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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 이해 탐구(데카르트, 토마스 아퀴나스, 파스칼, 안셀름 등-창조와 진화 3-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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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 이해 탐구

교재: 강건일 박사(창조론과 진화론 이해)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

1. 신의 존재 논증

1) 데카르트(합리주의)

(1) 나는 존재한다

(2) 나는 마음속에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잇다.

(3) 나와 같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의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4) 완전한 존재의 내념은 분명 완전한 존재 그 자신에게서 유래했음이 틀림없다.

(5) 만일 완전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6) 따라서 완전한 존재는 존재함이 틀림없다.

 

2) 토마스 아퀴나스(이성과 계시라는 두 날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ologica)에 나타난 신 존재에 대한 5가지 증명들(다섯 가지의 길) 

 

신은 그 존재가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하고 요청된다. 안셀무스가 신의 본성이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를 도출시킬 수있다고 본 반면, 아퀴나스는 인간이 신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로부터 존재를 도출하는 존재론적 논증의 진행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 고유한 영향과 결과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이 원인이 되는 결과들을 보여줌으로써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은 발생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퀴나스는 세계의 시작이 있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창조론교리는 입증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논증은 잠세태의 현실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1)첫째 방식 

 

순수 현실태(actus prus;잠세태가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른 존재의 우선성을 드러냄. 이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초의 부동의 동자(원동자)와 유사하다. 

 

(2)둘째 방식 

 

신은 최초의 동력(causa efficiens)이다. 

 

그러므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부차적인 동력인들은 원인성을 지니기 위해 신과 동인적 인과성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세계 안에 널려있는 동력인들이란 \'부차적인 원인들\'일 뿐이다. 

 

(3)셋째 방식 

 

신은 필연 존재(ens a se)이다. 

 

아퀴나스는 신의 본질에 대한 인간의 지식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는 가정은 거부한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는 모든 다른 존재자들과 세계 전체로부터의 신의 차별성을 발생과 소멸을 초월하는 신의 특성에서 찾으려 했으므로 신과 피조물을 구별하는데 시간적인 차원이 관여한다. 신은 시작과 종말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세계의 한부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4)넷째 방식 

 

신은 스스로 있는 존재(esse per se)이다. 

 

이것은 네 번째 방식과 관련된다. 신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온갖 제한된 완전성의 원천이다. 

 

(5)다섯째 방식 

 

신은 만물이 잠세태로부터 현실 세태로 질서적으로 운동하는 변화 과정의 원천이면서 지향하는 바의 목적(casua finalis)이다. 

 

아퀴나스는 다섯 가지 증명방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이 동자 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초월적으로 신에 대한 성격을 규정한다. 

 

신은 순수현실태로 운동의 제일 원인(제1 증명)이며, 만물의 궁극적인 목적(제5 증명)이며 도한 제일의 동력인(제2 증명)이며, 동시에 모든 완전성의 원형적 또는 형상적 원인( 제4증명)이다. 

 

무엇보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세계의 한부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제 3증명). 

 

아퀴나스는 이성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철학적 추론에 입각해서 인의 속성들에 대해 논증한다. 즉 신의 자존성으로부터 다른 완전성을 도출한다. 독자적 단일성, 진리성, 무한성, 방대성, 편재성 그릭소 영원성 등이 그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를 간략히 살펴봄으로서 얻는 것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에 새로운 방향을 어떻게 제시하였는가 

 

(2) 신학 이해를 위해 철학이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이유 

 

(3) 자연 신학 분야에 있어 아퀴나스의 기획을 통해본 그의 업적의 방대함 

 

(4) 칼 바르트의 "자연신학에 대한 반대 입장"에 대한 이해의 자료 제공 

 

(5) 현대적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이 고전적인 자연 신학을 현대적으로 대치하고자 제시한 수정적 제안에 대한 이해의 자료 

 

3)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

 

1) 파스칼, 과학적 천재성과 문학적 감수성을 겸비한 천재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가냘픈 한 줄기 갈대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사람들이 사람 스스로를 표현할 때 즐겨 사용하는 이 말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전 작품인 파스칼의 「팡세」(Pansées, 주: 생각한 것들 즉, 명상록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 말)에 나오는 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유명한 명구(名句)도 바로 팡세에 등장한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과학의 천재였으며 수학자요 공학자요 철학자이면서 평신도 신학자요 문학적 조예를 겸비한 누구보다도 따뜻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파스칼은 비록 정규 학교에는 다닌 적이 없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관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빈 접시를 막대기나 젓가락 등으로 두드리면 울림에 따라 여러 소리를 낸다는 것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한 번쯤 즐겼던 놀이이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몇 가지 실험을 한 후 간단한 논문을 작성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나이 겨우 11살 때의 일이었다. 12살이 되어서는 수학의 한 분야인 점과 선 그리고 면과 입체 등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에 관심을 갖고 독자적으로 공부하여, 유클리드라는 유명한 수학자가 오래 전에 세운 「유클리드의 제 1 권 제32명제」를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4년 후 󰡒원추형 곡선에 관한 이론󰡓이라는 수학의 유명한 정리로 발전하였다. 이 평면 기하학의 정리는 오늘날 󰡒파스칼의 정리󰡓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2) 파스칼이 컴퓨터의 원조가 된 사건

 

1639년, 17살이 되면서 파스칼은 아버지를 따라 르왕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간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세무 관계 사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파스칼은 세금 계산에 분주한 아버지를 보았다. 󰡐어렵고 까다로운 계산을 좀더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도와드릴 수 없을까?󰡐 지역 세무 관료였던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리기 위해 시작된 파스칼의 연구는 5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다섯 개의 계산기를 고안하면서 보완을 거듭하여 드디어 계산기를 완성한다. 비록 덧셈만이 가능한 계산기였지만,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시발이라고 할 만한 위대한 발명이었다. 이 덧셈 기계는 여송연 담배갑 크기의 기계로 파스카린(pascaline)이라고 불렸는데 다이알을 돌리면 윗부분 유리창에 숫자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 50개를 제작했다고 알려진다. 지금도 이 기계 중 일부가 남아있어 그의 천재성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기계를 사용하여 덧셈을 시작한 최초의 일이었다. 오늘날 컴퓨터의 역사를 다룰 때 마다 책의 서문에 반드시 파스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3. 천재 과학자 파스칼

 

무엇보다 파스칼을 천재 과학자로 널리 알려지게 만든 것은 󰡒진공에 관한 실험󰡓과 󰡒파스칼의 원리󰡓의 발견이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자연의 어디에서도 진공은 불가능하다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유명한 과학자이며 그리스도인이었던 갈릴레이의 제자 토리첼리(1608-1647)가 실험적으로 진공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하였다. 한쪽 끝이 막힌 유리 관에 수은을 가득 넣고 열린 유리 관 입구를 수은 통안에 넣으면 압력에 의하여 수은은 내려오게 되고, 밀폐된 유리 관의 윗부분에는 진공이 생기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당시 스승인 갈릴레이가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 재판을 받은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던 토리첼리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무조건 따르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과학자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중세 시대에 교회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1277년 파리의 대주교였던 땅삐에는 교황청의 재가를 얻어 소위 219가지의금지 명제를 발표하였다. 이중에는 물론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것도 있지만 틀린 것들도 많았다. 진공에 관한 언급도 바로 그러한 오류 중 하나였다.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였는데, 그 이유는 신께서 진공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금지 명제가 발표된 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교황청의 권한이 대단하였던 당시에 과학자 파스칼이, 토리첼리가 사망한 후 담대하게 자신이 확인한 실험 결과를 발표한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진공은 틀림없이 가능하다." 이것은 <진공에 관한 새 실험>이라는 논문으로 1648년 발표되었다. 그리고 1653년에는 드디어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완전히 필폐된 용기 중에서 정지하고 있는 액체(유체)의 한 부분에 압력(힘)을 가하면 그 압력(힘)은 유체 내의 모든 부분에 똑같이 전달된다." 이 탁월한 천재 과학자에게 있어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이었다. <팡세>는 바로 그의 사후 편찬된 그의 신앙적 편린의 조각들을 묶은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도박의 논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신앙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파스칼의 내기>라고 알려진 이 논증은 다음과 같다.

 

 

4. 파스칼의 내기란?

 

1) 파스칼은 <팡세>의 제 3장 <도박의 필요성에 대해>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당신은 어느 쪽에 도박을 걸겠는가? 사실 이성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고 어느 한쪽을 버릴 수도 없다. 이게 우리 이성의 한계이다. 또한 어느 한쪽을 선택한 사람을 우리 인간은 잘못했다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해 참 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해 반드시 내기를 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인간은 이미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떠나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 문제에 있어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릴 지도 모를 두 가지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과 행복이다. 또한 우리 인간의 본성이 피하여야 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잘못과 비참함이다. 인간은 늘 그릇된 것을 피하고 비참한 상태를 피하려는 본성이 있다.

 

2) 이제 이 같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이성과 의지와 지식과 행복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자.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득실(得失)이 있는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내기를 건 당신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혹시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주저하지 말고 신이 존재한다는 편에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파스칼은 역설한다. 누구나 내기를 하는 자는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내 건다. 그런데 사실 이 도박에는 확실함이 있다. 인간은 진리를 알아내는 힘이 있다. 즉 이 도박은 도박의 이면(裏面)을 볼 수 있는 내기이다. 이 내기의 답은 성경에도 있고 그 밖에도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 내기를 걸지 않겠는가?

 

3) 파스칼의 내기는 근본적으로 복음적 이해라기 보다는 철학적 이해에 가깝다. 하지만 파스칼의 목적은 단순한 철학적 논증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더 높고 심오한 것이었다. 다방면의 천재였던 그는 철학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그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무한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팡세>에서 그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익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고 역설한 것은 그가 <파스칼의 내기>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그는 자신의 신앙 체험을 다른 사람들도 소유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것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었다. 함부로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파스칼이, 사람들이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며 외친 이 <파스칼의 권고>가 새삼 감동을 준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안셀름, 기독교 사상가 탐색 7)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Anselmus Cantuariensis,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 ~ 1109) 

그리스도의 죽음!!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결 받은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롬 5 : 19)

“이는 영광의 나무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고통을 참으신 나무로다 

인류의 온갖 죄악을 위하여 

태고적 아담의 죄를 위하여“ 

1. 안셀무스의 생애 

1) 출생 :

(1) 1033년 이탈리아 서북부 고대도시 아오스타(현 피에몬테주-주도 토리노- 소속)

(2) 아오스타는 현대 밀라노에서 알프스 꾸르마이어를 거쳐 프랑스 샤모니 몽블랑(Chamonix Mont Blanc, 1924년 제 1회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알프스 산맥에 있어 인구 규모는 그리 많지 않음)

(3) 이탈리아 귀족 롬바르드 가의 자손으로 태어나다 

2) 1060년, 북부 노르망디 르 벡(Le Bec) 수도원(베네딕트 수도원)에 정착(수도원이 유명한 지역) 

3)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은 영국을 공략한 후 르 벡 수도원장 랑프랑(Lanfranc)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름 

4) 안셀름은 르 벡 수도원의 수도원장(1078-93, 15년 재임)이 되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중세 수도원들은

유럽의 신앙과 영성과 학문의

일정한 교두보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일생도 

수도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이었다.

5) 그 후 1093년, 영국 왕 윌리엄 2세에 의해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다(1109년 죽기까지 15년간 대주교 역할).

※캔터베리(Canterbury)에 대해

런던 남동쪽 약 85km, 스투어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브리튼 시대(로마 침입 이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하여 로마 점령군의 거점이 되었으며, 로마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켄트 왕국의 수도였으며, 591년에는 로마가톨릭 교회가 파견한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에 상륙, 국왕을 비롯하여 많은 켄트인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교회를 세운 것이 캔터베리대성당의 기원이다. 8~11세기에는 데인인(人)들의 약탈로 교회도 불타 버렸다. 노르만인들이 잉글랜드를 점령한 후 색슨인으로서는 최초로 T.베켓이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헨리 2세와의 불화 때문에 1170년 암살당하였으며, 죽은 뒤 성인(聖人)의 서열에 올랐다.

지금의 대성당은 1174년 화재로 소실된 후 84년에 재건되고 1495년에 증축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되었다. 캔터베리대성당은 영국 성공회의 총본산이며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거행하는 대관식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새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는 관습이 있다.(두산백과) 참조.

6) 그러나 당시 유럽의 노르만디 공화국과 영국 간 긴장 관계와 교황과 영국 왕 간의 충돌의 와중에서 대주교가 된 이후 주로 유럽에 망명 생활!<1093년 12월 4일 정식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에 부임한 후, 윌리엄이 질병에서 회복되자 안셀무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고, 안셀무스는 이를 성직매매 행위(성직 임명에 대한 보답)로 보고 거절. 1097년 60세의 나이로 추방 당함.>. 

7) 1100년 윌리엄 2세 사망과 헨리 1세의 초청으로 캔터베리로 돌아오다. 그러나 서임권(평신도에 의한 성직자의 임직) 문제로 재 추방. 로마로 망명.

8) 유럽 체류 동안 동방 정교회에 맞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信條)의 하나인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성자[聖子]로부터') 교리를 옹호하는 등 공의회에서 적극적 역할(1054년 이래 동-서방교회 분리)

*참조: '동로마교회의 신조는 "성신은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서로마교회는 거기에 '그리고 성자에게서'라는 의미의 '필리오케(filioque)'를 수용. 즉 서로마교회의 신조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주장. 로마 가톨릭은 6세기부터 사용해 온 "필리오케"교리를 11세기 공식적으로 수용)

9) 1106년 왕의 양보로 캔터베리로 돌아오다. 

10) 중세 최초의 위대한 신학자!

<1720년 교황 클레멘스 6세(1700~21 재위)는 안셀무스를 교회박사로 선언>.

2. 주요 사상 

1) 중세 스콜라 신학(안셀름으로부터 종교개혁 직전까지의 신학)

<※스콜라주의란?>

스콜라(schola)는 본래 중세의 학교를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강의한 교사에 의해 형성된 학문을 바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콜라주의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데 중세 카톨릭의 철학, 신학 그리고 교수 방법을 통칭하는 단어가 되어 있습니다. 

즉 중세 기독 학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조직화하는 방법을 찾았지요. 

이를 통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에리우게나(810경-877경, 아일랜드 출생으로 파리서 활동, 구원은 예정-죄는 예정되지ㅡ않았다 주장<이설>, 신플라톤주의-스톨라신학 설파 ) 또는 안셀름으로부터 11-15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났던 이들 일련의 기독철학 체계를 스콜라주의 시대로 봅니다.

어거스틴(Augustin, 354-430)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반면 스콜라주의자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및 철학 이론에 대한 헬라어 원본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이후 아랍어 번역본이 다시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당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적극 이용하면서 신앙을 이성과 합리적으로 해석한 데서 스콜라철학하면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를 사람마다 편하게 스콜라철학 또는 스콜라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신학 등의 별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1) 안셀름은 로셀리누스(Roscellinus, 1050경-1125경, 프랑스 태생으로 신학에 있어 철학의 변증적 접근, 유명론의 대표 주창자)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강하게 반대하고 실재론을 가르침.

-“보편(Universalia)이 개체(Res)보다 앞서는가?(실재론) 

개체(Res)가 보편보다 앞서는가?(유명론)의 문제!”-

*플라톤-> 영혼은 세상에 나기 전에 이데아를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한다. 이성은 영혼의 본질인데 이 영혼의 이성적 지각인 관념 혹은 보편은 실재성이 있다. 따라서 "보편은 개체보다 앞선다"(Universalia ante rem)

*아리스토텔레스-> 보편은 단지 개체 안에 활동하는 힘이다. 따라서 “보편은 개체 안에 있다”"(Universalia post re).

(2) 캔터베리는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면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도 무너진다고 봄

2) Monologion(독백론, 1077)

(1) 신 존재의 증거 제시

(2) 우리가 선함의 분별이 있다는 것은 표준이 되는 절대 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절대 선 뿐이며 가장 선하다. 가장 선한 까닭에 가장 위대하기도 하다.

(4) 따라서 최고의 선과 최고의 위대한 존재 즉,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인 하나님이 계신다.(어거스틴도 유사한 주장)

3) Proslogion(A Discourse대어록, 對語錄, 1078)

(1)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

(2)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이해한다!” 

(3)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어거스틴 (354-430, crede, ut intelligas, "믿는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다.")

*로셀리니의 제자 피터 아벨라르드(Abelard, Peter, 1079-1142, 1141년 Sens 회의에서 정죄 받음)는 “나는 믿기 위하여 안다”(이성에 의한 시험을 통해 완전한 이해에 도달 주장)

(4)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5)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분“(존재론적 논증, ontological argument)

(6)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어거스틴-안셀름-칼 바르트 1931)은 칼 바르트의 신학 접근법에 영향

4) 안셀무스의 구원론(성육론)

“Cur Deus Homo?”(1098,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Why God Become Man)?! 

(1) 르벡 수도원의 수사 Boso와 대화 형식의 저서

(2) Cur Deus Homo=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Why God Become Man?

(3)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하는 가

(4)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 두 가지 속성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5) 안셀름은 이성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다. 성육신과 십자가를 전제한 전제론적 접근이었다. 

5) 인간 창조 이유= 

(1)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2) 창조의 복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데 있다.

6) 인간 창조 목적의 좌절= 

인간의 죄 때문이다! 

(1) 죄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을 드리지 못한 결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 

(2)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으려면 인간은 죄에 대한 배상의 의무가 있는 데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다! 

(3) 하나님이 이러한 배상을 인간 대신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한 배상을 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면 회복시킬 의무와 능력을 가지게 되신다(성육신의 필요성). 

(5) 우리의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배상 된다(적절한 보속補贖, satisfaction). 

7) 존재론적(본체론적) 신 존재 증명(Ontological Argument)

(1)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이다.

(2) 즉 하나님이라는 관념(사상)에서 하나님의 실재가 추론 된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위대한 실재를 상상할 수 없는 실재다”

3. 안셀무스 평가(묵상과 토의, argument)

1) 신앙은 정말 합리적인가?!

2) 당시 교회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해 제도와 명예와 보속(배상) 개념에 친숙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는 신학은 아닌가?

3)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다루는 데 있어 너무 십자가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과 승천 교리에 소홀한 점은 없는가?

4) 비록 11세기의 사회상과 분위기를 반영하여 안셀무스가 이성을 의지하여 논증하고 있기는 하나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불신자들에게 왜 십자가가 필요한 가를(십자가 이외 다른 일은 왜 안 되는 가를) 주장하는 일이었다. 

5) 강력한 주장(오직 십자가)을 반영함에도 그의 주장은 이성을 기반으로 유연하였다.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