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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신학

창조, 진화, 우연 그리고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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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진화, 우연 그리고 생명

 

 

복음은 말 그대로 복 된 소식이다.

그 기독교 복음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다. 하나는 창조요 또 하나는 구속이다. 구속은 타락을 전제하므로 창조와 타락과 구속은 기독교 세계관의 근간을 이룬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창조였다. 사실 기독교의 창조라는 것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주제요 사실이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에 대한 계시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창조가 있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구원의 참 된 의미는 잠시의 어려움에서 우리가 구출된다는 것이 아니고 창조가 된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에덴 동산으로의 복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새 창조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은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지닌 본래의 창조되었던 상태로 회복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오늘날 어찌된 일인지 교회에서 구원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하나님의 창조 사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듣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학교 교육을 통해서 창조론이 아닌 우연론적 진화론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화를 과학으로 믿고 받아들이기에 성경에 아무리 창조라는 말이 있어도 창조의 사실을 용감하고 자신있게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지 못한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과학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과학적 증거가 있어야만 신뢰하려고 드는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면 아무리 성경말씀이 진리라고 하여도 잘 받아들이지 않을려는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무조건 무시하려고만 든다.

1839년, 영국의 맥밀란은 페달로 된 자전거를 처음으로 발명하였다. 그 때 일부 성직자들은 이것이 사단의 발명품이라 하여 한때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전거 타는 것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수고하고 일하라고 두 다리를 주셨는데 어떻게 편하게 그런 괴물처럼 생긴 도구(?)를 탈 수 있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오늘날 교회로 몰려드는 차량 행렬을 본다면 그들 성직자들은 과연 무어라고 말할까? 과학에 관한 무지는 오늘날도 이와 같은 오류를 거듭할 수 있다.

과학을 단순히 하등 학문이라 외면하고 잘 알지 못하면 오늘날 과학과 관련된 환경문제나 인공 수정 및 인공 임신 중절, 건강, 핵문제, 컴퓨터 디지털, AI, 유전공학 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기독교적으로는 어떤 입장을 취하여야 하는 것인지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전거 에피소드와 같은 실수를 언제든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는 오늘날(단12:4), 창조를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셨다는 성경적 관점에서 과학을 해석할 당위성을 가진다.

오늘날 사단은 기독교의 복음을 깨뜨리고 방해하며 못믿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복음의 기초가 되고 핵심이 되는 창조를 공격하고 있다.

창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다른 종교만도 못한 기반을 가진 종교가 되고 만다. 기독교에서 창조를 제거하면 고층 건물에 1층이 없는 것과도 같다. 마치 큰 교량이 있는데 교각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하고 이 진화론을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그 후 150년이 지난 오늘날은 마치 진화론을 믿어야만 과학자이고 창조를 믿으면 과학자가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 중세의 갈릴레이나 케플러, 뉴턴과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창조 신앙을 가진 과학자였다.

당시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의심없이 믿었으며 과학하는 태도에서도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는데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자연이라는 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연이라는 책을 자세히 연구하고 조사해 보면 하나님의 솜씨를 자연이라는 책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였다.

그런데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하여 진화론을 소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기계론적이며 유물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근본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은 늘 가변적이기에 하는 말이다. 진정한 문제는 진화라는 말 속에는 담긴 엉뚱한 세뇌와 함축이다. 즉 진화라는 말은 이제 단순한 진화를 넘어 발전, 발달, 변이, 변화, 과정이라는 모든 진보적 이념의 씨앗이 되어버렸다. 진화는 어느새 세상이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상한 논리적 귀결의 단어로 우뚝 서 버린 것이다. 즉 진화는 우연이라는 단어와 이상한 이란성 쌍둥이 단어가 되어 사람들 마음 속에 착시 현상을 진실처엄 각인 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창조냐 진화냐"는 합당한 구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창조인가 우연인가, 섭리인가 우발인가의 논쟁이 종교나 논리 차원에서 보다 선명한 구도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창조론, 우연론, 진화론 논쟁은 단순한 과학적 논쟁이 아닌 인류의 보다 다른 차원의 영적 모티프를 다루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사단은 진화론이라는 가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창조의 사실을 희미하게 희석하려 했다. 오늘날 과학하는 사람들은 마치 창조론을 믿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

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자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계 안에 있는 질서를 가지고 과학이라는 도구로 그 질서를 주신 설계자의 오묘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좀더 가깝게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다.

사실 천지만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있다(롬1:20,시 198:1-5).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들에게 직접 알아보라고 명령하셨다(사40:26). 사색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진지하게 자신의 삶과 생명의 근원과 본질에 대해 성찰할 때, 결코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본 모습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사람은 유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것도 하늘의 한 경점만도 못한 인간이기에. 안타깝지만 이것이 인간 스스로에 대한 직설의 정의요 본성이다.

그럼에도 왜 유한한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질기고 고집스럽고 자화자찬하고 교만은 하늘을 찌르는 것일까? 컴퓨터의 원조 천재 크리스천 과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부유하는 존재"라 했다. 이보다 더 적나라한 말이 있을까? 또한 파스칼은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 비참한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여기 인간에 대해 반전의 정의를 내리신 유일한 분이 계신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