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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신앙의 눈으로 세상 바라보기)/정치

푸틴, 잠자던 요새의 나라 유럽 맹주 독일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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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잠자던 요새의 나라

유럽의 맹주 독일을 깨우고 있다

독일은 요새의 나라로 유명하다.

다만 나치의 상흔으로 인해

그동안 극구 그 잠재력을 억제하며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잠자던 독일의 본능을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인해 푸틴이 깨우고 있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에 따르면

2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연방의회 특별회의 연설에서

“러시아 제국 건설이라는 야망을 품은 푸틴을 경계하고

그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우리 스스로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자문해야 한다”며

무기 마련 등 군비 증강에

1000억유로(약 134조8900억 원)를 즉각 투자하고,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그렇게 강권해도 주저하던

독일의 실질적 군사력 증강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핑계로

일본이 재무장에 나서

주변국의 우려를 사는 것과 유사하다.

 

독일은 본래 요새의 나라였다.

Spandau Citadel(독일어: Zitadelle Spandau)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요새로,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르네상스 군사 건축물 중 하나이다.

하벨과 슈프레가 만나는 곳 근처에 있는 섬의 중세 요새 꼭대기에 1559~9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현재 베를린의 일부가 된 스판다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최근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또한 시타델의 안뜰은 2005년부터 여름철 야외 콘서트장으로 사용되었다.

1157년에 알베르트 더 베어가 이 부지에 국경 요새를 건설했고, 15세기 중반까지 그 부지는 브란덴부르크 후작 정부 소재지가 되었다. 1560년까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요아킴 2세 헥토르는 크리스토프 뢰머와 계약하여 더 오래된 성, 팔라스, 율리우스 타워를 통합한 이탈리아 스타일의 요새를 건설했다.

1580년, 1594년까지 건설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최초의 군대가 Spandau Citadel에 배치되었다. 1675년, 스웨덴 군대가 처음 요새를 포위하고 베를린이 함락되었으나 1813년 프로이센과 러시아군에 의해 탈환되었고, 성벽은 전투 중에 심하게 손상되었다.

이 요새는 독일 민족주의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Friedrich Ludwig Jahn)을 비롯한 프로이센 국가 수감자들의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1935년에는 나치의 가스 보호 연구소가 설치되었고 현장에는 화학무기(합성, 동물 및 인체 실험, 군수품 개발 및 제조 공정 개발 포함) 작업을 하는 약 300명의 과학자 및 기술자가 고용되었다. 신경 가스를 개발하는 작업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베를린 전투 중에 요새는 도시 방어의 일부가 되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Citadel의 tracé à l'italienne 디자인은 구조를 폭풍우로 만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련은 요새를 폭격하고 습격하는 대신에 그것을 투자하고 항복 협상에 착수한다. 협상 후, 성채의 사령관은 1945년 5월 1일 15:00 직후 Perkhorovitch 중장의 47군에게 항복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고 르네상스 요새 요새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스판다우 요새는 소련군이 처음으로 점령했다. 연합군에 의해 베를린이 분할된 후 스판다우와 그 요새는 영국 영토의 일부였다. 감옥으로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시타델은 국가 사회주의 전범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같은 베를린 자치구에 있는 스판다우 감옥에 수감되었다.

©E. S. Cho

1950년부터 1986년까지 요새에는 직업 학교인 오토 바트닝(Otto Bartning)이 있었다. 그 후, 점점 더 많은 건물이 박물관과 전시를 위해 재설계되었다. 오늘날 스판다우 시타델은 시타델 뮤직 페스티벌 기간 동안 열리는 야외 콘서트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