 등에 관한 저서를 남기고 있다.

몰트만 저, 1974년

8) 국내에서의 몰트만

(1) “희망의 신학자”라서 그럴까? 몰트만처럼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좋아하고 신뢰하는 신학자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 심지어 오순절 계통 교회로부터도 초청 받고 환영받는 보기 드믄 신학자다.

(2) 그의 신학이 한국인의 정서와 보이지 않는 일정한 소통의 끈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그렇다면 몰트만은 어떤 창조 신앙을 가진 신학자일까?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몰트만의 창조 신앙은 전통적인 성경적 구속 신앙과 연결되는 그러한 성경적 창조 신앙일까? 한국 기독교인들의 폭넓은 호응과 지지를 받는 그의 창조 신앙은 정말 한국의 보수와 진보와 오순절 계통을 포괄하는 성경적 틀 속에 있을까? 이런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몰트만 저, Translated by M. Kohl, SCM Press, 2003

2. 몰트만의 <희망>(Hoffnung)과 미래(Zukunft)

1) 1961 <Theologie der Hoffnung>

2) 블로흐 <희망의 원리> 영향

3) 몰트만의 희망은 미래(종말론)과 연결

4) 희망:

그리스도 부활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래로부터 마지막 부활을 바라보라. 이것이 바로 희망!

5) 창조주 하나님과 시간과 미래:

정통 신학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 창조주 개념, 반면 몰트만의 시간론은 미래를 본질로 소유하시는 하나님-> 즉 시간 속에 하나님을 예속(잘못하면 만유재신론)-> 신학 방법도 과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미래로부터 시작하는 것-> 미래는 감추어진 상태요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자유-> 현재나 과거가 아닌 미래 중시 -> 미래로 열려진 인간!

3. 몰트만의 삼위일체론과 창조론, 성령론

​1) 아버지와 우주적 그리스도와 성령(삼위일체 속 성령) :

(1)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를 위한 죄 된 인간과 “노예화된 피조물”을 위한 구원의 근거라면, 그는 모든 창조와 인간과 자연의 실존을 위한 근거이기도 하다.

(2) 성령은 아들(Christ)에 의해 보냄을 받았지만 아버지(God)로부터 나오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활동하게 비추어 준다.

(3) 여기서 몰트만은 'filioque'를 버리고 '성자의 아버지로부터'(from the Father of the Son) 나오시는 성령을 창안한다.

(4) 이 성령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5) 몰트만은 이 같은 우주적 삼위일체론을 확장하여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대화의 시도를 통해 에큐메니칼적인 삼위일체론으로 나아가면서 '사회적 삼위일체론'(the social Trinity)을 주창한다.

(6) 몰트만은 자신의 이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 위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내주, 상호침투) 개념을 활용한다.

(7) 문제는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개념이 판넨베르크처럼 몰트만도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과 사역과 원리가 작동하게 유도한다는 점에서 성령론이 기독교 만유재신론의 길로 들어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2) ‘창조주로서의 영’ :

(1)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구원의 종말론적 경험은 영의 부음과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능력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

(2) 성령의 은사는 영광의 “보증”이다(고후 12: 2, 5,6: 엡 1,14).

(3) 성령의 능력은 새 창조의 능력이다.

(4) 성령은 창조에 있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게 활동하신다.

3) 성령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관계

(1) 성령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영원히 반영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반영한다.

(2) 성령이 하나님에 의해 숨으로 내 쉼을 받으면, 성령은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실존과 하나님의 상호 관계를 전제하게 된다.

(3)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신적인 실존(divine existence)”을 소유하며 그리스도로부터는 “관계적 형태(Relational form)”를 갖는다.

4) 창조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 방식

(1)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성령의 첫 경험은 ‘창조자의 능력의 경험’이다. 신앙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며(요 3:5),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7).

(2) 성령의 둘째 경험은 같은 근원에 속한 것인데 그것은 달리는 극복될 수 없는 사회적, 종교적,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루어지는 ‘사귐의 경험이다.

(3) 자기의 소명과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의 ‘개인화에 대한 경험’은 이 사귐의 경험과 동일한 근원에 속한 것이다. 각자에게 다른 성령의 은사가 내린다.

(4) 성령은 세상을 통해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며 뿐만 아니라 성령은 하나님과 세상과의 결합을 성취 시킨다.

(5) 끝으로 성령의 임재에 대한 이 경험 속에서 희망이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선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새로운 창조의 미래’, 영광을 향한 우주의 거듭납, 모든 분리된 피조물들의 축복받은 창조의 사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고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창조의 직접적인 하느님과의 사귐이 선취되기 때문이다.

5) 자연 속에 있는 우주적 영(성령)의 활동 방식

(1) 영은 물질과 살아 있는 것의 모든 영역 속에 있는 ‘창조성의 원리’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며 물질적이며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새로운 기획들을 그들 속에 선취한다(=앞당겨 온다). 이러한 점에서 영은 진화의 원리이다.

(2) 영은 ‘전체론적 원리’이다. 진화의 모든 단계에서 그것은 상호작용과 이 상호작용들 속에서의 일치와 상호간의 침투와 동지적이고 연대적인 삶을 창조한다. 하느님은 영은 창조의 “공동체영”이다.

(3) 영은 상이한 차원에 속한 특별한 물질의 기획들과 삶의 기획들의 ‘개체화’와 분화의 ‘원리’인데 이것은 위의 원리와 동일한 근원에 속한 것이다.

(4) 끝으로 모든 창조는 목적에 있어서 개방된 피조물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공통된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성의 원리’는 모든 개방된 물질의 체계들과 삶의 체계들 속에 내재하고 있다.

​6) 몰트만이 본 창조자 하느님과 종말론 속 성령

(1) 몰트만의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나오기 이전 1967년 그가 쓴 <희망의 신학(The Theology of hope)>과 1969년 저술한 <종교와 혁명과 미래(Religion, Revolution and the future)>에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살펴봄으로서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서 다루고자한 자연의 신학에 배경이 되는 창조자 하느님을 어떤 의미로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살펴볼 수 있다고 본다.

(2) 첫째,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은 미래로 나아가는 하나님으로서 시간의 일부이지 완전한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는다. 즉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미래를 그의 본질로 가지는” 하나님일 뿐이다. 따라서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사실 이곳 창조자 하느님에서 다루고자 했던 하느님 자신보다는 그가 미래에 어떤 분이 되실 것인지에 관심이 많은 것같다.

다시 말하면 그가 과거와 현재에 누구이신가 하는 것은 몰트만의 관심 밖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의 하나님은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약속하시는 신실의 하나님이요 자신이 미래에 의하여 결정될 뿐이다.

(3) 둘째로 창조와 관련된 종말의 사상에 있어서도 몰트만의 관심은 전통적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대망이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의 개념은 사실 이미 창조의 때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이 이미 예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이미 우리와 다른 창조자 하느님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이란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초자연적인 분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단지 미래에 대해 열려진 것이요 미래의 자유처럼 느껴진다. 그런 하느님이라면 이미 그가 다루는 창조자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의 영역을 벗어난 분으로서의 하느님을 그는 다루고 있다는 의심이 간다.

​(4) 셋째, 복음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론의 전제로 믿는데 반하여 이제 미래의 소망으로 단순히 앉아 계신 하느님이기에 그에게 있어 갈보리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갈보리를 통한 새예루살렘을 바라보지 말라고 말한다. 오히려 미래를 통해 갈보리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전통적으로는 예수의 부활이 마지막 부활의 근거이다. 하지만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거꾸로 마지막 부활이 예수 부활의 근거가 된다<J. Moltman, Religion,Revolution and Future(N.Y:Charles Scribner's Sons, 1969), 52.>. 그렇다면 여기서도 창조자 하느님은 그 특별한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버린다.

*나가면서

1) 결론적으로 몰트만의 하나님은 얼핏 보면 우리가 믿는 정통적인 하나님과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몰트만이 자신이 서술한 창조자 하느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보여 진다. 몰트만에게 있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 주신 일정한 형식이나 구조가 없다.

2)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 몰트만에 따르면 미래는 자유를 말하며 자유는 상대성을 의미한다(Religion, Revolution and Future, p.138.). 몰트만의 말대로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용될 권위주의적인 형식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그런 하나님은 몰트만이 비판하는 기계론자들의 하나님과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3) 더욱이 몰트만의 종말론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창조자 하느님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한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그가 그리는 희망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4) 몰트만이 바라보는 성령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성령보다는 행동을 요구하는 성령으로 느껴진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지향의 의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몰트만의 행동 강조가 해방 신학으로 이어짐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여 진다.

그렇기 때문에 몰트만에게 있어 미래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현시가 아니고 지상에 건설될 이상향이다. 사도 바울과 달리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는 정치와 혁명으로 나타날 평강일 수 있는 이유다.

5) 몰트만의 관심이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에서 이탈되어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가 다루는 창조자 하느님은 눈뜬장님처럼 스쳐가는 하나님이거나, 최소한 몰트만 스스로 하나님을 그저 무신경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여 진다.

6) 몰트만이 말하듯 단지 미래에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이미 그가 말하는 창조자 하느님은 그가 아무리 현학적 언어를 동원해서 창조자 하느님을 노래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7) 따라서 몰트만은 과거에 주어진 역사적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인상(smith의 책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를 인용하여 목창균 교수가 『현대신학 논쟁』(두란노서원,1995)에서 희망의 신학 결론(329쪽)에 서술)을 늘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8) 그렇다면 삼위일체론 속 성령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몰트만이 현대신학 성령론의 중요한 신학자인 것은 맞으나 순복음 교단의 성령론과 코드가 맞는 신학자라고 보기에는 여러 난제가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중심에 있는 순복음교회가 몰트만을 성령론의 권위자라며 초청했던 것은 일종의 난센스일 수도 있다고 평가된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