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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교회론의 역사 1-속사도, 초대 교부들의 교회론(교회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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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무엇인가(교회론의 역사 1)

Ⅲ. 교회론의 역사

성경에 최초 기록된 "교회"의 고장 데살로니가(데살로니키) 풍경

1. 신약성경의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Εκκλησία)가 최초 나타난 것은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이름으로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살전 1:1절)입니다. 이것은 대략 주후 50년 경, 마가복음이 쓰여 지기 15년 전이었습니다.

데살로니키에서 현존 가장 오래된 아기아 소피아 교회 풍경

2. 데살로니가에는 다수의 가정교회(house church)들이 존재했음이 분명합니다(살후 1:1).

3. 바울은 계속해서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몬 2절), “눔바와 또 그의 집에 모이는 교회”(골 4:15), 예배를 위해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지칭하는 데 이 에클레시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고전 11:18; 14: 19).

4.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살전 2:14),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 1:2), 로마의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롬 16:16)라고 말합니다.

5. 이렇게 교회라는 이름은 일찌감치 성경 속에서 자리잡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부들은 이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 교부시대의 교회론

Ⅰ.교부의 정의

1. 교부란?

1) 교부들이란 사도들의 직계 제자로서,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의 건설과 진리의 체계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권위를 떨친 인물들을 일컫는다.

2) 특히 교부의 자격 중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리에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상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정통적이지 못하면 교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3) 첫 교부는 1세기 말 활동한 로마의 클레멘스(트)를 꼽고 마지막 교부로는 동방교회는 다메섹의 요한(725년 사망), 서방교회는 감독 시대(1-62대)에서 실제적 교황 시대를 연 그레고리 1세(Gregorius, 590-604, 그나마 선량한 감독이었으나 감독이 교회 황제 자리로 나아가는 길을 연 인물, 평신도들의 교회 정치 참여·비판 통로 사실상 차단)까지를 꼽는다.

2. 교부들의 구분

1) 교부는 시대에 따라 니케아회의(325) 이전 교부와 이 후 교부로 크게 나누어 지역과 언어에 따라서 동서로 구별한다.

2) 즉 다음과 같다

① 속사도교부 또는 사도적교부(Apostolic Fathers)

② 변증가들 (Apologists)

③ 헬라교부(Greek Fathers)

④ 라틴교부(Latin Fathers)로 나눈다.

종교개혁의 중심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의 좁은문

Ⅱ. 주요 속사도 교부 6인의 교회론

1. 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s of Rome, 주후 94년 경)

1) ​클레멘트(또는 클레멘스)는 1세기 말 로마에서 사역한 유명한 장로.

2)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to the Corintians) 29장 1-3절): 과거는 이스라엘이 주님이 선택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3) 교회 감독들의 사도직 계승 원칙 최초 언급

4) 감독(episcopos)과 장로(presbuteros)는 목회에 있어 동등 직분

5) 성직자와 평신도(laikos) 구분

6) 선한 “군대로서의 교회”(ⅩⅩⅩⅤ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Society of Jesus, 1540/1865년 구세군 사관학교/ Onward, Christian Soldier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찬 389장) 등에 연결 .

7) 클레멘트는 구약 인용이 많았고(내용의 약 4분의 1) 바울의 정신을 많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야고보와 같이 윤리적 가르침을 많이 언급. 즉 클레멘스의 관심사는 바울과 같이 진리를 세우고 확고히 하는 데 있었다기 보다 교회 형제들의 선행과 덕행을 격려하며 그들의 신앙적 삶에 관심이 많았다.

2.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115년 경 졸)

1) 안디옥 감독으로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에 끌려가서 맹수의 밥이 되다. 이 호송 도중 남긴 7통의 서신이 있음(빌라델비아 교회, 서머나 교회, 로마교회, 서머나 감독 폴리캅, 서머나 머물 때 찾아온 3 교회 대표 등). 이중 <에베소>, <마그네시아>(Magnesia), <트라리아>, <로마인에게>는 서머나에서 집필, <빌라델비아>, <서머나>, <폴리캅에게>는 드로아에서 집필.

2) 초대 교회의 기독론과 교회론 흐름을 알 수 있는 귀한 서신들을 남김.

3) 이그나티우스의 글에 나타난 두드러진 사상은 교회의 통일, 감독의 권위, 순교자의 영광 등.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어디에나 가톨릭 교회가 있다.“

4) 교회의 분명한 삼중 직(감독, 장로, 집사) 사역의 등장

4) 그는 이 서신에서 대속 문제, 성육신 문제(주로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이단인 假現說者들을 취급하면서, 유대주의자들 문제, 감독직의 권위 문제를 취급했다.

3.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69-155)

1)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폴리캅은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이그나티우스 친구였으며 후일 이레네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2) 폴리캅은 155년에 서머나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빌립보의 서신> 한 통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바울 서신들과 베드로서, 요한일서 등이 인용되어 있다.

소아시아 서머나교회

4. 바나바(Barnabas)의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 130년 경)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클레멘트)가 사도 바나바에게 보낸 서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바울 동역자 바나바 저작인지는 불확실.

2) 강한 반 유대주의자(“구약 계시는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에 대한 것”<바나바의 편지> 중).

3) 즉 그는 유대교의 의식적 율법이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을 나타내는 것으로 봄

5. 허메(헤르마스,Hermas)의 목자(150년 경)

1) 롬 16:14에 나오는 인물로 추정하나(오리겐) 불확실.

2)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주로 회개를 권면

3) 하나님의 최초 창조물로서의 교회 언급(“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면, 해와 달보다 앞서 창조된 영적 실체인 교회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제 2 클레멘트 서. ⅩⅣ).

6. 파피아스(Papias, 150년 경)

1) 브프리기아(브리기아)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으로서 150년 경에 버가모에서 순교하였다.

2)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저서로는 다섯 권으로 된 <주의 가르침의 설명>이 있다. 이 책은 사도들과 사도들의 제자들이 전한 것을 한 데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단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속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3) 파피아스는 열정적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하였다.

※ 교회사 속 속사도 교부들 평가 12 가지

1) 사도 시대와 감독 시대 연결

2) 기독교 사상과 교회 교리사의 출발점

3) 성경 신앙을 전하려는 열심(순수한 교회 지도자)

4) 사도들이 전한 신앙 계승을 교회에 전파

5) 교회 질서 강조

6) 성경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중심으로 교회에 파고드는 이단 사상 경계 지속

7) 교회는 유대교와 분명 결별했으며 헬라 철학의 영향도 변증가들에 비해 덜함

8) 교회와 신학의 발아기(發芽期): 독창성이나 깊이 부족

9) 교회와 신학의 교리적 명확성 결여

10) 교회 전승의 정통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

11) 교회 중심, 도덕주의적 경향, 공로주의 통로를 염(미숙한 정통신학자들)

12) 순교

※ 속사도 시대 교회(론)의 특징

1. 교회를 참 Israel로 보았으나 역사적 준비와 교회와의 관계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함.

2. 2세기, 이단들이 일어나 참된 공동 교회를 바르게 알려야 한다는 외적특징의 필요성.

3. 여기서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 계승자인 감독들이 다스리는 하나의 유형적 조직체요, 참 전통을 소유한다고 생각, 즉 보편 교회가 지 교회에 앞선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4. 2세기 은사주의의 Montanism, 4 세기 두 장로(로마교회 노바티안과 카르타고 교회 장로인 노바투스) 중심의 엄격주의 Novatianism, 그리고 4-5세기 분파주의 개혁파 Donatist 등 분파들이 나타나며 역설적으로 교회의 감독제가 점점 강화됨.

5. 교회 중시

6. 교회 선재론(클레멘트)

7. 교회는 창조의 진정한 목표, 감독의 중요성 강조

8. “보편적”(카톨릭) 교회관(이그나티우스)

9. 신비적 성례론

10. 가벼운(venial) 죄와 용서 받을 수 없는(mortal) 죄 구분(로마 교회에 영향)

11. 성찬의 떡은 불사(不死)약이자 영원히 살게 하는 해독제(이그나티우스)

Ⅲ. 이레네우스(Irenaeus, 140?-200?)의 교회론

1. 최초 교부로서의 이레네우스

1) 가톨릭 교회 신학의 원조(?)

2) 최초 교부(敎父)이며 사도시대와 속사도(續使徒) 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4세기 교부들로 이어주는 교차로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중요한 의미

3) 2세기 후반부 활동한 교부로 속사도 교부의 신앙을 이은 교회의 인물. 시대적으로 변증가들의 시대와 일치(교회사에서 제1세기를 사도시대, 제2세기 전반을 속사도 교부시대라고 하면, 제2세기 후반은 변증가들의 시대).

4) 이 시대 이레네우스는 변증가들과는 방향을 달리한 활동을 하다.

5) 변증가들이 당대 기독 철학자들로서 대외 사상을 다루었다면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정통 신앙을 계승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교회에 가르치기에 힘쓴 신앙의 의식적(意識的) 계승자였다.

6) 따라서 그는 ‘교회 최초의 위대한 조직 신학자’라 일컬어진다.

7) 변증가들이 외부로부터 오는 교회의 위협에 힘쓴 데 반해, 이레네우스는 목회자로서 영지주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는 데 관심. 즉 그는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8) 그는 헬라교부로 서방에서 활동하여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음으로 헬라 신학과 라틴 신학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과 소아시아 출신으로 폴리갑의 성경적 신학의 전통을 가지고 서방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는데 그의 중요성이 있다.

9) 이레네우스는 라틴 신학의 원조라 하는 터툴리안의 직접적인 사상적 선배라 할 수 있다.

10)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求贖史), 신 구약의 일치성 등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기독교회사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1) 그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는 헬라적 사색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지 새로우며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견해에도 입장을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12) 한 시대를 끝내고 다른 시대를 여는 교차로에 있던 교회의 이레네우스는 이전 사상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2. 이레네우스의 간략 인물사

1) 헬라(희랍) 사람으로 소아시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남(서머나에서 135년경).

2) 어린 시절에 속사도인 서머나 감독 폴리갑으로부터 배움.

3) 170년경 고울(Gaul)의 리용(Lyon)으로 이주, 177년경 리용의 기독교 공동체 장로가 되고, 리용의 감독 폰티우스(Ponthius)의 순교 후 감독직 계승.

4) 리용의 감독으로서 이레네우스는 교회 목회자가 되고 변방의 켈트족에게 선교. 또한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한 노력.

5) 이레네우스의 관심은 이단 반박과 정통 신앙의 강화.

6)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개의 저서. “소위 그릇 된 지식에 대한 반박과 성토”(Refutation and Overthrow of Knowledge Falsely So-called). 보통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책. 이 저서는 주로 영지주의를 반박한 책. 그리고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Demonstration of Apostolic preaching)이다. 이 외의 다른 문서들은 모두 상실.

전자는 보통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 Against Heresies)으로 통하는데, 5권으로 되어있으며 헬라어 원전은 상실. 라틴어 번역본은 완전히 보존되었고, 마지막 2권에 대해서 아르메니아 판이 남아 있다.

수도원 교회의 주방 풍경(메테오라 전시물)

3. 이레네우스 신학 속 교회론

1) 교회에서의 총괄 갱신의 사역의 중요한 역할

교회에서 총괄 갱신의 사역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아담이 인간의 머리이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사탄을 정복한다. 그리스도는 마귀를 정복하였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히 이루기까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시켰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그리스도가 머리인 육체에게만 주어졌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 갱신 사역을 진행시킨다.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준다.

<※총괄갱신(recapitulation)교리란?>

(1) 이레네우스 신학의 중심점인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이다. (2) 그런데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를 부인한다.

(3)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원형인 그리스도는 인간들 가운데 거주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레네우스는 이 사역을 “총괄 갱신”(recapitulation, ανακεφαλαίωση)이라 불렀다.

(4) 총괄 갱신은 이레네우스의 근본적 주장 가운데 하나로 이 개념은 고대에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레네우스도 하나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5) 이레네우스가 사용한 총괄 갱신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이며 특징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로운 인간성의 총화로서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원형(모델)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2) 교회의 세례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교회의 세례만이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하게 한다고 본다. 그는 세례보다 성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세례는 '영원한 삶의 보장'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우리가 다시 죽을 숙명의 인간의 자녀가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장한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입는 새로운 인간이 되며 우리 몸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

3) 영지주의 교회관 반대: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의 교회관에 당연 반대했다. 영지주의 우주론에서 교회는 신비적 에온(aeon)이었다. 그는 이러한 교회관에 반대하여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였다.

4)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 교회와 사도적 전승으로서의 감독:

교회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받았고 그 능력을 베푼다. 교회는 유일한 성령의 영역이고 성령은 교회에만 위탁되었다. 오직 교회 안에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의 유일한 저장소이다. 이는 교회가 사도적 문서, 구전, 신앙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이레네우스는 사도적 전승을 강조한다. 이 사도적 전승이 감독에게 위탁되었다. 따라서 교인은 감독에게 복종해야 한다.

5) 사도의 전승으로서의 하나된 교회:

그런데 여기서 사도적 전승이란 사도적 신앙과 생활의 계승이다. 로마 카돌릭의 베드로의 권세를 의미하는 그런 전승이 아니다. 사도의 전승이란 교회가 하나라는 하나의 신앙이란 뜻이다.

6)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주적 교회:

(1) 이레네우스가 우주적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경우 그리스도의 능력은 지체에게 나누어진다.

(2)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3) 부패하지 않은 창조의 역사는 다시 이루어져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인간은 지체로써 새로운 친교관계를 갖게 된다.

(4) 이것은 화해를 가져온다. 즉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가져온다. 이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며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5) 이 친교는 총괄 갱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7)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교회는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역을 완수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지체의 통일성을 보존해야 한다. 이레네우스는 이단을 공격한 이유다. 이단들은 교회에 위협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과적인 수행에도 위협이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 이론을 가르쳐서 신자들의 지체를 분리시켜 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전수 받은 교리를 확고히 지켜야 한다. 이레네우스가 사도적 계승의 교리를 소개한 이유다. 이 교리는 초대 교회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유효한 도구였으나 후에 논쟁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오류와 진리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규범은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이다.

그리스 메테오라(meteora, '공중에 떠 있다'는 의미) 수도원 교회 풍경

8) 결론:

이레네우스는 속사도 교부의 신앙을 이은 교회의 인물이다. 또한 "이단 논박"이라는 영지주의에 대항하는 반 영지주의적 사상이 곧 이레네우스의 신학이기도 하다. 이단으로부터 전통적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성경의 일치성을 강조한다. 영지주의는 창조와 구속을 연결시키지 않으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한다. 이렇게 잘못된 이단인 영지주의로부터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곧 그의 신학이었다.

이것은 이레네우스의 주 관심이 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는 것으로 그의 신학 전개는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은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에 대한 진리 수호였다.

초대 교부(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들의 교회론

Ⅰ. 터툴리안(주후 150 or 160년경-215?220?, 라틴 신학의 아버지)

1. 생애

1) 2세기 중엽 카르타고에서 로마군의 이교도 백부장 아들로 태어남

2) 기독교를 접한 시기:

정확치 않음. 193년, 법학을 배우고 변호인으로 활약. 신앙으로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접하다. 아마 이 시기 신앙인이 되었을 가능성.

3) 라틴 신학(북아프리카학파)의 아버지로 불림:

터툴리안은 철학에 비판적인 대단히 신앙적으로 열정적 사람이었음.

4) “예루살렘(헤브라이즘)과 아테네(헬레니즘)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Quid Athenae Hierosolymis?, 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라는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헬라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철학에 대항하여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다.

5) 203년 경(213?) 교회를 떠나 몬타누스파에 가입

6) 터툴리안의 저서들은 둘로 나뉘어짐. 즉 초기의 정통 서술과 후기 몬타니즘적 경향의 저술들이다.

7) 따라서 터툴리안의 교회론도 몬타누스주의자가 되기 전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임.

철학자 플라톤(그리스 국립고고학 박물관), 터툴리안은 철학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2. 몬타니즘과 터툴리안

​1) 몬타니즘은 2세기 후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프리기아(Phrygia)에서 열광주의와 계시문학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밀교 사제 출신의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3세기 초 터툴리안이 사는 북아프리카에도 상륙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 운동에 즉시 가담하였다.

2) 터툴리안은 왜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였을까?

​(1) 내재(內在)의 철학에 반감을 가진 터툴리안의 열정적 초월 신앙은 그가 황홀경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로 이적과 예언 은사를 강조하고 오늘날의 오순절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은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2) ​그리고 같은 아프리카로 알렉산드리아의 헬라파 신학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접근한 반면, 라틴파 터툴리안은 법률이나 정치 등의 실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실천적으로 접근했다.

(3) ​이런 성품이 잘못 발휘되면 도덕률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양극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점에 수렴되기도 한다. 즉 율법주의가 초월주의자들과 만나면 극단은 서로 통하기도 함(ft. wcc와 오순절교단의 만남).

(4) 따라서 당시 몬타니즘주의자들의 금욕주의(결혼 포기, 재혼 금지, 동정성 강조 등)와 금식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 깊은 참회 등의 엄격함에 매력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입니다.

3. 열광적 근본주의자 터툴리안

​(1) 독신 생활을 찬양한 몬타니즘의 경향을 따라 터툴리안도 독신을 지킨다. 터툴리안은 일종의 열광적 근본주의자였던 셈이다. 이렇게 근본주의자들이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초월주의자들과 통하는 면도 있다.

(2) 엄격함에 매력을 느끼는 근본주의자였기에 터툴리안에게 있어 처벌은 용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4. 터툴리안의 교회관

1) 초창기 터툴리안은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레네우스의 교회론 계승

​2) 즉 성경적 교회의 일치성, 신앙의 기준으로서의 교회의 교리들의 공적 권위, 사도들로부터 계승된 감독의 권위 인정.

3) 몬타누스주의자가 된 이후

(1)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에 호감을 느낀 한 가지 실마리(?):

터툴리안은 도덕적 강경론자, 엄격주의자, 도덕적 근본주의자로서 정통 교회의 처신에 분노하여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몬타니즘으로 돌아섰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터툴리안에 대해 그는 신학적으로 거의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다. 혹시 이것이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의 매력에 빠진 한 가지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까?

(2) 엄격주의 속 몬타누스파 교회는 세례 이후 지은 죄에 대해 용서 불가 고수

(3) 시한부 종말론(Pepuza 근처에 예루살렘 하강 예언, 오순절 교단들은 요즘도 전천년적 세대주의 경향이 강함)

(4) 소아시아 교회들이 몬타누스로 인해 교회들이 텅텅 비어간다고 불평(감독들의 불평, 과거 신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간 순복음 교회와 오산리 기도원-서민적 신비주의,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고 있다던 온누리 교회-귀족적 신비주의)

(5) 황홀경의 방언과 예언 현상

(6) "진정한 교회는 성령 그 자체다".

(7) 하지만 교회 사역의 임명 받은 직무와 질서를 부정하지는 않음.

(8) 터툴리안은 "간음과 우상숭배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를 수용하고 사면령"을 내린 카르타고 교회 감독의 결정에 대단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터툴리안이 어떤 성품과 교회관의 소유자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교회와 신학에 대한 터툴리안의 공헌

1)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김석환 교수>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그가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였다(“Hand me the master!”, 키프리안).

2) 성경 라틴어 역본 사용

3) 교회의 사도적 전승 사상

4) 교회의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공헌

5) 터툴리안의 구원론은 키프리안을 통해 서방 교회 규범이 됨(Seeberg)

6)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관점(철학 영향)에서 본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적으로 봄(법률가 출신).

7) 회개는 참회로 말미암아 만족이 이루어진다(중세교회 고해제도의 4부분= 통회, 고백, 만족, 사죄).

8) 서방 교회 신앙의 신학적 기초(사도 바울의 속죄의 교리가 터툴리안을 거쳐 안셀름의 속죄론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만족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음)

9) 서방 교회(즉 가톨릭주의교회) 발전에 기여(고대 및 중세 교회의 구속적 금욕주의):

즉 이레네우스로부터 시작된 라틴 특유의 파라도시스(전승) 사상은 아프리카 교회 감독이었던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 등을 통해 "가톨릭의 교권주의"로 귀결됨(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매개를 두지 않는 개신교 복음주의와 대립되는 개념).

10) ​터툴리안이 지속적 바른 신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음.

터툴리안은 <로고스>(말씀)이 본래 하나님의 비인격적인 이성이었으나 창조 시에 인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종속적 견해이며 반 철학자 터툴리안이 철학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보기이다.

11)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도 터툴리안은 "혼합이 아니라 결합(conjunction)"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다. 정통신학은 "혼합", "결합"이라는 두 용어를 경계한다.

12) 기독론

(1) 삼위일체론만큼 기독론도 어려운 부분. 인간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니니 인간이 이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후 키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기독론 논쟁은 레오 황제의 주선으로 칼케돈 신조의 골자를 이루는 <통합신조>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양성은 연합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를 고백한다(생략)”가 되었다.

(2) ​이것이 칼케돈 신조에서 “혼합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닌 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두 본성의 구분은 결합의 이유로 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고,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존재 안으로 동시에 발휘된다”로 정리됨.

(3) ​이것이 유티케스 정죄와 훗날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성례론 논쟁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닌 우리 인간이 부족한 바벨탑 이후의 분열된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음.

(4) ​아무튼 터툴리안 같은 초대 기독 신학자가 몬타니즘으로 돌아선 것은 신학 정립의 여명기에 발생한 인류가 가진 안타까운 한계였음.

​6. 바른 신앙과 신학의 중요성

​1) 오늘날도 여전히 바른 신학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터툴리안의 경우는 초대 교회(교부시대)에 당연히 일어난 아쉬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2) ​그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왜 완벽한 교리를 성경에 직설적으로 기록하거나 초대교회 완벽한 인물을 보내 일치 교리를 만들게 하지 않아 미로 찾듯 난제를 풀어가야 하게 된 것인지 인류는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겠지만.

Ⅱ. 초대교회, 오리겐(185-255)의 교회관

"오리겐"의 저서

<제 1원리>(원리에 관하여, De Principiis)

-체계화된 최초의 헬라어 조직신학자!(라틴역으로 보존)-

"6천권의 책을 저술한 신학자 오리겐"(에피파니우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정통 신학에서 이탈 했을까?

1.. 초대교회, 오리겐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1) 오리겐(본명 Origenes Admantius, 185년 경-254년 경)은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2) 어린 시절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보편적 기독교 지식인 가정의 경우처럼 아버지에게서 헬레니즘 교육과 성경을 배움.

3) 당시 헬레니즘 교육은 오늘날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철학 공부의 준비 단계로 백과사전식으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하여 배우는 전반적인 교육 과정이었음. 알렉산드리아는 분명 철학의 도시였고 훗날 오리겐은 그 영향을 받은 신학자가 되었다.

4)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5경-339경)에 의하면 이오니아(Ionia)어로 레오니데스(Leonides)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는 세베루스의 치하 박해(Severan Persecution, 202년)시 순교.

5) 17세의 젊은 나이에 오리겐이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에서 신도들을 가르치는 교리문답학교(catechitical school)의 교장이 된 것은 이 같은 아버지의 조기 교육과 더불어 가족의 생계 부양을 위한 이유도 있음.

6) 오리겐의 어머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녀는 맏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려고 결심하자 놀란 나머지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오리겐의 옷을 숨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소년 시절 오리겐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순교에의 권면』(Exhortation to Martyrdom)에서 오리겐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하나님 우편(히 12:2; 8:1)에 앉으셨음을 강조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거나 그와 그의 종들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며 신앙의 지조를 강조하고 있다.

​7) 오리겐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서관이 있었고 학문의 자유를 바탕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동한 신플라톤학파뿐 아니라 철학의 거의 모든 학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오리겐이 기독교 신학의 여명기에 기독교와 헬라 철학을 종합한 인물이 된 것은 이와 같은 환경적 배경이 있었다. 그는 다작의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텍스트, 주석, 설교, 경건생활, 변증에 관한 다양한 책을 썼다.

8) 이 가운데 중요한 저작은 교의적 주제를 주로 다룬 『원리론』(De Principiis, 원리에 관하여)과 철학자 켈수스의 『The true doctrine』을 반박한 변증서인 『켈수스 반박』(Contra Celsum), 성경 해석의 근간을 제공한 『6개 국어 대역 성경』(Hexapla) 이 있고 강해서는 279편이 남아있다.

9) 오리겐이 방대한 저서들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유한 그의 제자 암브로시우스의 개종과 관련이 있다. 영지주의 발렌티누스파 이단을 추종하던 암브로시우스는 오리겐의 제자가 되면서 정통 신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오리겐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215년에서 220년 사이 오리겐은 방대한 저서들을 쓰기 시작했다.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많은 저술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가 사후 300년이 지난 후 교회회의에서 정죄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저서를 몰수하고 발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주후 543년). 이후 우리는 유세비우스의 책을 통해 그가 방대한 저작물의 저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저작은 헬라어 원본이 아니라 대부분 라틴어 역본으로 남아있다.

​11) 그가 당대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대체로 팔레스틴에 선교 여행(215년경)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오리겐은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주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주교는 이에 대해 강한 시기심을 가지게 된다. 표면적 이유는 어린 시절 오리겐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마 19:12)를 위해 자신을 거세한 결과, 사제로 정식 위임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2) 230년 경 팔레스틴 방문 시에 오리겐은 드디어 장로가 되어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데메트리우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데키우스의 박해 동안 많은 박해에 시달리던 오리겐은 황제가 죽으면서 석방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가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고 견디었다고 전하며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69세 때 두로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13) 사실 오리겐 이전 본격적인 기독신학자는 없었다. 변증가요 순교자였던 저스틴 마터나 논쟁적인 이레네우스가 있었고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이레네우스의 제자였던 로마의 히폴투스(Hippolitos)가 있을 뿐이다.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적으로 양육 받은 최초의 문필가였다.

14) 그러기 때문에 오리겐이 어떻게 신학을 전개하였는가는 기독교가 초대 교회 당시 어떻게 신학을 형성해 갔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오리겐은 고대 교회 최초로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포괄적이며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초기 신학형성기에 나타난 오리겐의 교의학적 시도는 많은 공과(功過)를 남기고 있다.

​15) 오리겐은 본문 주해와 주석을 쓴 최초 기독교 성경학자요 교의학의 최초 작품을 쓴 학자요 『켈수스 반박』을 통해 초기 기독교 변증을 이끌었고 창조 신앙에 있어서도 성경적 교리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학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54년 경 순교한 이후 약 300년 후인 제 5차 종교회의(553)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몰수되어 버렸다. 이 때 오리겐의 모든 저작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6)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의 작품들이 몰수되었기에 오늘날 그가 썼다고 알려진 책들이 정말 그가 쓴 원본과 다름이 없는 지도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오리겐의 작품이 분명한지 아니면 후세 인물들이 얼마나 가감했는지 검증 없이 그를 정죄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다루고 있다.

17) 그가 만일 순교 당하지 않고 신학적 연구에 매진하였다면 어떤 학문적 발전과 수정을 이루었을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아쉽다.

18) 하지만 그가 초기 기독교 학자로서 기독교를 강력히 위협하던 영지주의 사상을 부인하는데 앞장서고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stripassianism), 양태론(樣態論),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적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신학적 통로를 제공한 것은 분명한 공헌이었다.

2. 오리겐의 교회론

1) 진정한 교회와 역사적 기구로서의 교회 구분

2)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와 그 가르침은 보존되어야 한다(De Principiis 서문)

3) 조직 공동체로서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 사역 강조

4) 그러나 교회의 각 구성원들은 (찬양, 기도, 경건, 순결, 의와 거룩함의 예배 속) 하나의 성직을 가지고 있다.​

5) 교회 안에도 그물 속 고기들처럼 좋은 고기가 있고 쓸모없는 고기가 있듯(낟알이 왕겨에 싸여 있듯) 주의 보물인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자들이 섞여 있다(가라지와 밀의 비유).

6) 진정한 교회는 영적 교회요 천상 교회이며 경험적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다(성도와 신자 구분-조두만 목사).

7) 천지창조 이전 교회 존재(엡 1:4 주석, 교회선재론) 주장: 헤르마스, 클레멘트 2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계승(플라톤의 이데아 론)

​8) 교회는 사도들 뿐 아니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짐(엡 3:20).

​​

3.. 초대교회는 영지주의를 어떻게 보았는가(오리겐이 본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토양 알렉산드리아

(1)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이후 교회를 위협해온 이단적 신학이다. 비록 성경에 노골적인 영지주의나 영지주의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으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바울은 영지주의를 분명 잘 알고 있었다.

(2) 하지만 한동안 영지주의의 주장에 대한 초대교회의 원사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교회가 원 자료 없이 이레니우스(약 125-약 202), 터툴리안 등이 비판한 영지주의에 대한 내용을 주로 참고해 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3)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알려지고 있는 이레니우스가 약 180-189년 사이에 썼다고 알려져 있는 <이단 논박>의 본래 이름도 <거짓 영지주의에 대한 폭로와 논박>이었다.

(4) 영지주의 문서 나그 함마디를 통해 초대교회의 중심도시들(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가운데 알렉산드리아가 영지주의의 핵심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의 고향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저명한 영지주의 이단자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고향이기도 했다.

2) 영지주의에 대한 오리겐의 비판

(1) 성경에 대해 필로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택한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여러 분파를 만들어내면서 기독교에 다양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지성적 위협을 가하던 시기에 오리겐은 영지주의에 대해 철저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 당시 필로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에 우호적이었던 오리겐이 같은 우화적 해석을 택한 영지주의를 배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영지주의와 성경적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신학적 충돌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창조론, 교회론, 기독론, 구원론이었다. 먼저 영지주의는 성경적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오리겐은 이단자들(영지주의자들을 말함)이 믿는 창조주 데미우르게(demiurge, 조물주)는 불완전하고 선한 존재가 아니라 말한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더 완전한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했다. 발렌티누스에 의하면 다양한 조물주가 있다. 플레로마(Pleroma)의 세계에는 30개의 아이온(aeon)이 있으며 소피아는 가장 낮은 아이온이다. 그렇다면 악이 만연하는 세상은 수준 낮은 아이온이 만든 세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세상을 만든 조물주가 바로 데미우르게인 것이다. 유대교 카발라에서 말하는 아인 호프는 아마 최고 수준의 창조주가 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단숨에 악의 문제를 극복한다. 즉 이 같은 신비로운 지식을 바로 아는 것이 곧 영지요 구원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의 “칭의론”과 전혀 다른 영지주의의 구원론을 볼 수 있다.

(3) 영지주의는 성경적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거부하는 반면 그리스도는 표면적 수용. 하지만 창조와 악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한다. 신령한 지식으로 구원 받는 영지주의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교리가 바로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회의 머리리신 그리스도는 영지주의에서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교리다.

3) 초대 교회 천사 창조론

(1) 21세기 기독교 신학에서 방치내지 간과되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천사론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먼저 현실적 요인으로는 신학이 다원주의 시대에 다양하고 풍성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조직신학의 관심 영역이 분산되면서 정해진 강의 범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천사론의 순위가 뒤로 밀려난 감이 있다. 즉 솔직하게 말하면 제한된 시간에 천사론을 강의할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신학도들도 천사론을 접할 기회가 멀어지고 관심을 접는 경우가 생겼다고 본다.

(2) 하지만 교부 시대는 달랐다. 교회와 기독교 신학에서 천사의 문제는 중요한 주제였다. 오늘날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의 이콘에서 천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천사가 교회 안에 깊숙하고 친숙한 존재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3) 문제는 성경뿐 아니라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속에 자주 등장하는 천사에 관한 서술을 어떻게 정리해야 되는 가하는 문제가 함께 상존하였다. 이 같은 딜레마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까지 세계 교회는 아직 한 번도 공교회의 총회를 연 적이 없었다. 최초의 공의회(니케아)는 주후 325년에 있었다. 성경 범위에 대해 아직 초대교회가 명확한 토대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공의회 이전 신학자들이 지닌 태생적 한계가 여기에 있다.

(4) 오리겐의 시대적 한계:

오리겐에게서도 그런 과도기적 시대의 천사론을 볼 수 있다. 오리겐이 “각각의 천사들은 교회 안에서 아주 낮은 신분의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권능에 따라 자신의 기도를 우리 기도와 합치시키며 우리가 청하는 것을 위해 협력한다”(De Oratione Ⅺ, 1-5)고 기술한 내용은 수호천사에 대한 진술이다. 수호천사에 대한 이런 진술이 개신교에서 낯선 이유는 이들 내용이 주로 정경 66권밖 위경이나 외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5) 영지주의자들과 유사한 듯 다른 오리겐의 천사창조론:

그러면서도 오리겐은 본래 육체는 선한 것(창 1:10, 12, 18, 21, 25, 31)이라 말한다. 오리겐이 영지주의를 반대한 학자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즉 모든 영적 실재들은 자유로운 행동자로서 창조되었는데 그 자유의 결과로 죄를 짓게 되었다. 이후 모든 영적 실재는 그들의 타락 정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었고, 그들이 거할 곳도 정해 졌다. 이때 높은 영성에 도달한 존재들은 신적 존재, 천사, 인격화된 성신 등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천국을 만들었다. 가장 타락한 사탄과 악마들은 어둡고 저급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두 계급 중간에 육체를 입고 나타난 존재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들을 훈련시키신다. 인간의 영 혹은 영혼은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정화되어 천사의 위치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선재한 영혼(anima)들의 타락을 설명하기 위해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생각을 빌려온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렇게 창조된 영들이 신적인 것에 관한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관상을 게을리 하여 타락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둘째 창조 사역에 임하셨다. 둘째 창조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타락한 영들을 위한 임시 처소를 마련키 위한 것이다. 가장 바닥에 떨어진 영들은 악마들(demon)이 되었고 나머지는 인간 영들이 되었다. 이 타락한 인간 영들(선재하던 영들)을 위해 하나님은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몸들을 만들었다. 즉 흙으로 일부는 남자로, 일부는 여자였다. 이 같은 주장은 성경적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낯설다. 정경이 확정되지 않고 플라톤 철학에 익숙한 오리겐이 범할 수 있는 초기 신학 형성기에 발생할 수 있는 오류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이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 여겼던 것은 그의 신학이 성경 밖으로 나가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교회 전승 속에서 로마 카톨릭은 수호천사 교리를 가지게 되는 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리겐이 교회 안에 아주 신분이 낮은 천사라 할지라도 각자의 권능에 따라 자신의 기도를 우리와 합치시키며 우리가 청하는 것을 위해 협력한다고 전한다고 전한 것은 그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6) 천사는 경배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초대교회와 교부들은 천사 경배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체로 유보적이었다. 교부들은 천사 경배나 천사 경시에 대해 모두 잘못된 견해로 보았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와 경배가 합당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천사들이 존경과 사랑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합당한 영예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제2차 니케아공의회(개신교는 이 공의회를 공교회의 총회로 인정하지 않음, 787)는 천사들을 성화(聖畵)로 재현하는 것과 성화를 합당하게 경배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이렇게 우리가 부모와 노인, 통치자들을 공경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특사인 천사들도 그런 관점에서 공경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이 되었다. 이것은 개신교의 천사론과는 분명 다른 견해이다.

오리겐은 『창세기 강해』(8.8)에서 아브라함 앞에 천사의 형상으로 나타난 이는 천사가 아니라 말씀(Logos)이라고 설명한다. 천사 모두가 경배 받을 존재는 아니나 천사 해석에 있어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통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천사 해석의 풍성함의 길을 열어놓은 것은 분명 오리겐의 공헌이었다 할 수 있겠다.

Ⅲ. 라틴교부 키프리안Cyprian(248-258, Carthage 감독)의 교회론

1) 감독 교회 교리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On the Unity of the Church』).

(1) 교회는 외적 조직을 가진 단일체이다. 즉 교회는 감독위에 세워진 것(마 16:18).

(2) 이 가견적 교회는 하나의 기원으로 시작되므로 특별한 일체성을 가진다.

(3) 이 일체성은 특히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4) 연장자인 오리겐의 교회론보다 서구 신학 교회론의 성격 규정한 인물

(5) 카프리안 교회론은 실천적이고 규범적이고 논리적이다.

(6) 교회는 하나이므로, 분파적 노바티안파(로마 교회의 장로 노바티안과 카르타고 교회의 장로 노바투스를 따르던 엄격한 분파)와 도나투스(북아프리카 감독을 따르던 엄격 개혁파)파 배척!

(7) 감독 없이 교회 없고 교회 없이 구원 없다!

(8) 터툴리안을 향한 존경(Hand me the master!)

2) 교회가 하나이니 세례도 하나다

(1) 가톨릭 밖 교회의 세례 무효 주장(카르타고 공의회, 256년, 교마 교회에 의해 배척)

(2) 유아세례 필요성을 원죄와 결부(당시 교회에 유아 세례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줌)

3) 감독은 교회원을 박탈, 회복시키는 권세가 있다.

4) 감독의 실제적 제사직과 제사 행위를 결부

5)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를 감독의 통일성에 둠.

6) 정당한 감독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구원 얻지 못한다.

7) Extra ecclesiam nulla salus(교회를 떠나서는 구원 받을 수 없다).

8) 유형적, 외형적인 통일체로 이루어진 공동 교회(보편 교회)의 관념을 명백하게 확립시킨 사람.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