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조 신앙/창조와 신학

“신다윈주의와 유신진화론 비판”에 대한 논평(허정윤 박사)

728x90
 
“신다윈주의와 유신진화론 비판”에 대한 논평

 

 

허정윤 박사(알파 창조론과 오메가 창조론 연구소 대표)

 

I. 들어가는 글

 

이 글은 한윤봉(전북대학교 화학공학부 석좌교수, 전 한국창조과학회 회장)이 쓴 위 제목의 글을 읽고 논평한 것이다. 유신진화론에 대해 그는 “하나님의 속성과 전혀 맞지 않으며, 결코 성경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는 유신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첨단 과학시대의 도전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지성적이고 시대적인 흐름에 잘 부응할 수 있는 복음 전도자”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위 제목의 글을 통해 “다윈주의 진화론과 유신진화론의 과학적 문제점을 찾아 비판하고, 다음 세대의 신앙회복을 위한 교육방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여기서 한윤봉은 다윈주의와 유신진화론을 구별하여 다른 주제처럼 말한다. 그러나 두 개의 말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비판의 대상으로 보면, 내용상 같은 주제이다. 다윈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유신진화론은 다윈의 친구인 미국 식물하자 아사 그레이(Asa Gray, 1810-1888)에 의해 그때까지의 전통적 창조론을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창조론으로 며기독교에서 그것을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이외에도 용어의 개념을 혼동하는 오류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Ⅱ. 풀어가는 글

 

1. 신다윈주의란 무엇인가?

 

다윈이 그의 진화론에서 생물의 기원에 대해 언급한 것은 『종의 기원』(1859) 마지막 페이지에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이를 창세기와 비교해보면, 다윈은 하나님의 종류별 창조를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자에게는 이 구절이 믿음의 핵심이 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인용해보기로 한다.

 

생명이 그것의 여러 가지 능력과 함께 창조자에 의해 최초에 몇 개 또는 하나의 형태에게 불어 넣어졌다는(originally breathed by the Creator into a few forms or into one), 그리고 이 지구가 불변의 중력법칙에 따라 계속 회전하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놀라운 무한한 형태(endless forms)가 발생되었고, 또 진화되고 있다는 견해에는 장엄함이 있는 것이다.

 

다윈주의는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수도사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한 유전학자들에 의해 자연선택설과 유전법칙이 서로 결합하면서 신다윈주의로 발전했다. 한편 러시아의 식물학자 알렉산더 오파린 (Aleksandr Ivanovich Oparine, 1894-1980)이 화학진화에 의해 생명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생명의 기원』이 발간된 것도 20세기인 1936년이다. 그때까지 창조론의 경쟁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무신론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발생설이었다. 그렇다면 한윤봉의 “19세기부터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핵심 이론으로 자리를 차지했”다는 주장은 어떤 진화론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시기적으로 보면 다윈을 가리키지만, 그의 진화론은 책의 제목처럼 자연선택설에 의하 ‘종의 기원’을 주제로 다룬 것이다. ‘진화론에서 생명의 기원’을 처음 다룬 것은 오파린이지만, 그는 20세기 중반기에 활동했다.

 

여기서 한윤봉은 한 가지를 더 오해하고 있다. “자연선택과 변이의 축적에 의한 신다윈주의가 현대진화론”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진화론자들은 신다윈주의와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에서 주장한 화학진화설을 결합한 형태의 진화론을 주장한다. 오파린이 화학진화에서 샐겨난 최초의 생명체는 다윈의 진화론 방식으로 진화했(한)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현대에는 신다윈주의적 유신.진화론과 무신론적 현대진화론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올바르다.

 

2. 신다윈주의에 대한 과학적 비평

 

한윤봉은 신다윈주의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3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비평한다. 그러나 몇 가지 오해를 하고 현대 진화론을 끌어들인 점이 눈에 띈다.

 

(1) 기본 가정: 우연에 의한 자연발생

 

한윤봉이 이 항목에서 논의하는 것은 주제인 신다윈주의 범주를 넘어서 무신론적 현대진화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평자는 시간적 제약으로 주제에서 벗어난 것까지 논평하지는 않겠다(각자 읽어보는 것은 현대 진화론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2) 공통조상(LUCA)으로부터 진화

 

① 화학진화설: 무신론적 현대진화론자들이 가정한 LUCA를 공통조상으로 하는 논의도 역시 무신진화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다만 다윈이 주장하는 창조자에 의해 최초에 만들어진 생명체가 하나라고 가정하는 경우에는 두 상황이 같을 수도 있다. 그런 전제하에 읽어보는 것은 진화론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② 공통조상설: 진화론에서 공통조상이라는 말은 최초의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는 각 생물 종의 조상에게도 쓰는 말이다. 창조론적 관점으로는 각 생물의 종류별 조상에 비유해 볼 수 있다.

 

(3) 진화 메커니즘: 자연선택과 변이의 축적

 

① 자연선택으로 진화가 일어날까?

 

이 항목은 다윈주의 진화론의 핵심 주제를 비판하는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창조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은 각 생물에게 거주처를 제공하고, 거주자인 생물은 자연의 환경적 조건을 이용한다. 그러나 자연은 거주자의 진화를 돕거나 선택하지 않는다.

 

② ‘변이의 축적’으로 진화가 일어날까?

 

다윈은 진화의 동력이 돌연변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윈주의 진화론에서 ‘변이의 축적’은 돌연변이가 아닌 작은 변이의 점진적 축적을 의미한다. 이런 작은 변이는 이른 바 DNA 변이에 의한 종의 범위 내에서 소진화를 발현한다. 이 항목의 내용은 신다윈주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창조론자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생물학적 지식을 잘 정리했다.

 

3. 유신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비평

 

한윤봉이 유신진화론과 타협이론을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관점은 창조과학회 진영의 큰 오해라는 사실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자들은 그들의 성경 해석만이 무오한 것이고, 그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해석은 모조리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비난하기 때문이다. 유신진화론은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다윈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고, 한편으로는 무신적 진화론까지 등장했다. 현대에는 과학이 엄청나게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지식 수준도 개인별로 천차만별이 되고 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관점도 그와 같이 되고 있다. 저명한 과학자인 한윤봉 자신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자들이 자기네 성경 해석 한 가지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람을 로봇으로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세기의 가장 큰 가르침은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이며, 그 밖에는 관점에 따라 약간씩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성경 해석만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다른 교파로 나가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 교파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창조과학자들이 새로운 교파를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또는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해석을 강요하지 말아 주기를 권고드린다.

 

(1) YOM은 몇 시간일까?

 

성경적‧신앙적 관점: 기독교인들 특히 장로교인들의 창세기 Yom에 대한 해석이 성경적‧신앙적 관점에서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은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연구해서 발표한 것을 준용하면 된다. PCA는 2000년 총회에서 창조론 연구위원회의 연구보고서에 명시된 4가지 가능한 해석적 관점을 인준했다. OPC는 이보다 늦게 별도로 연구를 진행하여 2004년 총회에서 5가지 가능한 해석적 관점을 발표했다.

 

PCA가 검토한 4가지 관점은 ⓵ 역일 해석(The calendar-day interpretation), ② 날-시대 해석(The day-age interpretation), ③ 틀 해석(The framework interpretation), ④ 유비적 날들 해석(The analogical days interpretation)이다. OPC가 제시한 5가지 관점은 PCA의 4가지에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들’(the days of unspecified length) 관점이 추가되어 있다. OPC는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창조의 일을 하셨음을 인정하고, YOM에 대해서는 ‘한 가지 해석이 다른 해석들을 모두 배제하고 주장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와 창조과학자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 나라에서 창조과학회가 계속 창조주간 6일의 하루(YOM)는 24시간 해석만이 성경적‧신앙적 관점에 합당하며 이와 다른 해석은 ‘타협 이론’ 또는 유신진화론이라고 비난한다면, 그들은 창조과학회 교단을 따로 만들려는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받지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관점: 한윤봉의 글을 보면, 그는 자기가 지지하는 한 가지 주장만을 강조하고, 그 배경 또는 반대가 되는 논리들은 잘 살펴보지도 않고 폐기 처분하려는 논조를 전개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여기서도 그는 ‘하루’에 대한 과학적 정의는 지구가 자전에 걸리는 24시간을 기준으로 정한 것이고,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을 ‘하루’의 기준으로 삼으면 “과학과 관계 없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만물의 현상을 관측해서 발견한 사실을 연구해서 원인과 결과까지 이론화하는 작업이 아닌가? 인류는 과학을 시작하기 전에도,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태양이 뜨고 지는 현상을 기준으로 하루를 정해서 사용했다. 과학은 그것의 원인을 자전이라고 밝혀냈을 뿐이다. 24시간 ‘하루’는 영국의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 자오시의 기준으로 삼아 세계 시간을 제정한 것이다.

 

창 1:5절이 지구의 자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저자의 해석은 자전의 원인인 태양과 달과 별들의 인력이 작용하기 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기하는 억지 주장이 아닌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빛을 “낮”(히브리어 성경 ‘יֹום’, “YOM = 창조과학의 문자주의 해석과 동일한 ‘하루’”)이라 부르셨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밤’으로 부르신 ‘흑암’(히브리어 성경 ‘וְלַחֹשֶׁךְ’(베라 호셰크), ‘그리고 그 흑암’)을 ‘어둠’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창세기 1:2에서 땅과 물이 흑암에 덮혀 있었다는 사실에서 보면, 흑암은 태초부터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모세의 설명이라는 사실을 해석에 참고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되니”라는 동사는 미완료 시제 ‘וַיְהִ’(예히)이다. 히브리어에서 미완료시제는 동사의 동작이 계속됨을 함의한다.

 

그리고 끝에 ‘첫째 날이니라’는 말은 오역이며, 그냥 ‘한 날’(one day)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첫째’로 번역된 ‘אֶחָד’(에하드)는 순서를 말하는 서수가 아니라 개수(個數)를 나타내는 기수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첫째, 처음, 최초 등’을 나타내는 서수는 “태초에”로 번역된 ‘בְּרֵאשִׁית’(뻬레쉬트)에 전치사 + 서수 명사 형태로 나타나 있다. 정리하면 창조의 첫째 날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인들의 통상적 하루는 해지는 시각을 기준으로 시작하고, 밤과 낮을 지나서 해가 지는 시각에 다음 날이 시작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낮을 ‘하루’라고 부르셨지만, 모세는 밤과 낮을 합쳐서 ‘하루’라고 말한다. 창세기에서 태양은 창조의 넷째 날에 등장했다. 그렇다면 문자적으로도 첫째 날의 밤(흑암)이 24시간 하루의 절반의 시간이었다는 이해에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윤봉은 창조과학자들을 대표하여 창조의 첫날부터 24시간 ‘하루’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PCA와 OPC가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몇 년씩 YOM을 연구한 결과 4개 또는 5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보고서의 결론을 쓸데없이 내렸다는 것인가?

 

(2) 하나님의 시간으로 창조했을까?

 

한윤봉은 “시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과학자는 없”다는 무신론 과학자 김상욱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은 분명 ‘사람의 시간’과 다를 것”이라고 말하고, 벧후 3:8과 시편 90:4절을 끌어와서 하나님의 시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틀리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자들처럼 문자적으로 24시간 하루를 천 년 이상 긴 시간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비유는 비유하는 자의 관점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유 구절들의 저자인 베드로와 모세는 하루를 24시간 또는 천 년의 시간으로만 생각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계시하지 아니한 것들은 사람과 비교해서 유비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인용한 비유 구절들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지만, 두 가지의 시간이 어떤 특정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주간의 YOM에 땅의 시간을 사용하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사역하신 낮을 YOM이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낮과 밤을 합쳐 YOM이라고 다르게 설명했다.

 

한윤봉은 여기서 창조 주간의 YOM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해석하면, ‘4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첫째와 둘째의 문제점은 앞의 논의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고, 넷째로 제기한 문제점은 문제도 아닌 상식적 내용이다. 남은 셋째 문제는 하나님의 하루를 24시간으로 해석하면, 안식일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주장이다. ‘창조주간 하루는 24시간’이라는 창조과학자들의 확고한 신조를 여기에서 스스로 무너뜨리는 저자의 주장이 어떻게 나오는지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24시간 ‘하루’ 해석을 고집하는 저자와 창조과학 진영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도 창조주간에는 24시간 하루를 지키셨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낮에만 창조 사역을 하신 하나님은 낮을 ‘하루’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시간의 길이는 사람의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역의 핵심 부분을 모세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의 환상을 보고 다음 환상을 보기까지의 시간을 밤에 비유하여 ‘하루’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으로 여겨진다.

 

(3) 고대 근동 지방의 세계관으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

 

진화론자(유신진화론자 포함)들이 기독교의 창세기가 고대 근동의 지역 신화들 중의 하나이거나, 또는 그것을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로 인해 창세기 역사성의 부분 또는 전부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비판해야 할 일이다. 한윤봉은 여기서 한글성경이 그동안 채택한 창세기 1:7-8의 ‘라키아’(רָקִיעַ) 번역어 “궁창”을 ‘둥근 공간’으로 변개한 『쉬운성경』을 인용한다. 그리고 KJV 등 영어성경이 이사야 40:22에서 “above the circle of the earth”(개역개정 “땅 위 궁창에”, 히브리어로는 “עַל־חוּג הָאָרֶץ”: 알 후그 하아레츠, ‘땅의 천구에’)를 “원형의 땅 위에”라고 해석한 것과 욥기 26:7을 덧붙여서 이것들을 성경이 과학과 일치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성경이 과학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위에서 제시한 구절들에서 욥기를 제외하고는 오역을 근거로 한 것이다. 첫째로 ‘라키아’는 결코 ‘둥근 하늘’로 번역될 수 없는 히브리어 단어로 ‘두드려 펴놓은 금속판 등’을 의미하며, 둘째로 이사야서 인용구의 한글 번역은 히브리어 원문대로 잘 번역된 영문을 오역한 것이다. 히브리어는 뒤의 명사가 앞의 명사의 수식어가 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무지에 의한 실수인지, 아니면 성경과 과학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왜곡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면서 이런 행위를 하는 창조과학자가 바로 과학으로 성경해석을 타협하는 것이며, 오역까지 더하면 오히려 그보다 더 나쁜 행위라고 본다. 다윈주의를 과학이라고 신봉하는 유신진화론자들에게 성경 해석을 과학과 타협한다고 비난하는 창조과학자들의 대표인 저자가 그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난을 피해 갈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닌가?

 

(4)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발표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의 촬영 사진들을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에서 증거로 쓰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섣불리 성경 해석으로 달려들었다가 실수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창조론자들은 관련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지켜보면서 충분한 연구가 되었을 때 대응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5) 진화적 창조론-유사품 주의

 

진화적 창조론은 유신진화론 계열의 하나이다. ‘유사품 주의’라는 유치한 태그를 달 필요는 없다. 여기서 창조의 방법을 논하는 데 있어서 진화적 창조론자들과 창조과학자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살펴보면, 과학의 범주에 진화를 포함하느냐 포함하지 않느냐의 차이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창조과학자들이 진화적 창조론 즉 유신진화론 지지자들을 적대시할 이유는 많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이제 창조과학자들이 그들의 잘못된 믿음의 한 축인 무신진화론을 무너뜨리면, 유신진화론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자들이 할 일은 유신진화론을 비난하기에 앞서 무신 진화론을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주적과 싸우지 않고, 어쨌거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먼 이웃을 먼저 공격하는 자신들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주적이 되는 현대 진화론의 두 가지 큰 줄기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의 무한 가능성 주장과 오파린의 자연발생론적 화학진화설이다. 두 가지 모두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변이는 생물의 같은 종 안에서의 다양성을 발현하는 진화에 그치고 있고, 이는 현실적으로 품종개량에 응용되고 있기도 하다. 화학진화는 오파린이 생전에 인공생명을 만들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던 가설이며, 이에 속아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와 실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오파린은 허무하게 죽고(1980) 말았고, 그 뒤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실험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런 실험에 관한 뉴스조차 나오지 않는다.

 

창조론자들이 현대 진화론의 이 두 가지 핵심을 극복하려면, 생물과학에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와 논리적 체계를 갖춘 반론을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진화론과 같은 사이비 과학, 유사과학 또는 증명되지 않은 가설 등은 오직 입증된 과학적 사실로만 반론되기 때문이다. 진화론 반론에는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

 

Ⅲ. 나가는 글

 

여기서 한윤봉은 유신진화론자가 창조를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해석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것을 ‘타협이론’이라는 말로 비난하고, ‘창조과학’은 창조가 사실임을 이미 밝혀진 과학 법칙들과 과학적 사실들을 통하여 종합적으로 변증하며 해석할 뿐이라는 말로 옹호한다. 그의 말은 자연과학이 과학법칙들과 과학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으나, 과학의 범주에서는 같은 뜻의 말에 속한다. 그러므로 같은 과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증명’하면 ‘타협이론’이고, ‘변증하며 해석’하면 ‘창조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구부려하는 말장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매도하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자는 무신진화론자와는 다르게 멀리에서나마 믿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의 먼 형제들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 선교회장 이재만이 쓴 『타협의 거센 바람』’에 휩쓸려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지 않았나 싶다. 창조과학 관련자들은 경쟁이론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도 없이 성경을 앞세워 마구잡이식 공격을 해도 괜찮다는 집단의식을 형성한 것 같다. 그런 열정과 의식을 무신론적 현대 진화론 연구와 비판에 쏟아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 이 나라에서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의 다음 세대 교육에 대한 걱정은 다음 세대가 공교육에서 진화론을 배우게 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어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다. 현대 사회는 전문적 지식과 일반적 지식을 함께 갖춰야 정상적 시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시대이디. 다니엘을 모범으로 삼는 교육은 공교육을 떠나 교회 관련 사교육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과정을 수료한 자는 이후 교회기관에서 취업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부적응자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다니엘식 교육 제안은 비현실적이다. 다음 세대 교육이 걱정된다면, 기독교가 합심해서 진화론을 깨뜨릴 수 있는 다음 세대 인재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서 최고의 창조론자로 양육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이 진화론을 깨뜨리고 기독교 창조론을 제대로 만든다면, 유신진화론자들은 물론 무신진화론자들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주도권을 가질 것이며, 또 교회는 저절로 부흥할 것이다.

 

허정윤 박사(알파 창조론과 오메가 창조론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