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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히브리인 바울과 히브리인들의 창조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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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도서관, 아테네 국립학술원과 더불어 건축가 테오필 한센(1813-1891)의 '신고전주의' 3부작으로 불리는 아테네 대학 건물은 세 건물의 중앙에 위치하여 1841년부터 대학 건물로 사용 중인데, 헬라의 인물과 역사는 사도 바울의 아덴 설교장면(윗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시위를 준비 중이던 아테네 대학생들이 로비에 가득하여 바르게 촬영할 수가 없어 사진이 조금 흐리다)

 

 

히브리인 바울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출신은 아니었다. 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Tarsus) 성 출신으로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civitas)을 갖고 있었다(행21:39, 9:11). 이런 배경은 그가 유대적 유산에 글로벌화 된 의식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바울의 역동성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는 생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 베나민 지파 출신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빌3:5).

유대인 청중이 아닌 헬라 지역 빌립보 교회에 바울이 이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가 이 말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배경은 교회를 박해하기까지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흠이 없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 바리새파 출신으로 반 기독 성향이었던 자신이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최고의 가치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빌3:6-9).

그의 본명 사울은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 초대 왕에 오른 사울과 같았다는 것도 그가 충직한 유대 배경의 사람임을 증거한다.

©조덕영(그리스 데살로니키, 신앙 인물 모자이크 전시회에서)

히브리인들의 창조 신앙

기독교는 창조 신앙의 종교다.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 신앙은 히브리 민족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신 계시였다. 그리고 토라가 말하는 창조주 그 분은 오직 한 분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이 (참 된) 지혜를 쌓아가는 (바른) 기초석이라 여겼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율법의 유명한 선생인 가브리엘 문하에서 자란(행 22:3)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유대인 부류들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민족을 거룩하게 한다는 이상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 유대교 전승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라는 창세기와 모세 율법에 기인한다.

히브리인의 창조 신앙을 이어받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성경적 창조 신앙을 역설한 것은 당연하다.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창조 자체를 변증하려 하지 않았다. 집 마다 지으신 이(히 3:4)가 있는 것처럼 창조는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신 계시다. 그 계시는 성경 계시에 멈추지 않는다. 창조 세상(자연) 속에서도 그 창조의 계시는 여전히 확인된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은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다고 했다(롬1:20).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변명하고 핑계할 수 없다.

칼빈도 자연과 우주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고 창조 세상(자연)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책”, “휘황찬란한 (영광의) 극장,” “무언(無言)의 교사”, “거울”, ”궁전“ 등으로 표현하면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보고자 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창조세계의 관점과 관심이 다른 책으로 보았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책은 아니었다. 즉 성경은 전문 과학 서적처럼 대할 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분명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자연은 인간 타락이후로 조금 어그러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책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피조세계의 연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훌륭한 도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었다.

창조세계를 통한 계시는 과학 기술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조금도 변경되지 않았다. 집마다 지으신 이가 있는 것처럼 이 당연한 창조와 창조주와 그 섭리에 대해 피조물인 인간은 이 계시를 부정할 수 없다.

그레샴 메이천(Gresham Machen)은 바울이 유대 묵시문서 속 메시야의 신봉자였다는 브뤽크너(Brückner)의 주장에 대해 묵시문서의 메시야와 바울 서신의 그리스도의 다른 점을 세 가지 지적하는 중에 묵시문서에는 고린도전서 8장 6절이나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메시야의 창조 활동과 관련한 교의(敎義)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의 그리스도는 묵시문서와 달리 세계 창조에 있어 적극적 역할을 담당한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유대 창조 신앙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면서 유대 묵시문서의 메시야와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구원으로 향하는 계시는 아니다. 창조계시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을 때 유대 종교의 메시야로 남을 뿐이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이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 1:19).

칼빈은 바울이 말하는 이 로마서의 요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계식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볼 때 만드신 창조 세상은 핑계치 못할 증거로 제시된 수준의 계시였다(롬 1:20).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창조의 계시)은 이방인들에게도 보여주셨다. 하지만 이것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도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은 허마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다(롬 1:21).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피조물인 인간의 지혜란 우준한 지식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이 21세기 인류 사회를 본다면 창조주보다 자연과학의 질서를 더 숭배하는 과학도들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했지 않았을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조차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바울은 말한다(롬 1:25).

바울이 이 창조 진리를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진리로 연결할 당위성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 첫 장에서 제시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즉 로마서 1장은 복음의 목적(16절, ”유대인과 헬라인에게“)과 중심(17절, ”하나님의 의“)과 대상(16절, 천하 만민)과 복음의 태도로서의 믿음(17절)을 모두 제시하고 있다.

메이천은 이것을 따뜻한 인격 관계로 설명한다. 묵시문서의 메시야는 따뜻한 인간관계의 흔적조차 없는 생명 없는 영상(影像)이다. 반면에 바울의 부활한 그리스도는 인간이 사랑할 수가 있는 인격이고 바울이 사랑한 바 하나의 인격이다. 그리고 묵시문서와 바울 서신의 그리스도가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메시야의 신성 속에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메이천은 논증한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