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만물에는 창조의 질서가 나타난다. 눈의 결정체나 아직도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DNA나 단백질 등은 그 한 예이다. 가장 완벽한 질서는 창조 당시(창1:31)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이 질서는 일부 붕괴하였다. 노아 홍수 이후 종말을 향해 가면서 그 붕괴는 가속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수학의 질서만큼은 창조 이래로 변동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수학적 질서도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 성경이 나타내는 숫자 마다 일정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적 수(神的 數, Theomatic numbers)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반 페닌(Ivan Panin, 1885-1942)은 일찍이 성경과 숫자적 질서에 관심을 기울였다.
최근 컴퓨터 전문가인 젠킨스(Vernon Genkins)는 이들 연구를 확장하여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게마트리아(Gematria)에 의한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제공한다.
그림 1 . 히브리 알파벳과 숫자 값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와 헬라 문자는 각 문자마다 고유의 숫자 값(numerical value)을 가진다. 이들 히브리 문자 22개에 있는 수적인 값은 기원전 200년 경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구체적인 숫자 값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 히브리어 알파벳은 처음 글자 알렙(א, Aleph)과 끝 글자인 타우(ת, Tau)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의 구성은 그림 1과 같다. 창세기 1장 1절은 8개 단어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그림2).
그림 2. 히브리 성경 본문에 나타난 창세기 1장 1절의 숫자 값
여기서 4번째 단어는 영어에는 없으나 히브리어에는 꼭 필요(목적격 전치사)한 단어이다. 8번째 단어는 7번째 단어와 중복된다. 젠킨스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놀라운 수적 질서에 대해 논증한다. 젠킨스는 히브리 원문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총 7 개 단어의 마지막 알파벳이 28번째 인 것에 주목한다.
28은 7번째 삼각수(三角數, triangular number=1+2+3+4+5+6+7=28)에 해당한다. 또한 삼각형의 변의 합은 18(=6+6+6)이 된다. 이 6은 3번째 삼각수이면서 첫 번째 완전수(完全數, perfect number:자신을 제외한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수의 합이 자신이 되는 수)이다. 완전수는 숫자 1에서 3만 사이에 겨우 4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각형 28은 반대로 두 개를 겹쳐놓으면 다윗의 별이 된다. 육선형(六線型)을 이루는 수 37(hexagram number)은 중복 부분을 이루는 육각형을 이루는 수(hexagon number) 19를 이루는 첫 번째 삼각수로 이 육선형수와 육각형수는 수에 있어서 중요한 한 쌍이다(그림 7). 3과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신적 수이다.
그런데 이 창 1:1절의 숫자 값 안에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라고 볼 수 있는 더욱 놀라운 숫자적 질서가 존재한다. 7단어 문자 값의 합은 2701이다(그림 4).
여기서 4번째 단어는 영어에는 없으나 히브리어에는 꼭 필요(목적격 전치사)한 단어이다. 8번째 단어는 7번째 단어와 중복된다. 젠킨스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놀라운 수적 질서에 대해 논증한다. 젠킨스는 히브리 원문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총 7 개 단어의 마지막 알파벳이 28번째 인 것에 주목한다.
그림 3 . 창세기 1장 1절의 문자열(列)과 문자의 갯수
28은 7번째 삼각수(三角數, triangular number=1+2+3+4+5+6+7=28)에 해당한다. 또한 삼각형의 변의 합은 18(=6+6+6)이 된다. 이 6은 3번째 삼각수이면서 첫 번째 완전수(完全數, perfect number:자신을 제외한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수의 합이 자신이 되는 수)이다. 완전수는 숫자 1에서 3만 사이에 겨우 4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각형 28은 반대로 두 개를 겹쳐놓으면 다윗의 별이 된다. 육선형(六線型)을 이루는 수 37(hexagram number)은 중복 부분을 이루는 육각형을 이루는 수(hexagon number) 19를 이루는 첫 번째 삼각수로 이 육선형수와 육각형수는 수에 있어서 중요한 한 쌍이다(그림 7). 3과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신적 수이다.
그런데 이 창 1:1절의 숫자 값 안에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라고 볼 수 있는 더욱 놀라운 숫자적 질서가 존재한다. 7단어 문자 값의 합은 2701이다(그림 4).
그림 4 . 창세기 1장 1절 숫자 값의 총계
이 2701은 73번째 삼각수(즉 1+2+----+73)이다. 이 삼각형의 삼각변의 합은 216=6*6*6=정육면체 수인데(그림 5) 이 수는 부피값과 표면적이 동일한 유일한 수이다(그림 6). 혹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창조에 대한 웅변적 계시는 아닐까? 즉 삼위일체의 흔적을 수학의 질서에 대비시킬 수 있게 된다.
1에서 1천만까지 사이에 4471개의 삼각수가 있으나 정육면체는 오직 7개 뿐이다. 216은 37번째 육각수 변의 합으로 나타난다. 히브리 알파벳은 십진수의 문자 값을 갖는데 2701의 십진수의 질서를 보면 2701=37*73=(3☓10+7*10☓7+3)으로 구성되어 성경적으로 신적 의미를 지니는 3과 7이라는 숫자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 37과 73은 정수로 나누어지지 않는 소수(素數, prime number)이다. 마치 삼위일체는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듯이 보인다. 성경적으로도 37은 여러 경우 하나님의 수로 나타난다.
그림 5 . 216(6×6×6)은 부피값과 표면적이 같은 유일한 수이다.
그림 6 . 37번째 삼각수(703)와 73번째 삼각수(2701)
그림 7 . hexagram number 73과 hexagon number 37.
젠킨스는 창세기 1장 1절과 음악 사이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히며 음악도 창조의 흔적임을 논증한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음악을 하나님 찬양의 도구로 표현한다. 즉 신적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의 게마트리아(Gematria)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과 함께 질문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8 . 6번째 낱말의 숫자 값과 7번째 숫자 값의 총계(703=19×37)
첫째, 숫자적 질서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교통에 의한 완벽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흔적을 계시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피조된 인간이 가진 제한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신의 존재를 피조 세계를 통해 인식케 하려는 창조주 자신의 의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유한의 도구로 무한(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 삼위일체)하신 하나님의 신비한 본질을 정말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다. 오히려 자연과학적 도구들은 창조주는 증거하나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도구로는 어떤 한계와 딜레마를 줄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이 "사랑"(요1 4:8) 안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보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성경과 수학적 질서 사이에 나타난 완전한 유비(類比, analogy)적 관계는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스스로 완전한 존재임을 계시한다.
그럼 혹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완벽을 요구하시는가. 그렇다 성경은 인간에게도 완벽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물리적 질서는 그 질서를 창조한 하나님의 몫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완전은 하나님처럼 물리적 질서의 완벽이 아니라 물리적 질서의 흔적을 통해 확인된 그 창조주를 향한 다른 완벽을 요구한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완전하다는 암시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셋째, 완전한 창조주라면 불완전한 인간에게 물리적 완벽이 아닌 다른 방식의 완전을 요구할 수 있다.
즉 완전의 흔적을 다른 측면에서 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벽은 세상의 지식, 지혜, 능력이 없이도 가능한 일로 표현된다. 그는 온유하며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어도 찾을 수 있고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완전이다.
성경은 부자의 큰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lepton)이나, 마리아의 헌신, 아브라함의 믿음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기도 등을 완벽한 것으로 본다. 그림(4,6,8)처럼 지극히 작은 한점의 출발이 틀리면 모든 결과는 오답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는데 비해 창조주는 시작의 동기와 과정에 관심을 가지신 분은 아니신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위와 같은 최근의 연구 결과들이 자연 계시와 그에 따른 삼위일체 흔적의 증거에 대한 완벽한 논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과학적 연구는 여전히 유동적이고 제한적이다. 과학적 결과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문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 피조물 안에는 이런 특정한 질서가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인가? 이것이 성경의 구조 안에서까지 확인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일련의 결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혹시 단순히 인간의 인위적 조작이거나 우연의 결과에 불과한가? 이것들이 삼위일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아도 좋은가? 왜 성경의 숫자 값 안에는 이런 수학과 기하학적 질서가 있는가? 혹시 성경 뿐 아니라 모든 피조된 구조 안에는 그런 질서가 남아있는가?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이런 질서가 들어있을 것인가? 참으로 고민을 더하게 된다. 그 해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만큼은 찾아내게 되었다. 자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지 말아야 하고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는 바르트의 주장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분명 찾으려는 노력조차 포기하면 안될 만큼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경이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시 19:1-5).
예수님은 성찬 제정과 비유를 통해 자신의 진리를 전하려 시도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한이라기보다 인간의 한계성을 반영한다. 즉 제한성 가운데서 인간에게 진리의 편린이라도 전하고 설득하려는 창조주의 의지를 반영한다. 인간에게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란 제한적이라는 전제 아래 흔적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본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셨음을 기억하고 삼위일체 흔적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주의의 기본 성격은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과 자연 계시 아래에서 과학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적용하는 일에 주목한다. 비록 흔적의 연구가 제한적임을 인정하더라도 복음주의는 그 흔적 자체를 못 본 척 외면할 수는 없다. 과학이든 신학이든 우리 인간이 제한적이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는가. 어떤 해석이든 완전한가? 여전히 불완전하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의 하나님을 자연 계시 아래서 찾는 작업은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작업이다. 그러나 불완전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해석과 인간의 적용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에는 흔적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으로도 완전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완전할 뿐이다.
음악이 그 작곡가의 전부를 말하지 않고 조각가의 작품이 그 조각가 전부를 말하지는 않으나 어떤 한 측면을 반영하듯이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하면 흔적들을 찾는 작업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것을 부여하여 무거운 관심으로 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완전 배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제한적이나마 하나님의 많은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어린 자식에게 부모는 부모에 대한 많은 학문적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한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여전히 부모의 측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해야 될 자식의 입장에서는 필요하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엄연한 현실 아래에서 자연 계시의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으면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전면 부정론과 비관론을 넘어 오히려 논쟁은 더 심화 되는 듯하다. 클락 피녹(Clark H. Pinnock)은 일반 계시를 구원적 가치에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일반 계시에 구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카톨릭 신학의 공식 입장이다. 대표적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신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포기하고 자연 종교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개혁 신학의 특징 가운데 일반 계시의 명료성을 말하나, 타락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반 계시로는 누구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참된 창조주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우리 인간은 늘 제한을 가진 도구로 하나님을 다룰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불완전이라기보다 분명 인간의 죄성과 그에 따른 교제의 상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부분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특수 계시가 적용되는 공간은 여전히 일반 계시의 영역이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피조 된 우주 안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인간의 정신 활동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제한적이라고 무조건 배타적으로 보고 접근조차 막는 것은 신앙과 학문적 진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세상을 복음의 눈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비판하고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인류가 지닌 한계를 짚어내는 것만 가지고도 큰 성과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자연 계시를 바탕으로 한 삼위일체에 대한 현대적 검토는 조그만 의미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특별 계시는 성경으로 완성 되었더라도 자연 계시는 어떤 면에서 점진성을 띠므로 결코 탐색 자체를 게을리 할 수 없다. 그 자연적 계시의 점진성과 탐색에 대한 정진을 멈출 수 없다는 확신은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룰 종교 개혁 시대를 살았던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이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창조 신앙 > 창조와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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