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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신앙의 눈으로 세상 바라보기)/사회

충주,중원의 특별한 브랜드 4국 역사·문화, 기독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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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중원의 4국 역사·문화 브랜드, 기독교는?

 
충주 탄금대서 바라 본 계명산(775m), 저 산너머 충주댐이 있다

중원땅, 충주만이 가진 특별한 4국 역사·문화 브랜드, 기독교는?

※본 논고는 <충주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일부 보완하였다.

한반도의 중심 도시, 충주

오래전부터 중원(충주)땅은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본래 마한과 백제의 땅이었고 삼국이 치열하게 다투면서 고구려를 거쳐 통일 신라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중원 고구려비와 통일신라 중앙탑의 존재가 그것을 증거 한다. 중원땅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 2도시(국원성)였고, 통일 신라 시대에도 신라의 제 2도시(중원경)였다. 고려시대에도 충주 유씨(劉氏) 유긍달의 딸은 고려 태조 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가 되어 초기 고려 중흥을 이끈 광종(光宗)뿐 아니라 태자 왕태(王泰), 훗날의 정종(定宗)과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증통국사(證通國師) 등의 다섯 왕자와 낙랑(樂浪)과 흥방(興芳) 두 공주를 낳는다. 충주는 호족 유긍달 가문의 세거지요 8목의 하나로 교통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수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민관군과 노비와 민중들이 합세하여 세계 무적 몽골기병들을 강하게 물리친 세계사에 유례없는 유일한 고장도 충주였다. 조선시대에도 충주 고을은 전국 팔도에서 한성, 평양, 의주 다음으로 인구가 4번째로 많았던 고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뿐 아니라 을미의병의 격전지로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한 고장이기도 했다.

 

일제와 충주 사이의 이 같은 역사적 구원(舊怨) 때문이었을까? 일제는 충주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을 핑계로 충주 읍성을 전략적으로 해체해버리고 도청 소재지도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청주로 전격 이전하여 충주 고을을 고사시키기 시작한다. 충주 100년 침체의 시작이었다. 주변 20개 군현을 다스렸던 곳으로 경기도 이천, 여주와 강원도 영월, 정선까지 그 영향력이 상당하였던 내륙의 이 중심도시는 그렇게 조용한 도시로 바뀌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속 고구려 도시 무사시노와 충주가 고구려를 접촉점으로 자매결연을 맺은 것은 관용의 도시 충주의 독특성을 보여준다.

 

©삼국 주거지가 모두 발굴 된 충주 탑평리 유적

고대 3국 유물이 모두 발굴된 탑평리 유물들

충주가 가진 독특성, 4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문화 브랜드

그런데 충주가 왜 4국 도시일까? 이렇게 늘 한반도 중심 도시였던 통일신라 중원경에 가야 인들이 등장한다. 무슨 이유일까? 충주 사람들이 자랑하는 역사 속 명현 5인 가운데 3인이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가운데 2인이 놀랍게도 가야와 관련성이 있다. 왜 가야인들이 오늘날 가파른 소백산맥의 계립령을 넘어 충주까지 이동해 온 것일까? 더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충주는 본래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다가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두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임나일본부의 그 임나가 지금의 가야 땅이 아니라 내륙 충주에 있었다니, 동명이지(同名異地)였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해석하는 데 고민이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신라 3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던 강수(强首)는 중원경의 사량 사람인데 부친은 석체 나마였다. 태종무열왕 때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데가 있어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물었고 강수는 한번 보고 해석하여 설명했다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강수 전에는 강수가 중원땅 부곡(釜谷)의 풀무장이 딸과 야합하였고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답설인귀서」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강수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지금의 중원 동량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강수의 원적이 어쩌면 가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일까?

 

우륵은 본래 가야국 궁중 악사였는데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화하고, 진흥왕은 그를 국원(충주)에서 편안히 살게 해주었고 551년 진흥왕이 낭성에 갔을 때 우륵과 제자 니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진흥왕은 다음 해 대나마 법지, 계고와 대사 만덕을 보내 업을 전수하게 하니 우륵이 그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금(琴)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의 한 사람이다.

 

가야와 임나와 중원(충주)은 도대체 어떤 커넥션이 있었던 것일까? 그 미스터리를 푸는 작업은 그리 쉽지 않다. 앞으로 관련 학자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실마리는 알 수 있다.

 

신라는 멸망한 국가인 가야 유민들의 분산 작업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해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주 세력들을 충주 중원경으로 이주 시켰음을 시사한다. 당시 중원에는 급격한 변혁의 분위기가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신라에서 온 귀족 자제들과 가야 유민들 그리고 토착민들이 어우러지면서 급격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을 것이다.

 

가야인들이 찾아왔던 옛 중원경 충주 남한강의 물길

고대 중원땅, 충주에 기독교 문화?

충주를 배경으로 한 우륵과 강수와 충주의 관할권인 진천 출신의 가야 왕족 김유신의 조상 가문, 그리고 천하 명필 김생 등이 중원땅을 중심으로 활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 정말로 일부 기독교인들 주장대로 가야가 기독교인들이 활동한 국가였다면 중원 땅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좋은 피난처로서의 산악과 중국과 이어지는 수로를 가진 천혜의 땅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또한 가야인은 해양을 기반으로 발전한 연맹체였다. 가야인들은 낙동강과 황강과 남해 바다를 통해 일본 열도, 호남의 뱃길을 오갔고 멀리 중국과도 끝없이 교류하였다. 중원은 한반도 내륙에서 중국 당나라로 가는 남한강 뱃길의 시작점이었다. 가야 연맹체의 멸망으로 바닷길이 끊겼던 가야인들은 중원땅에 들어와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들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가야가 정말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진 국가였다면 중원 뱃길은 당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의 커넥션을 가능케 한다. 뿐만 아니라 중원의 강변과 천변은 고대 취락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신앙 공동체들이 은밀히 자급자족하기에는 천혜의 장소였다. 중원에는 충주천, 요도천 등 다양한 하천들이 남한강으로 유입되며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탄금대 합수머리가 있다. 중원의 선사시대 유적이 목행, 동량의 하천과 용교, 가금, 금가, 단월, 앙성, 산척, 소태, 주덕, 이류, 신니, 칠금, 호암, 용탄, 중앙탑 등 하천과 강 주변 구릉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발굴, 수습되고 있는 것은 고대 중원지역의 취락이 어떤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원 고을에 노을이 지면 강과 하천을 따라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는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지형적 조건은 만일 가야 기독교인들이 정말 존재했다면 수원(水原)이 풍부한 중원은 고대 기독교인들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그 어느 도시보다 적합한 요소들을 품은 도시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필자는 신학자로서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해 일부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고향 충주 주변을 샅샅이 수소문해 보았으나 고대 기독교의 결정적 흔적은 찾지 못하였다. 물론 유물보다는 경전 중심의 기독교 신앙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중원에도 여타 한반도 지역처럼 다양한 불교문화와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남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비인 중원고구려비에 대해 역사교사였던 유우식(兪禹植) 장로가 광개토대왕을 기독교인으로 설정하여 1984년 6월 2일 한국미술사학회가 주관한 제 27회 전국역사학대회 한국사부(韓國史部)에서 “중원고구려비와 관련사의 고찰”에 대해 발표하여 큰 파문과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숭실대가 소장 중인 경주 불국사 마당에서 출토된 돌 마리아 상과 돌 십자가를 근거로 7-9세기 당(唐)에서 유행하던 경교(景敎)의 유입을 고려해 볼 때 통일 신라 제 2도시 중원경은 한반도에 기독교인들이 존재할 경우 중국으로 향하는 절묘한 뱃길의 중심이었음은 틀림없다.

 

숭실대 박물관 소장품©화면 캡쳐

철의 도시 충주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중원과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일찌감치 철 산업이 발달한 유이한 곳이었다. 고대 중원과 가야 지역은 마치 오늘날의 소위 종합제철소와 실리콘 밸리를 가진 지역이었다. 3한 시대부터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가야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철산지와 제철 관련 장인들을 확보하는 일은 그 어느 일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철은 화폐 대용으로도 쓰였고 무기와 농기구와 장수의 갑옷과 투구에 쓰였다. 가야는 신라와 달리 왜(倭)에 철을 수출하던 당대 첨단국가였고 중원에는 지금의 이류면, 가금면 창동, 노은면, 소태면 야동 일대 등에 무수히 많은 제철지가 있었다.

 

고려 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에 보면 중원과 해주의 철은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철이 흘러나온다 했다. 고려 시대에도 중원 일대에 대규모 철산지가 널려 있었다는 증거다. 중원에는 철기 제작을 위한 산림도 풍부하였다. 중원의 이들 고려 다인철소(多仁鐵所)의 장인들은 민관군, 노비, 민초들과 힘을 합쳐 세계를 휩쓴 몽골 기병들과 맞서 몽골 기병들에게 뼈아픈 세계 최초 패배를 안긴 장본인들이 되었다. 이 역사적 쾌거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데에는 충주신문 이규홍 대표의 공헌이 크다.

 

충주박물관 팀에 의하면 이류면 지역에서만 무려 41 군데의 야철지(冶鐵址)가 확인되고 있다. 강수가 부곡(釜谷)의 대장간 집 딸과 혼인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부곡이라는 지명 자체가 가마솥(釜)으로 넘쳐나던 제철단지를 연상케 한다. 이 가마(釜)라는 말은 우리말 그대로 일본 열도에 남아있다. 백제왕이 열도에 칠지도를 선물한 것도 예사롭지가 않다. 일본이 아끼는 보물 칠지도는 중원땅(진천 포함) 어느 야철 장인의 작품이었음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탄금대 주변에서 야철 가마 흔적이 속속 발굴되고 있어 그 성과가 주목된다. 신라는 분명 가야의 철기 장인들을 철이 풍부한 중원 지역으로 사민하였다. 이렇게 중원의 철 문화 속에는 마한 시절부터 시작하여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중앙탑 인근에서는 한반도 유일의 백제, 고구려, 신라의 복합 주거지가 발굴, 확인되기도 했다.

 

예수님이 복음을 주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와 납달리 평민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전했던 것을 보면 한반도의 복음은 가야 왕가보다 가야의 민초들에게 더 깊이 뿌리박혀 은밀하고 끈질기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들이었던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처럼 제철 기술은 한반도 마이너리티였던 신앙인들 삶의 주 된 기반이었을 지도 모른다.

 

경교 마리아 상(숭실대)

충주의 번영, 복음의 융성

산, 돌, 물까지 풍부한 중원의 고장 충주는 이렇게 한반도 유일의 4국 역사 문화 자원을 소유한 천혜의 땅이다. 여기 중원 땅에서 4국 문화는 마치 비빔밥처럼 융합되어 한반도 중심 도시 충주의 번영을 이끌어왔던 것이다. 이것은 배척이 아닌 융합 문화, 상생 문화를 상징한다. 복음도 신앙 자체는 도그마틱하더라도 기독교적 삶과 진리는 사랑과 배려와 상생 속에서 작동된다.

 

민족 시인 신경림 시비(충주 목계 강변)

개인적으로 충주는 필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융합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 시대 중원의 땅 충주는 다시 그 잠재된 폭발력을 품고 꿈틀거리고 있다. 한반도 유일 4국 문화 브랜드와 스토리를 품은 충주의 역사문화 전시관과 4국 먹거리 촌은 어느 지역도 소유 못한 중원 지역의 독창성과 진면목을 전국에 새롭게 알릴 수 있는 신선한 기폭제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충주시 관련 공직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아이디어를 모은다면 충주의 4국 문화촌 브랜드는 한반도 어느 지역도 가지지 못한 중원문화만의 독특성을 알리는 좋은 재료임이 틀림없다. 중원의 언론과 문화 창달을 주도하며 대몽항쟁에 대한 충주의 역사적 가치 등 다양한 문화 이슈 발굴에 탁월한 충주신문이 이 아젠다에 있어서도 중심 역할을 주도할 것을 기대한다.

 

조덕영 박사(신학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