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제 1강)
(주교재: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이해』, 강건일 박사)
※ 본 교재는 기독교 조직신학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과학과 신앙의 입장에서 비판적 접근합니다.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가. 가톨릭, 신앙과 과학: 갈릴레오 종교재판
1. 과학이란 무엇인가
1)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즉 아는 것)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2) 19세기 말 이 말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따라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4) 성경이든 과학적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2. 고대의 우주관
1) 바벨론 창조 설화
(1) 고대 동방의 완전 신화적 창조설화
(2)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말둑(Marduk)이 자기의 대적인 신과 싸워 주도권을 겨루었는데 자기의 대적을 이기자 그 쳐 죽인 대적의 몸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였다.
(3) 고대 민족들은 빛과 어두움을 이원적 세력으로 보았고 어두움으로 대변된 혼돈과 공허를 형이상학적 실재로 보았다.
(4) 바벨론 신화는 이처럼 이원적 세력의 투쟁으로 창조가 발생하였는데 무에서의 발생이 아니라 신의 시체가 세상의 구성 재료가 되었다. 이방인들은 무에서의 세상 창조를 알지 못하였다.
2) 플라톤의 기원론, 영원한 이데아
(1) 철학도 무에서의 창조를 알지 못한다. 이제까지 나타난 최고의 철학이라 할 플라톤(Platon)의 철학에서도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있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을 현 상태로 조성한 것뿐이다.
(2) 플라톤이 자기의 우주론을 전개한 티마이오스(Timaios) 편에 보면 창조론이 전개되는 데 거기에는 성경에서처럼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하급신이 영원한 이데아들을 따라, 그것을 모함으로 하여 이미 있는 기존 물질을 사용하여 현상 세계를 조성한다. 가령 시간은 영원한 모형으로 그림자로 조성되었다. 영원은 완전하므로 원형의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도 영원의 영상이므로 원형의 운동을 한다.
(3) 물질이 하나님처럼 영원하면, 동등 영원이 둘이므로 하나님이 물질보다 우위일 수가 없으므로 이원론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란 성립되지 않는다. 불행하게 플라톤의 이 우주론이 초기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비쳐 초기 대 신학자 오리겐(Origen)이 영원창조를 말하고, 영혼의 선재를 말하게 되었다.
3) 가톨릭 철학의 원조,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원론, 부동의 동자
(1) 플라톤의 제자이고 로마 가톨릭교회 철학자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창조론이 없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부동(不動)의 원동자로서, 우주의 운동 시발자로 인정하나 신은 자기 자신만 관심하고 자기 밖의 사물들에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사고를 사고하는 사고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신을 지향하나 신 자신은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다.
4)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의 유출설
(1) 헬라 철학의 완성자라 부르는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Plotinus)는 우주의 발생에 대해 천지 창조가 아니라, 유출설을 주장한다.
(2) 플로티누스가 신이라고 지칭한 일자(一者)는 충만하고 완전한 존재여서, 그의 존재가 밖으로 흘러넘쳐 신과 유사하나 그 다음 단계가 영의 세계인데 이 영을 신자라고 하여 신과 동일하나 또 다른 면을 가진다. 즉 유출하여 나온 존재는 그 근거와 동일하면서도 다르다. (3) 플로티누스는 이 영을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와 동일시한다. 또 이 영에서 다음 단계로의 운동이 생겨서 영과 일면 같으면서도 일면 다른 존재 곧 세계 혼이 발생한다.
(4) 여기서 물질이 나오는데, 세계 혼에서 더 이상 내려가는 운동이 가능하지 않으니, 다시 일자에게도 회귀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데, 이 회귀운동은 일면은 영혼을 갖고, 타면 물질을 가진 인간에게서 자기보다 더 높은 존재이며 자기의 유래처인 영과 그 이상의 신 존재를 회상하고 회귀를 이루려고 한다. 그래 마침내 모든 것이 일자에게로 복귀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3. 가톨릭과 갈릴레오 종교재판(가톨릭, 신앙과 과학: 갈릴레오 종교재판)
1)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등장(1473-1543)
2) 갈릴레오(1564-1642)의 망원경 관찰
(1) 태양은 완전치 않은 천체: 태양 흑점 관찰, 움직임
(2) 태양 주위를 도는 금성, 목성 관측
(3)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 발견(가니메데, 유로파, 칼리스토, 이오)
3) 당시 가톨릭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
(1) 갈릴레오는 지동설 믿음
(2)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 다 확신.
(3) 성경-> 태양은 떠오르고(창 19:23) 지며(28:11) 해가 하늘에서 솟아올라 하늘 저 끝으로 내 달린다(시 19:6)는 일반적 표현.
4) 교황청과의 갈등: 갈릴레오 종교 재판(1616년, 견책 처분)
(1)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
그런데 신앙과 학문에 있어 열심이었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다가왔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의 연구 결과들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1615년, 갈릴레이는 바닷물이 주기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조수 운동이, 지구의 자전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1년에 한 번씩 공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지동설을 주장하였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견해에 동조하는 이론이었다. 그는 곧바로 가톨릭 추기경에게 불려가게 된다. 1615년 2월 도미니크 수도회의 한 탁발수도사가 갈릴레이에 대한 고소장을 로마 종교 재판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1년여에 걸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해 12월,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로마로 갔다. 하지만 1616년 2월, 로베르토 벨라르미네 추기경은 종교 재판소의 이름으로 갈릴레이에게 경고하였다.
(2) 갈릴레오의 굴복
“갈릴레이의 글들은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지구가 움직인다는 관점을 유지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경고한다.” 당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발견하고도 무사히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죽은 후에야 그가 지동설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우회(迂回)”라고 알려진 이 유명한 경구(警句)는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서 교묘하게 교황청의 눈길을 벗어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지오르다노 브루노(1548-1600)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옹호하다 그만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물론 그가 당한 화형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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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 철학교수였던 브루노의 화형(火刑)
1) 생애
16C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지오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이탈리아 남부 네아펠(Neapel) 부근 치칼라 산 아래 놀라(Nola)에서 태어났다. 1563년 네아펠(Neapel)에 있는 도미니크회에 가입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공부한다. 1572년 여기서 그는 사제가 되었다.
2) 유랑
하지만 B. 텔레지오의 자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고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1576년 그는 수도원을 나와 이탈리아와 스위스, 프랑스, 독일을 다니며 유랑 생활을 한다.
3) 개신교와의 접촉
1579년에는 유럽 개신교인들의 피난처였던 베네바에 도착하여 이탈리아 개혁교회 공동체에 입교했다고 알려진다. 이 교회의 교회 공동체와 제네바 아카데미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4) 사상가 브루노
물론 그가 교단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지지자라기보다 르네상스의 이단자였다. 그 뒤 그는 리용(Lyon)과 대학도시 툴루즈를 거쳐 파리에서 캄브레(Cambrai) 대학 교수로 자리 잡는다.
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기억술은 그가 인간의 뇌를 하나의 생각하는 기계로 만들 수 있다는 상상까지 이르게 한다. 오늘날 돌아보면 일종의 기계론적 사고였다. 브루노의 이 같은 생각은 오늘날 브루노야말로 인공지능에 대한 과학적 상상력의 선조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는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1583년 4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프랑스 대사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 해 여름 옥스퍼드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관한 과목을 가르친다. 그리고 『무한, 우주와 모든 세계에 대하여』(1584)를 출간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라 우주는 고정된 중심이 없는 끝없는 공간이며 무한한 천체가 운동하는 영역이라고 했다.
또한 철학자로서 그는 사물의 내적 구성으로서의 원리와 외적 힘으로서의 원인을 구별하였다. 1585년 파리로 돌아온 후 그가 종교개혁의 중심 도시 비텐베르크로 초빙을 받아 겐틸리스(Gentilis)의 추천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가르친 것도 그의 철학자로서의 소양을 알 수 있다.
5) 마르틴 루터 찬양
그는 독일의 철학적 자유함과 마르틴 루터를 찬양하기도 했다. 1589년에는 헬름슈테트의 유명한 루터 교회 대학에서 가르치고 1591년에는 개혁교회의 중심지였던 취리히에서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진리 안에서의 개신교 신앙의 똘레랑스와 자유함을 느끼게 한다.
6) 시대를 앞서 간 인물
철학에 능한 그의 생각은 성령에 대해서도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세계(우주)의 영(靈)은 무한한 우주의 제 1원인으로서 만물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는 형상으로, 질료(matter)에 형태를 준다고 했다. 바른 신앙적 논증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사고의 편린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는 하다.
브루노가 볼 때 무한한 우주는 바로 이 세상의 영에 의해 전개되는 신의 발자취였다. 그리고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주사물을 이해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그림자)이라 했다.
브루노가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때 자기는 철학자이지 신학자가 아니며 루터적인 두 왕국론을 자연의 오성(悟性)에 따라 논증한 것이지 신앙에 따라 논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 이해가 간다
지금 보면 16C 당시의 앞서간 한 철학자가 충분히 구상해 볼 수 있는 “우주상(想)”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사색은 신앙을 초월하여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겠다.
7) 우주에 대한 생각
하지만 앞서간 그 점이 바로 문제였다. 수도사였던 그는 16세기 후반 태양중심설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한 인물이었으며 우주가 수많은 태양과 행성이 있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여겼다.
태양계 시스템이 태양계 밖에도 존재하고 행성이 태양계 밖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발견된 것은 겨우 1990년 대 중반이요 이것을 발견한 스위스 제네바대학의 천문학자인 미셸 마요르(Michel Mayor,77)와 그 제자 디디에 쿠엘로(Didier Queloz,53)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은 지난 2019년이었다. 노벨상 위원회는 2019년, 1990년 대 중반 태양계 밖에도 행성 시스템이 있음을 발견한 두 천체물리학자에게 노벨상을 수여하여 지구 밖 행성 시스템에 대하여 드디어 공인하였다. 이 둘은 우주 초기 상태(빅뱅 이후 초기)를 연구한 미국 프리스턴 대학교의 이론물리학자 제임스 피블즈(James Peebles, 84)교수와 함께 201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피블즈 교수에게 절반을, 마요르 교수와 쿠엘로 교수에게 절반이 수여되었다.
브루노는 16세기 이미 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무한히 넓고 그 무한하게 넓은 세상 속에는 지구처럼 생명체가 사는 무수한 별들이 있을 것이라고 16세기 당시로서는 남들이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생각을 품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8) 순교와 평가
1591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1592년 베네치아에서 제소되었고, 1593년 로마로 송치되어 8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 결국 1600년 2월 17일 형장으로 비참하게 끌려가 화형을 당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아웃 복싱하듯 “우회”하였으나 브루노는 “파이터”처럼 자기의 주장을 “우회”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순교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의 신앙과 사상이 오류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정말 세상을 전혀 오류 없이 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가 정말 형장에 질질 끌려가 화형을 당할만한 대역죄를 범했던 것이었을까?
이탈리아는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네이팔에 기념비가 있고, 로마의 꽃 시장에도 그의 기념비(1889. 6. 9일)가 서 있다. “나는 가장 높고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우며 우주 안에 내표되어 있는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는 어떤 희생양이었다고 미래의 역사는 평가할까? 과학기술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한 정답이 없이 오히려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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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아래 누군가 다시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밟는 것과 같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포기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아버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거예요.”
마리아 셀레스타 수녀가 된 사랑하는 큰딸의 편지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추기경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대화」(1630년), 「조수에 관한 대화」(1632년) 등 유명한 그의 연구 결과들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과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갈릴레이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 책들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으며 갈릴레이가 곧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문대로 이 책들은 1632년 8월에 판매가 중지되었으며, 그 해 10월 갈릴레이는 교황에게 소환되었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로마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엄숙히 개정되었다.
“갈릴레이의 말과 글에 누구도 동의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도 지구가 움직인다거나 태양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금지한다.”
마침내 갈릴레이는 눈물을 머금고 교황청에 굴복하였으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잘못을 시인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불온한 글들을 발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신앙인이요 과학자로서 갈릴레이의 이 같은 고백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는 첫 번째 신문에서는 자신의 책이 성경과 어긋나지 않음을 강력히 옹호하였지만, 두 번째 신문에서 고문의 위협에 굴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3) 종교와 정치
당연히 그는 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나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렇게 정죄를 받게 된 데에는 당시의 복잡한 종교,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갈릴레이는 본래 당시(1623) 교황 우르반(Urbanus) 8세로 선출된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과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다. 갈릴레이는 우르반 8세 아래 좀 더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라는 책을 통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책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갈릴레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갈릴레이와 새 교황을 함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제수잇 교단이 갈릴레이의 라이벌이었던 자기 교단의 천문학자 오자리오 그라시를 내세워 갈릴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과거부터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기는 하였으나 교황이 된 후에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의 하나인 토스카나 공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하던 교황이 그를 정죄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결국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끝났으며 갈릴레이의 예상보다 더 가혹한 선고가 내려졌다. ‘이단 혐의가 농후한’ 중한 이단에 속하는 죄를 범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후 9년 동안 그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4) 희생양
당시 우리 나이로 70세 노인이었던 갈릴레이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도 “갈릴레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5) 탁월한 과학자 갈릴레오
최근(1987년)에는 갈릴레이가 원자론도 주장하였으며, 교황은 그가 원자론보다는 오히려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지동설 주장 혐의로 재판을 받게 선처를 해주었다는 프랑스의 과학 역사가 레도니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은 갈릴레이가 얼마나 앞서간 뛰어난 과학자였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욥기서 26장 7절에는 하나님께서 땅을 공간에 다시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달이 지구를 돌듯 지구도 태양을 돈다는 것이 성경과 전혀 어긋나지 않음을 나타낸다. 갈릴레이는 이것을 아는 과학자였다. 잠언 8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셨고 궁창으로 해변을 두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두르셨다는 말은 동그랗게 하셨다는 뜻으로 지구의 둥그런 모습을 나타낸다.
(6) 불굴의 학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6).
이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자전하는 지구가 공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놀라운 계시이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자전하고 있음을 놀랍게도 정확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겨우 중세의 기독인 과학자였던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등에 의하여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재판으로 풀려난 이후에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플로렌스의 작은 농장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구금되었다. 늙은 갈릴레이에게 이제는 딸 셀레스타 수녀의 위로만이 도움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의지하던 사랑하는 셀레스타 수녀가 아버지의 혹독한 시련에 따른 마음고생 때문이었는지 1634년 돌연 사망하고 만다. 딸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갈릴레이는 1637년 마침내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를 굽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강의와 수학적 증명”이라는 긴 제목의 논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이것은 그로부터 50년 후에야 뉴턴에 의해 발견된 운동의 제 1 법칙을 설명한 위대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천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견해도 상세히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이탈리아가 아닌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몰래 출판되었는데, 이곳은 일찍이 1575년, 개신교 대학이 설립될 정도로 과학과 신앙이 자유로운 곳으로 갈릴레이의 책을 출판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그의 진정한 상처는 단지 주위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자”라고 수군거리는 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갈릴레이의 신앙과 고집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증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가기도 한다.
(7) 갈릴레이의 말년과 신앙
그는 진실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주위 친구들에게 항상 기도 부탁을 잊지 않았고, 교회 예배에 결코 빠지지 않은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지속적인 두 가지 평안이 있다.
하나는 나의 글 속에서 거룩한 교회를 빗나가는 어떤 그림자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아시는 양심의 증거가 있다.
지금은 비록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은 나의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아실 것이다.”
비록 교회와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신앙과 학문을 비난하였지만, 한때 수도사가 되려 했던 갈릴레이는 이렇게 담대히 고백하던 경건한 사람이었다. 갈릴레이처럼 실명(失明)하였던 영국의 문학가 밀턴은 자신의 장대한 종교적 서사시 『실락원』에서 갈릴레이와 천문학에 관한 내용을 서술함으로써 젊은 시절 만나 본 적이 있는 이 위대한 과학자의 신앙과 학문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1642년, 제자인 비비아니와 훗날 유명한 학자가 된 또 한사람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갈릴레이는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죽은 후 제자 비비아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기독교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영혼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겼다.”
그가 죽자 교회는 그를 외면하였으며, 갈릴레이의 관과 무덤도 만들지 못하게 하였고, 고향에 묻히는 것도 금지하였다.
(8) 갈릴레오의 복권
30년 후, 교회는 그의 유죄를 취소하게 된다. 그리고 100년 뒤에는 무덤과 묘비가 세워졌으며, 인쇄가 금지되었던 책들은 200년이 지나 모두 허용되었다. 그런 후 350년이 흐른 지난 1992년 말, 명예가 정식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국제기구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행한 첫 번째 천문학적 관측들을 기리기 위해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실험가요 발명가였으며 음악가요 저술가요 적극적 논쟁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금은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갈릴레오 갈릴레이! 결국은 갈릴레이 당대의 종교적·정치적 다수가 아니라 그가 옳았다!
이렇게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와 운행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진리를 쫓는 신앙의 과학자였다.
2016년 6월 12일 밤 목성과 주변의 갈릴레이 위성들(목성에는 크고 작은 100개가 넘는 위성들이 있다. 60년대 16개 정도로 배웠던 듯 새롭게 많이 추가되었다. 그 중 갈릴레이 위성은 규모가 큰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최초 발견한 위성들을 말함. 태양계 위성들 가운데 가장 큰 위성들임. 그 가운데서도 태양계에서가장 큰 위성은 가니메데<행성인 수성보다도 큼-5262km>. 유로파는 생명체 존재 가능성에 대해 관련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위성, 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오<Io>위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활화산이 있음)
©서울대 최승언 교수 제공(연구실 두경택 연구원)
나. 과학의 합법적 자율성
1. 요한 바오로 2세(1978년 교황)의 첫 메시지(1979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말 인용)
1) 과학의 합법적 자율성에 대한 반성
2) 과학과신앙 사이에 대한 반성
3) 1981년 연구 위원회 구성
2. 1992년 두 가지 결론
1) 갈릴레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부정한 것은 분명하나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증명했던 것은 아니다(신학적, 과학적 충분하지 못했던 시대로 인정)
2) 교회의 문제: 갈릴레오 당시 신학자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물리적 구조에 대해 심오한 비문자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사실적 관찰의 문제를 신앙의 영역으로 잘못 해석한 측면 인정(갈릴레오가 옳았음을 인정).
3. 신앙과 과학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입장
1)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 속 통일성 추구
2) 통일성은 동일성이 아니다. 다양성과 요소의 보존성을 전제
3) 종교와 과학은 모두 자신의 자율성과 차별성을 보존해야 한다.
4) 종교는 과학을 기초로 확립된 것이 아니며, 과학도 종교의 연장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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