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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신학

AI 시대 진화론적 세계관(김명용)·신다윈주의와 유신진화론(한윤봉) 비판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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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진화론적 세계관 비판(김명용)·신다윈주의와 유신진화론(한윤봉) 비판에 대한 논평

박찬호 교수(백석대학교 조직신학)

 

 

1. 가장 먼저 두 분의 논문을 읽고 마음에 든 생각은 이 분들이 비판하고 있는 유신진화론자들 가운데 우리의 우군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표현하는 것 따라서는 논자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진리를 분명하게 외치고 분명한 나팔을 부는 것은 좋으나 누가 적인지도 모르고 마구 팔을 휘둘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안타까움을 혼자 짊어진 듯한 감상도 조금은 거슬렸음을 밝히고자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 주장이 아니면 다음세대가 기독교 신앙을 떠나게 된다는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반대로 바로 그런 주장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음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을 추호의 타협도 없는 젊은 지구론과 일치시켜 놓는 것은 매우 잘못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런 주장을 어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정죄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마치 기독교 신앙을 독점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매우 공격적인 이런 창조론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 유신진화론을 반대하기 위해 오래된 지구론까지 유신진화론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2. 제임스 패커는 성경의 무오성에 관해 토론하면서 북미에서의 복음주의자들이 모든 형태의 생물학적인 진화론은 성경과 상반된다는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보적인 입장임을 피력하고 있다:

 

나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또 그러한 내용을 글로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경학적으로 볼 때,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이나, 그 밖의 부분에서 성경이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비과학자의 처지에서 그 이론 자체에 대하여, 전문가들의 논쟁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지만, 비 비 워필드(B. B. Warfield)가 유신론적 진화론자(theistic evolutionist)였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만일 이러한 점 때문에 내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도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점점 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유신진화론 지지를 천명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소속인 팀 켈러(Tim Keller, 1950-2023)와 트렘퍼 롱맨(Tremper Longman III,1952- ) 그리고 북미주개혁교단 소속의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1970- )와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1940- ) 등이 그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복음주의자들로서 우리는 이들을 향해 유신진화론을 수용했을 때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들의 답을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가하면 『유신진화론 비판』에는 일반적으로 유신진화론자로 알려져 있는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와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가 “오늘날의 유신진화론”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임을 규명하고 있는 유익한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그루뎀과 에릭슨은 소진화는 인정하지만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두 사람 다 유신진화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이러한 그루뎀과 에릭슨의 견해를 프랜시스 쉐퍼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의해 수립되는 우주론의 자유와 한계’를 논하면서 쉐퍼는 결론적으로 두 가지 요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요점의 내용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다:

 

첫째로, 비록 내가 이전의 나처럼 아직도 불가지론자라고 하더라도, 나는 소립자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연속적인 진화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원리로서 처음에 등장한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는 철학적 문제뿐 아니라 방법론적 및 통계학적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환원주의를 기초로 최후의 해명을 시도하는 것은 이제 크게 사라지고 있다. 시간과 우연의 기초 위에서 소립자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과정으로의 연속적 진화 개념은 현대의 합리주의적 인간에 의해 견지된 신념적 입장에 불과하다고 내게는 생각된다.

 

두 번째 요점은 유신진화론과 관련 있는 것이다. 쉐퍼는 “나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개념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장하신 것에 고개를 숙인다면, 우주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논의할 만한 자유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루뎀과 에릭슨 그리고 쉐퍼는 공히 유신진화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루뎀은 유신진화론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에릭슨은 심지어 보수적인 신학자들 가운데 즉 정통신학자들 가운데도 유신진화론자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쉐퍼는 유신진화론에 대해 보다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살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3.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고 다윈이 주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의 기원』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다윈 이론을 설파하고 다녔던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95)는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조상에서 기원했다고 대담하게 주장하였다. 다윈은 1871년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다윈은 최종적으로 인간과 원숭이는 조상이 같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했다. 그가 임종할 때 진화론을 포기하고 자신이 기독교도라고 밝혔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의 문제를 대략 3가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구의 나이, 자연 선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 이타성 현상 등을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문제들로 꼽았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지구의 나이는 다윈이 주장하고 있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시간인 3억년 보다 훨씬 짧았다. 1860년대 스코틀랜드 물리학자로 나중에 켈빈 경으로 불리게 된 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 1st Baron Kelvin, 1824-1907)은 “지구가 원래 녹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구(球)라고 가정하고, 단단한 지표면이 형성될 정도로 냉각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했는데 그 수치는 2000만 년과 1억 년 사이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지구의 나이보다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지만, “다윈이 제시한 방식으로 생물이 진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다윈은 개인적으로 켈빈 경의 결론을 의심했지만, 이 분야에서 반박할 능력이 없었다. 이 문제는 1896년, 다윈이 죽은 지 14년 후 방사성 동위 원소를 통해 지구의 나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면서 해결되었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했던 자연선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다윈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던 그레고어 요한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의 “유전자를 통한 형질의 유전”이라는 설명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멘델은 이런 실험 결과를 다윈이 『종의 기원』을 처음 발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65년에 발표했는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다윈도 그 논문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멘델의 업적은 그가 죽은 후 10여년이 지난 1900년에 휴고 드 브리스(Hugo de Vries), 칼 코렌스(Karl Correns), 에리히 폰 체르마크(Erich von Tschermak)라는 세 명의 생물학자가 다시 발견하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었고 1930년대에 서얼 라이트(Sewall Wright),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 존 홀데인(John B. S. Haldane) 등의 학자들이 집단 유전학과 자연 선택의 관계를 일반 원리로 종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신다윈주의’(Neo-Darwinism)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3. 2018년에 출간된 하라리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부제는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와 함께 이른바 하라리 3부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 곳곳에서 종교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하였던 하라리는『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20장 “의미”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기성종교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인 21장 “명상”에서 자신이 옥스퍼드에 재학 중일 때 시작한 윗빠사나 명상(Vitpassana meditation)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윗빠사나 명상은 붓다가 창안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수행 방법인데 그것이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고 하라리는 말하고 있다. 지금도 그는 매일 2시간 씩 명상을 하고 있으며 매년 30일 이상의 시간을 책이나 쇼셜 미디어 없이 명상하는 리트릿의 시간을 갖고 있다. “15년의 윗빠사나 명상의 수행이 없었다면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와 같은 책의 저술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라고 하라리는 말하고 있다.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하라리가 윗빠사나 명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영혼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지속되며, 삶을 한데 묶는다”라고 말하지만 하라리는 영혼을 관찰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영혼을 탐사할 수는 있다라고 하라리는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뿐만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영혼을 탐사할 수 있다.”

 

하라리는 이른바 빅 히스토리(Big History)를 다루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균·쇠』를 들고 있다. 이런 하라리가 윗빠사나 명상을 자신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온갖 이야기와 종교,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사람이 “어떻게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설명하는 것이 공평”하리라 하라리는 생각한다. 물론 하라리는 자신에게 맞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맞으리라는 인상을 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이 적어도 자신이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지,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내 시야와 글쓰기가 어떻게 변조되는지” 알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 즉 윗빠사나 명상은 하라리가 끼고 있는 안경인 것이다.

 

이런 동양의 명상에 대한 하라리의 주장은 사실 새로울 것은 없다.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고방식의 과감한 전환의 필요를 인식하면서 시작된 신과학운동(new science movement)은 종교(영성)와 과학의 조화·융합, 더 나아가서 통합과 일치를 궁극적인 목표로 내세우며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데 그 대표자는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1939- )이다. 카프라도 하라리와 같이 그 자신 동양적 명상 수련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4. 물리학 교수인 카프라도 하라리와 같이 동양적 명상 수련을 실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카프라는 하라리보다 30여 년 전에 하라리의 주장을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하라리와는 달리 카프라는 동양의 노장사상에서 작금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KAIST 명상과학연구소는 2018년 초대 원장으로 김완두(미산 스님)가 부임하며 출범하였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근거로 해보면 이는 KAIST의 ‘비전 2031’의 일환인 듯 보여진다. 하지만 그동안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명상과 관련된 연구소가 이공계특성화대학에 설립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미산 스님은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하트스마일 명상 프로그램’을 창시했다고 한다. 카이스트신문에 실린 명상과학연구소를 바라보는 우려는 “명상과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일이 과연 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 과학기술원에 명상과학연구소가 들어서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에서 제기되는 것들이다. 미산 스님이 KAIST 명상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하며 밝힌 포부는 다음과 같다: “명상은 종교, 사상, 인종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명상과학연구소는 앞으로 하버드대에서도 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인 명상 기제와 관련된 융복합 연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또 과학적 명상프로그램 개발과 교육을 통해 구성원들의 안정과 미래 가치 실현을 돕겠습니다.”

 

카프라와 하라리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KAIST의 명상과학연구소 설립은 매우 이례적이다 못해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창조과학이 과학이냐라고하는 반론과 마찬가지 반론이 명상에도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KAIST의 명상과학연구소는 KAIST와 플라톤 아카데미의 양해각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종교편향에 대해 매우 민감한 우리나라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5. 20세기 물리학의 2대 발견이라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하여 결정론적 세계관이 뒤로 물러나고 쿤 등의 과학철학자들의 등장을 통해 과학도 결국 인간의 활동임을 알게 되면서 과학주의는 그 상당한 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과학주의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면 도킨스와 같은 호전적인 무신론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전체적인 과학의 발전이 꼭 기독교신앙에 반대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는 주장에 대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로 대표되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답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캠브리지 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였다가 성공회 사제가 된 존 폴킹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재 과학의 다른 분과들보다 생물학계 내에 특별히 유기체가 아닌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편만해 있는 이유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생물학자들이 다루는 현실이 물리학자들이나 다른 자연과학자들이 다루는 현실보다 더 복잡하고 무질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간결하고 아름다운 기초 물리학적 질서를 제시한다. 하지만 생물의 세계는 냉혹한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한다.

 

둘째로 폴킹혼은 생물학자들이 “무분별한 환원주의적 승리주의의 유혹”에 굴복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전학이 분자구조를 벗겨냄으로써 생물학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승리는 예전에 물리학이 우주 중력의 작용을 밝혀 태양계 운동을 설명함으로써 거두었던 승리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우주를 시계와 같은 기계로 설명하는 가설이 가져다 준 외적인 성공에 흠뻑 취한 뉴턴 이후의 세대들은 “인간은 기계”라고 대담하게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자들도 너무 쉽게 “우리 인간은 유전적 생존 기계들(genetic survival machines)에 불과하다”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물리학이 마침내 깨닫게 되었듯, 그 시계 이야기 속에는 시계의 똑딱소리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인간은 유전적 생존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폴킹혼이 보기에 생물학자들의 이러한 열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과학과 신학의 상호작용에 참여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는 생물학자들이 보다 많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접어두어서는 안된다.”

<2024년 3.15일(금) 오후 3시. 과천소망교회당, 기독교학술원 제 101회 월례학술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