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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어거스틴의 주요 사상과 삼위일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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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주요 사상과 삼위일체론

어거스틴의 고백록(2003)

"나의 모든 소망은

오직 당신의 긍휼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소서!"

-어거스틴-

 

어거스틴(354-430)

기독교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사상가!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다 같이 존경하는 교부 신학의 완성자!>

1. 어거스틴의 생애와 당시 상황

1) 출생= 354년 11.13일 북아프리카에서 출생

2) 당시 로마의 식민지에서 가난한 로마 시민권자의 아들

3)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 기독교인

4)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과 라틴어를 배우다.

5) 카르타고에서 방탕한 생활 시작(372년 첫 아들 Adeodatus 탄생)

6) 신흥종교 마니교에 빠지다( 구약과 신약 신은 서로 다르다/ 신약의 신이 더 우월/ 예수도 훌륭한 스승/ 헌신/ 금욕/ 채식 강요). 어머니의 근심! 9년 계속!

7) 377년 아프리카 총독 주관 웅변 대회 우승. 친구 마니교로 개종!

8) 대학 교수가 되다

9) 383년 환락 도시 로마 행! 어머니 반대!

10) 밀라노 수사학학교 교장이 되다!

11) 웅변을 들으려고 기독교 설교를 몰래 듣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조금씩 누그러 지다!

12) 회심!

386년 8월 하나님께 부르짖음! 아이들 노래 가사! 펴서 읽어라(Tolle Lege)!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중략-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못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 12-14!>

13) 암브로스의 설교에 감화. 세례 받다.

14) 북아프리카 교구 감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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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Q.) 어거스틴이 빠졌던 마니교(摩尼敎)는 기독교 종파였나?

A.)

1. 마니교는 기독교 종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때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기독교화한 종교로 간주되었지만 실은 변질된 반기독교적 영지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마니교 창시자의 생애가 적힌 작은 분량의 파피루스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독일 쾰른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사본들(Cologne Mani Codex)은 이 종교가 이란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배화교 등)가 아닌 오히려 유대-기독교의 변두리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종파라기보다 유대-3C 기독교-배화교의 광명과 흑암 투쟁의 이원론-영지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종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2. 마니교 창시자는?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Mani, 215-277)는 페르시아의 바벨론 남부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분파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분파라고 오해를 사기도 했지요. 그는 왕가의 후손으로 상류층 출신이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파르티아 왕국이 멸망한 후 등극한 사산 왕조의 샤프르 1세(재위 242-273) 형제를 개종시켜 그 비호 아래 급속하게 확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 인도뿐 아니라 이 종교는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을 넘어 오늘의 중국 땅으로까지 들어옵니다(694년). 위그르 왕국에서는 패망(840)때까지 국가종교가 되었습니다. 트루판과 둔황 석굴에서 마니교 경전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중국 남부에서 마니교는 17세기까지 밀교로 존속합니다. 창시자 마니는 바흐람 1세(재위 274-276)때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미움을 사 투옥·옥사(277년)하였습니다.

3. 왜 마니교를 만들었나?

그는 12세 때 환상을 보았고 영지주의적 만다이즘(지금도 이라크 남부와 이란 남서부에 영지주의 만다야 공동체 집단이 존재)을 추종하면서 자신의 종교 마니교를 창시합니다. 그리고 241년 포교를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이교들이 신비 체험을 근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마니교 교주도 신비체험이 바탕이 되어 자신의 종교를 시작하였습니다.

4. 마니교 관련 서적이나 경전은?

이미 교부들은 이 종교에 대해 반박글들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니교 경전은 강의 자료에 있듯 7권의 책 전해집니다(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 서한, 거인의 책 등). 그런데 이 경전들이 애굽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국의 투르판과 둔황(敦煌) 석굴(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장소)에서까지 발견된다는 점에서 마니교가 대단히 방대한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어거스틴도 종교적 방황을 하던 가운데 마니교에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5. 주요 교리는?

1) 다양한 종교(기독교의 마르키온주의,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영지주의, 심지어 불교까지) 교리가 혼합적입니다.

2)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을 배경으로 세계는 빛과 흑암의 투쟁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함으로써 생겨났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류는 금욕(입과 손과 마음의 봉인)을 해야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3) 그리스도는 빛의 대표요 사단은 어둠의 대표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마니는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자신이 예수처럼 마지막 선지자요 보혜사라는 이단적 주장을 합니다.

4) 신은 어둠의 아르콘(지배자)를 벌하고 가두기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는 특이한 주장을 폅니다.

5) 그리스도의 육체는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가현설적(假現說的) 그리스도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 조직은?

1) 성직의 위계 제도가 엄격하였습니다.

2) 조직은 성경을 일부 모방하였습니다.(마니-12제자-70감독-교사-행자)

3) 즉 소집단을 효과적으로 운용(오늘날 교회 조직-팀, 구역, 셀 등과 유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7. 따라서 마니교는

기독교 종파가 아닌 혼합종교의 형태를 지닌 이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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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거스틴의 주요 사상

1) 펠라기우스(영국 아일랜드 태생/ 경건한 수도사설/ 5세기초 로마 행)와 논쟁

펠라기우스=

(1) 원죄는 없다

(2) 선행 능력 강조

(3) 유아 세례 반대(유아는 타락 이전 상태이므로 세례 받지 않아도 영생)

(4)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가에 집중해야 하는 자기 운명을 지배하는 주인이다.

2) 어거스틴의 원죄론

(1)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다

(2) 인간 원죄는 도무지 치료받을 수 없는 질병과 같다

(3) 원죄는 감당 할 수 없는 힘과 같다(진흙탕에 빠진 트럭)

(4) 원죄는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죄책이다.

3) 어거스틴의 은총론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어거스틴을 은총박사Doctor Gratiae라 부르는 이유).

(1) 은혜는 그리스도의 값으로 얻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2) 은혜는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의 힘에 의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죄인은 없다!!

(4)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임한다(고전 15:9-10)

(5) 즉 은총은 자유의지보다 선행한다!.

# 1.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 정죄(412년 카르타고 회의)

2. 418년 펠라기우스도 정죄

3. 원죄 교리 확정 및 은총만을 의지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 복음 확정

​​

4) 어머니를 떠나 로마로 떠나던 어거스틴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1) 은혜가 인간 본성을 해방한다.

(2) 은혜는 인간 본성의 치유자 이다.

5) 무천년설, 후천년설의 근거 제공

6) 연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죽음의 중간 지대에 대한 암시(죽은 어머니 모니카를 위한 기도!). 개신교와 다른 사상.

3.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요약

"힘겨운 작업!"(약 12년 작업, 주후 419-420년경 완성)

제 1-4권: 성경에 기초한 삼위일체 신앙

제 5-7권: 논리적 사변적 변호, 특별히 관계적 개념

제 8-14권: 피조물 속 삼위일체 유비와 흔적

1) 성경 속 삼위일체의 동일성과 동등성, 성자와 성령 보내심

(1) 이성을 오용해서 삼위일체 신앙을 공격하는 궤변가들 반박이 이 책을 쓰는 목적

(2) 점진적으로 신적 사물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경

(3) 성경은 어린이들에게 알맞도록 각종 영역에서 표현을 가져옴

(4) 성부는 성자와 동일한 본질이시요 참 하나님이다.

2) 삼위일체의 동등성에 반대되는 주장들 반박

(1) 삼위일체는 만사에 동등

(2) 다 같이 불변하시며 보이지 않으며 전능해서, 보내시며 나타날 때마다 불가분적으로 함꼐 역사하신다.

(3) 종의 형체로는 성부보다 작으신고, 성령보다 작으시고, 자신보다도 작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현재)

3) 구약의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1) 모든 것의 처음 원인 하나님

(2) 기적, 다시 살아난 시체를 보라(겔 37:1-10)

(3) 하나님의 본질(essentia) 자체가 나타난 일은 없다.

4) 하나님의 아들 파견 목적, 파견되신 성자와 성령이 파견하신 성부보다 작지 않으심 설명

(1)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

(2)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구해야

(3)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닫기에 적합하게 된 우리 인간

(4) 6의 완전함(최초 완전수 6=1.2.3)

5) 성경을 근거하지 않은 이단자 논박, 우선 낳으심과 나심의 다른 개념, 본질이 다름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

(1) 물질적이거나 변하는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

(2) 아리우스 비판(났다, 나지 않았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

(3) 헬라어 세 hypostaseis와 라틴어 세 personae(인간적 해석말 것)

(4) 성령의 유일한 시초는 성부와 성자

6) 하나님의 지혜 시며 하나님의 능력, 성자의 동등성, 그리스도 삼위는 일체시며 삼중(三重)이 아니심

(1) 성자는 ㅅㅇ부의 능력과 지혜라는 사도의 말을 오해하지 말 것. 성부 자신은 지혜가 아니시고 지혜의 아버지.

(2) 삼위는 일체시며 삼중(三重, 셋이 셋)이 아니심

7) 한 지혜와 한 능력. 그리고 한 본질과 세 본체(휘포스타시스)

(1) 헬라인은 세 휘포스타시스, 라틴사람들은 세 페르소나(위격)

(2) 헬라 형제들은 한 에센티아와 세 수브스탄티아

(3) 라틴 형제들은 한 에센티아 또는 수브스탄티아와 세 페르소나

(4) 라틴어의 에센티아는 수브스탄티아와 다르지 않음

8) 어느 한 분이 더 크지 않으심. 삼위일체의 흔적은 우리의 지식과 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알듯 사랑에 삼위일체 흔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진리, 선, 정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 인식).

(1) 하나님은 사랑

(2) 하나님의 사랑

(3) 사랑에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

9) 셋은 서로 동등하고 한 본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마음과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과 사랑).

(1)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안에 있는 일종의 삼위일체

(2) 셋은 서로 동등하고 한 본질.

(3) 마음과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과 사랑

10) 마음속의 기억력과 이해력과 의지의 삼위일체(삼위일체 흔적 참조)

11) 사람이 물체들을 보거나, 본 물체상을 회상할 때에 발생하는 삼위일체의 흔적(삼위일체 흔적 참조)

12) 인간 내면 속 지식과 지혜의 구별과 삼위일체 흔적(삼위일체 흔적 참조)

13) 지식 속 삼위일체(삼위일체 흔적 참조)

14) 사람의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데 대해 말하며, 이런 마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금생에서는 이 마음이 하나님의 지식으로 새롭게 되며 내세에 하나님을 볼 때에 하나님과 같이 완전해짐.

15)"삼위일체를 완전히 보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자신을 통해서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볼 뿐"

"당신 앞에 저의 힘과 약함이 있으니,

힘은 보전하시고 약함은 고치소서~~

당신을 기억하며

알며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4. 자연 속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이 있는가?

예수 계시 속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 흔적', Vestigium Trinitatis)

1) 유비적 실마리 찾기​

(1) 인간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다. 육체라는 제한적 조건 속에서 인간은 초월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의식할 뿐이다. 계시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 그런데 그 인식이란 주로 유비(analogia)를 통해 전해진다. 초월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그 흔적이 피조세계 속에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롬 1:20).

(3) 토마스 아퀴나스도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원인이기에 그 결과로서 창조 질서 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유사성”(similitudo)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4) 따라서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도 자연 계시 안에서 우리 인류에게 당연히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주시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

(1) 어거스틴은 이 희망을 가진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이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2)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다.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주었을 리가 없다.

(3) 따라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크게 다르다.

(4)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당연히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5) 하지만 이성이 복음의 방해물인 것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6)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부족함에도 우리 인간은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3) 자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1)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그렇게 철저히 비판하지 않았던가.

(2)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3)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痕迹)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자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찾기로 나아간다.

(4) 물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우매한 시도로 여기는 반론이 늘 있었다. 현대신학자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5)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6)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7)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했다.

(8)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9)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4) 어거스틴의 관점

(1)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2)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중요한 전제와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3)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3)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4)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그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5) 어거스틴의 <고백록> 속 삼위일체 흔적

(1) 어거스틴은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2)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3)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5)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6)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7)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들이 많았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