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창조주 하나님의 첫사랑을 보라(창세기 2장 4-14절)
(1)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사람!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대상을 향해 누군가 먼저 다가간다. 그래서 부모의 첫사랑, 짝사랑은 당연히 자녀이다. 짝사랑은 이렇게 누군가 먼저 하는 대표적인 사랑이다. 이것을 받아줄 때 서로서로 사랑이 시작된다. 그렇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2) 사람은 하나님의 첫사랑, 짝사랑이었다.
피조 세계에서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첫사랑, 짝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다. 안식은 하나님의 계명인 동시에 복이었다. 안식은 복을 주시고자 주신 계명이다. 안식 자체가 복이요 휴식하며 지키는 가벼운 짐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이야기를 마치신 후 다시 사람의 창조 이야기로 되돌아 왔다. 안식까지 마치시고 창조 이야기는 다 끝났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무엇을 더 이야기 하고 싶으신 걸까?
왜 사람이야기로 다시 돌아온 걸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대충 만드시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 창조의 면류관이다! 동물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단순한 고등 동물들이 진화해서 원숭이를 거쳐 사람이 된 게 아니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사람만큼은 특별 취급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하면 바로 인간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 첫사랑, 짝사랑이었다.
(3) 하나님은 첫 사랑에게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셨다(창 2: 4)
엘로힘
창조 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여호와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라는 명칭은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부르고 싶어도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던 것이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를 못하고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아도나이’는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커밍아웃하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린다. 아기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미숙하지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시작한다.
주님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내리 사랑’,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라고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4)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사랑으로 지으셨다
흙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다를 게 별로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그루터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사람은 썩으면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생물과 분명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창2:7).
빚으심("야차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43:21)이요,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44:21)했고,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렘1:5)이다.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시139:16)하였고 악인도 '야차르'(왕하 19: 25)하였다.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5) 여기 하나님 사랑의 절정, 십자가를 보라!
그리스도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망가지고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회복시킨다. 십자가 없이 인간의 참된 자존감 회복은 없다. 십자가를 만날 때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소중함도 회복 된다.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꽃 사람이여! 사랑하고 사랑 받으라!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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