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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라틴 교부들(터툴리안,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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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교수

철학의 발상지 헬라지역에서 시작된

헬라파 신학자들은

학문과 철학에 정통한 학자들이라 사변적이고 사색적이었으며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신앙적 열정을 지녔으며

논리적이면서도 논쟁적이요

선교적 열정을 지니고 변증적이었던

신앙의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헬라 교부들보다 100년 후에 등장한

라틴교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들 초대 라틴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삼위일체론에 공헌한 라틴 교부들을 살펴봅니다.

Ⅰ. 터툴리안(주후 150년경-215?220?, 라틴 신학의 아버지)

1. 생애

1) 2세기 중엽 카르타고에서 로마군의 이교도 백부장 아들로 태어남

2) 기독교를 접한 시기

정확치 않음. 193년, 법학을 배우고 변호인으로 활약. 신앙으로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접하다.

3) 라틴신학(북아프리카학파)의 아버지로 불리운 터툴리안은 철학에 비판적이었던 대단히 신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Quid Athenae Hierosolymis?, 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라는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헬라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철학에 대항하여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다.

​​

4) 203년 대교회를 떠나 몬타누스파에 가입

5) 터툴리안(주후 150년경-215?220?)의 저서들은 둘로 나뉜다. 초기의 정통 서술과 후기 몬타니즘적 경향의 저술들이다.

6) 몬타니즘과 터툴리안

몬타니즘은 2세기 후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프리기아(Phrygia)에서 열광주의와 계시문학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밀교 사제 출신의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3세기 초 터툴리안이 사는 북아프리카에도 상륙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 운동에 즉시 가담하였다.

7) 터툴리안은 왜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였을까?

내재(內在)의 철학에 반감을 가진 터툴리안의 열정적 초월 신앙은 그가 황홀경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로 이적과 예언 은사를 강조하고 오늘날의 오순절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은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아프리카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접근한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이나 정치 등의 실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실천적으로 접근했다.

​이런 성품이 잘못 발휘되면 도덕률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양극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점에 수렴되기도 한다. 즉 율법주의가 초월주의자들과 만나면 극단은 서로 통하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 몬타니즘주의자들의 금욕(결혼 포기, 재혼 금지, 동정성 강조 등)과 금식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 깊은 참회 등의 엄격함에 매력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입니다.

​​

8) 열광적 근본주의자 터툴리안

독신 생활을 찬양한 몬타니즘의 경향을 따라 터툴리안도 독신을 지킨다. 터툴리안은 일종의 열광적 근본주의자였던 셈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초월주의자들과 통하는 면도 있다.

엄격함에 매력을 느끼는 근본주의자였기에 터툴리안에게 있어 처벌은 용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9) 터툴리안과 오늘날의 기독교

오늘날 우리 기독교도 화평과 희락과 자비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터툴리안은 "간음과 우상숭배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를 수용하고 사면령"을 내린 카르타고 감독의 결정에 대단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툴리안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에 호감을 느낀 한 가지 실마리(?)

터툴리안은 도덕적 강경론자, 엄격주의자, 도덕적 근본주의자로서 정통 교회의 처신에 분노하여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몬타니즘으로 돌아섰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터툴리안에 대해 그는 신학적으로 거의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다. 혹시 이것이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의 매력에 빠진 한 가지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까?

2. 삼위일체와 신학에 대한 터툴리안의 공헌

1) 삼위일체를 비롯한 최초 사용한 신학용어: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그가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였다(Hand me the master!, 키프리안).

2) 성경 라틴어 역본 사용

3) 사도적 전승 사상

4)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공헌

5) 터툴리안의 구원론은 키프리안을 통해 서방 교회 규범(Seeberg)

6)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본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적으로 봄.

7) 회개는 참회로 말미암아 만족이 이루어진다(중세교회 고해제도의 4부분= 통회, 고백, 만족, 사죄).

8) 서방 교회 신앙의 신학적 기초(사도 바울의 속죄의 교리가 터툴리안을 거쳐 안셀름의 속죄론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만족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음)

9) 가톨릭주의의 발전에 기여(고대 및 중세 교회의 구속적 금욕주의): 즉 이레네우스로부터 시작된 라틴 특유의 파라도시스(전승) 사상은 아프리카 교회 감독이었던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 등을 통해 "가톨릭의 교권주의"로 귀결됨(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매개를 두지 않는 복음주의와 대립되는 개념) .

※라틴교부 키프리안(200?-258)의 교회론:

(1) 교회는 외적 조직을 가진 단일체이다. (2) 이 가견적 교회는 하나의 기원으로 시작되므로 특별한 일체성을 가진다. (3) 이 일체성은 특히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4) 이 조직체 밖에서는 교회에 속한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을 가진다고도 할 수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가톨릭 밖 교회의 세례 무효 주장(카르타고 공의회, 256년, 교마 교회에 의해 배척)/ 유아세례 필요성을 원죄와 결부(당시 교회에 유아 세례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0) ​그렇다고 타툴리안이 지속적인 바른 신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터툴리안은 <로고스>(말씀)이 본래 하나님의 비인격적인 이성이었으나 창조 시에 인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종속적 견해다.

11)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도 터툴리안은 "혼합이 아니라 결합(conjunction)"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다. 정통신학은 "혼합", "결합"이라는 두 용어를 경계한다.

3. 삼위일체와 기독론

1) 삼위일체가 아닌 인간:

삼위일체론만큼 기독론도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니니 인간이 이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후 키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기독론 논쟁은 레오 황제의 주선으로 칼케돈 신조의 골자를 이루는 <통합신조>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양성은 연합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를 고백한다(생략)”가 되었다.

2)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칼케돈공회의 절묘한 정리:

칼케돈 신조에서 “혼합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닌 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두 본성의 구분은 결합의 이유로 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고,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존재 안으로 동시에 발휘된다”로 정리되었다.

3) ​삼위일체와 성례론:

유티케스 정죄와 훗날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성례론 논쟁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닌 인간이 부족한 바벨탑 이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4) 삼위일체 용어를 알린 터툴리안의 한계:

터툴리안 같은 초대 기독 신학자가 몬타니즘으로 돌아선 것은 신학 정립의 여명기에 발생한 인류가 가진 안타까운 한계였다.

4. 바른 신앙과 신학의 중요성

1) 오늘날도 여전히 바른 신학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터툴리안의 경우는 초대 교부시대에 당연히 일어난 아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2) ​그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 완벽한 교리를 성경에 직설적으로 기록하거나 초대교회 완벽한 인물을 보내 일치 교리를 만들게 하지 않아 미로 찾듯 난제를 풀어가야 하게 된 것인지 인류는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물론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겠지만.

 

어거스틴의 고백록(2003)

"나의 모든 소망은

오직 당신의 긍휼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소서!"

-어거스틴-

 

기독교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사상가!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다 같이 존경하는 교부 신학의 완성자!>

1. 어거스틴의 생애와 당시 상황

1) 출생= 354년 11.13일 북아프리카에서 출생

2) 당시 로마의 식민지에서 가난한 로마 시민권자의 아들

3)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 기독교인

4)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과 라틴어를 배우다.

5) 카르타고에서 방탕한 생활 시작(372년 첫 아들 Adeodatus 탄생)

6) 신흥종교 마니교에 빠지다( 구약과 신약 신은 서로 다르다/ 신약의 신이 더 우월/ 예수도 훌륭한 스승/ 헌신/ 금욕/ 채식 강요). 어머니의 근심! 9년 계속!

7) 377년 아프리카 총독 주관 웅변 대회 우승. 친구 마니교로 개종!

8) 대학 교수가 되다

9) 383년 환락 도시 로마 행! 어머니 반대!

10) 밀라노 수사학학교 교장이 되다!

11) 웅변을 들으려고 기독교 설교를 몰래 듣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조금씩 누그러 지다!

12) 회심!

386년 8월 하나님께 부르짖음! 아이들 노래 가사! 펴서 읽어라(Tolle Lege)!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중략-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못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 12-14!>

13) 암브로스의 설교에 감화. 세례 받다.

14) 북아프리카 교구 감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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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Q.) 어거스틴이 빠졌던 마니교(摩尼敎)는 기독교 종파였나?

A.)

1. 마니교는 기독교 종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때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기독교화한 종교로 간주되었지만 실은 변질된 반기독교적 영지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마니교 창시자의 생애가 적힌 작은 분량의 파피루스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독일 쾰른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사본들(Cologne Mani Codex)은 이 종교가 이란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배화교 등)가 아닌 오히려 유대-기독교의 변두리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종파라기보다 유대-3C 기독교-배화교의 광명과 흑암 투쟁의 이원론-영지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종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2. 마니교 창시자는?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Mani, 215-277)는 페르시아의 바벨론 남부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분파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분파라고 오해를 사기도 했지요. 그는 왕가의 후손으로 상류층 출신이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파르티아 왕국이 멸망한 후 등극한 사산 왕조의 샤프르 1세(재위 242-273) 형제를 개종시켜 그 비호 아래 급속하게 확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 인도뿐 아니라 이 종교는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을 넘어 오늘의 중국 땅으로까지 들어옵니다(694년). 위그르 왕국에서는 패망(840)때까지 국가종교가 되었습니다. 트루판과 둔황 석굴에서 마니교 경전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중국 남부에서 마니교는 17세기까지 밀교로 존속합니다. 창시자 마니는 바흐람 1세(재위 274-276)때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미움을 사 투옥·옥사(277년)하였습니다.

3. 왜 마니교를 만들었나?

그는 12세 때 환상을 보았고 영지주의적 만다이즘(지금도 이라크 남부와 이란 남서부에 영지주의 만다야 공동체 집단이 존재)을 추종하면서 자신의 종교 마니교를 창시합니다. 그리고 241년 포교를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이교들이 신비 체험을 근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마니교 교주도 신비체험이 바탕이 되어 자신의 종교를 시작하였습니다.

4. 마니교 관련 서적이나 경전은?

이미 교부들은 이 종교에 대해 반박글들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니교 경전은 강의 자료에 있듯 7권의 책 전해집니다(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 서한, 거인의 책 등). 그런데 이 경전들이 애굽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국의 투르판과 둔황(敦煌) 석굴(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장소)에서까지 발견된다는 점에서 마니교가 대단히 방대한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어거스틴도 종교적 방황을 하던 가운데 마니교에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5. 주요 교리는?

1) 다양한 종교(기독교의 마르키온주의,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영지주의, 심지어 불교까지) 교리가 혼합적입니다.

2)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을 배경으로 세계는 빛과 흑암의 투쟁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함으로써 생겨났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류는 금욕(입과 손과 마음의 봉인)을 해야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3) 그리스도는 빛의 대표요 사단은 어둠의 대표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마니는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자신이 예수처럼 마지막 선지자요 보혜사라는 이단적 주장을 합니다.

4) 신은 어둠의 아르콘(지배자)를 벌하고 가두기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는 특이한 주장을 폅니다.

5) 그리스도의 육체는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가현설적(假現說的) 그리스도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 조직은?

1) 성직의 위계 제도가 엄격하였습니다.

2) 조직은 성경을 일부 모방하였습니다.(마니-12제자-70감독-교사-행자)

3) 즉 소집단을 효과적으로 운용(오늘날 교회 조직-팀, 구역, 셀 등과 유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7. 따라서 마니교는

기독교 종파가 아닌 혼합종교의 형태를 지닌 이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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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사상

1) 펠라기우스(영국 아일랜드 태생/ 경건한 수도사설/ 5세기초 로마 행)와 논쟁

펠라기우스=

(1) 원죄는 없다

(2) 선행 능력 강조

(3) 유아 세례 반대(유아는 타락 이전 상태이므로 세례 받지 않아도 영생)

(4)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가에 집중해야 하는 자기 운명을 지배하는 주인이다.

2) 어거스틴의 원죄론

(1)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다

(2) 인간 원죄는 도무지 치료받을 수 없는 질병과 같다

(3) 원죄는 감당 할 수 없는 힘과 같다(진흙탕에 빠진 트럭)

(4) 원죄는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죄책이다.

3) 어거스틴의 은총론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어거스틴을 은총박사Doctor Gratiae라 부르는 이유).

(1) 은혜는 그리스도의 값으로 얻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2) 은혜는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의 힘에 의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죄인은 없다!!

(4)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임한다(고전 15:9-10)

(5) 즉 은총은 자유의지보다 선행한다!.

# 1.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 정죄(412년 카르타고 회의)

2. 418년 펠라기우스도 정죄

3. 원죄 교리 확정 및 은총만을 의지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 복음 확정

​​

4) 어머니를 떠나 로마로 떠나던 어거스틴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1) 은혜가 인간 본성을 해방한다.

(2) 은혜는 인간 본성의 치유자 이다.

5) 무천년설, 후천년설의 근거 제공

6) 연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죽음의 중간 지대에 대한 암시(죽은 어머니 모니카를 위한 기도!). 개신교와 다른 사상.

6)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1) 자연 속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가?

예수 계시 속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 흔적', Vestigium Trinitatis)

인간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다. 육체라는 제한적 조건 속에서 인간은 초월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의식할 뿐이다. 계시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인식이란 주로 유비(analogia)를 통해 전해진다. 초월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그 흔적이 피조세계 속에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롬 1:20). 토마스 아퀴나스도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원인이기에 그 결과로서 창조 질서 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유사성”(similitudo)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도 자연 계시 안에서 우리 인류에게 당연히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주시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

어거스틴은 이 희망을 가진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이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다.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주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크게 다르다.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당연히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이 복음의 방해물인 것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부족함에도 우리 인간은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3) 자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그렇게 철저히 비판하지 않았던가.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痕迹)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자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찾기로 나아간다.

물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우매한 시도로 여기는 반론이 늘 있었다. 현대신학자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4) 어거스틴의 관점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중요한 전제와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3)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그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들이 많았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